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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op of the World (By Doug Henwood)

세계의 꼭대기 (더그 헨우드)


An ambitious study documents the long-term reign of the 1 percent

한 야심적인 연구가 1 퍼센트의 장기 지배를 증명한다


* 출처: 북 포럼 / 20144/5



* 번역:  정성철 cittaa@gmail.com


The core message of this enormous and enormously important book can be delivered in a few lines: Left to its own devices, wealth inevitably tends to concentrate in capitalist economies. There is no “natural” mechanism inherent in the structure of such economies for inhibiting, much less reversing, that tendency. Only crises like war and depression, or political interventions like taxation (which, to the upper classes, would be a crisis), can do the trick. And Thomas Piketty has two centuries of data to prove his point.


이 엄청나고 엄청나게 중요한 책의 핵심 메시지는 몇 줄로 요약될 수 있다: 그것 자신의 장치들에 내맡겨둘 경우, 자본주의 경제들은 부가 불가피하게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 경제들에는 그 경향을 반전시키는 자연적 기제는 물론이고 그 경향을 방지하는 자연적 기제도 없다. 오직 전쟁과 불황 같은 위기들이나 (상위 계급들한테는 위기가 될) 과세 같은 정치적 개입들만 효력을 낼 수 있다. 토마 피케티는 이 점을 증명해주는 200년 동안의 데이터를 갖고 있다.

In more technical terms, the central argument of 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 is that as long as the rate of return on capital, r, exceeds the rate of broad growth in national income, gthat is, r > gcapital will concentrate. It is an empirical fact that the rate of return on capitalincome in the form of profits, dividends, rents, and the like, divided by the value of the assets that produce the incomehas averaged 45 percent over the last two centuries or so. It is also an empirical fact that the growth rate in GDP per capita has averaged 12 percent. There are periods and places where growth is faster, of course: the United States in younger days, Japan from the 1950s through the 1980s, China over the last thirty years. But these are exceptionsand the two earlier examples have reverted to the mean. So if that 45 percent return is largely saved rather than being bombed, taxed, or dissipated away, it will accumulate into an ever-greater mass relative to average incomes. That may seem like common sense to anyone who’s lived through the last few decades, but it’s always nice to have evidence back up common sense, which isn’t always reliable.


더 전문인 용어들을 쓰자면, <21세기 자본론>의 중심 논변은 자본수익률 r이 국민소득의 전반적 성장률 g를 초과하는 한 - r > g 인 한 - 자본이 집중한다는 것이다. 자본수익률 - 이윤, 배당금, 지대, 기타 등등의 형태를 취하는 소득을 그 소득을 낳은 자산들의 가치로 나눈 값 - 이 지난 이 백년 전후 동안 평균 4-5 퍼센트였다는 것은 경험적 사실이다. 일인당 GDP 성장률이 평균 1-2 퍼센트였다는 것 또한 경험적 사실이다. 물론 성장이 더 빠른 곳들과 때들이 있다: 청년기의 미국, 195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의 일본, 지난 삼십년 동안의 중국. 그러나 이것들은 예외들이며 미국과 일본은 평균치로 돌아갔다. 따라서 4-5 퍼센트의 수익이 날려지거나 세금이 붙거나 탕진되기보다는 주로 저금된다면, 그것의 축적량은 평균소득의 평균적 축적량보다 훨씬 클 것이다. 이는 지난 몇 십 년을 경험한 어느 누구에게나 상식처럼 보이겠지만 언제나 신뢰할 만한 것은 아닌 상식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갖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다.


There’s another trend that intensifies the upward concentration of wealth: Fortunes themselves are ratcheting upward; within the proverbial 1 percent, the 0.1 percent are doing better than the remaining 0.9 percent, and the 0.01 percent are doing better than the remaining 0.09 percent, and so on. The bigger the fortune, the higher the return. Piketty makes this point by looking not only at individual portfolios but also (and ingeniously) at US university endowments, for which decades of good data exist. The average American university endowment enjoyed an average real returnafter accounting for management costsof 8.2 percent a year between 1980 and 2010. Harvard, Yale, and Princeton, in a class by themselves (with endowments in the $15$30 billion range), got a return of 10.2 percent a year. From that lofty peak, the average return descends with every size class, from 8.8 percent for endowments of more than $1 billion down to 6.2 percent for those under $100 million. In short: Money breeds money, and the more money there is, the more prolific the breeding.


재산의 상향집중을 강화하는 또 하나의 추세가 있다: 재산 규모 자체가 상위 집단일수록 재산이 더 빨리 증대하고 있다; 이름난 1 퍼센트 내에서는, 0.1 퍼센트가 나머지 0.9 퍼센트보다 더 빨리 증대하고 있고, 0.01 퍼센트는 나머지 0.09 퍼센트보다 더 빨리 증대하고 있다, 등등. 재산이 더 많을수록 수익이 더 커진다. 피케티는 개개인들의 포트폴리오들만이 아니라 (천재적이게도) 수 십 년 동안의 미국 대학교들의 기부금 운용 실적 데이터 - 상당히 신뢰할 만한 데이터 - 또한 살펴봄으로써 이 점을 확인한다. 평균적인 미국 대학교 기부금은 - 관리에 드는 비용을 제하고도 - 1980년에서 2010년 사이 매년 8.2 퍼센트의 평균 실질 수익률을 누렸다. (기부금이 150억 달러에서 300억 달러에 이르는) 독보적인 등급에 속하는 하바드, 예일, 그리고 프린스턴은 매년 10.2 퍼센트의 수익률을 올렸다. 이 최고봉에서 시작해서 기부금 규모가 더 작을수록 평균 수익률이 더 떨어진다. 10억 달러가 넘을 경우는 8.8 퍼센트이고 1억 달러 아래는 6.2 퍼센트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돈이 돈을 증식시키며 돈이 더 많을수록 증식률이 더 높다.


It was once believed, during the decades immediately following the Great Depression and World War II, that vast disparities in wealth were features of youthful capitalism that had been left behind now that the thing was reaching maturity. This theory was first enunciated formally in a 1955 paper by the economist Simon Kuznets, who plotted a curve representing the historical course of inequality that looked like an upside-down U: Kuznets’s chart showed that disparities in wealth rose dramatically during the early years of growth and then reversed once a mature capitalist economy reached a certain (though none-too-specific) stage of development.


대공황과 이차세계대전 직후 몇 십 년 동안 부의 막대한 불균형은 자본주의의 성숙과 더불어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청년기 자본주의의 특징이라는 믿음이 널리 자리 잡았다. 이 이론은 경제학자 사이몬 쿠츠네츠가 1955년에 쓴 논문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그는 위아래가 바뀐 U자형처럼 보이는 불평등의 역사적 추세를 나타내는 곡선을 제시했다: 쿠츠네츠의 표는 부의 불균형이 성장의 초기 몇 년 동안에는 극적으로 상승했다가 일단 성숙한 자본주의 경제가 어떤 (그러나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 발전 단계에 도달하면 줄어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Kuznets’s curve fit nicely with the actual experiences of the rich economies in what the French call the Trente Glorieuses, the “thirty glorious years” between 1945 and 1975, when economic growth was broadly shared and income differentials narrowed. In the United States, according to the Census Bureau’s numbers (which have their problemsmore on that in a moment), the share of income claimed by the top 20 percentand within that group, the top 5 percentdeclined during the glorious years. At the same time, the income of the remaining 80 percent gained.


쿠츠네츠의 곡선은 프랑스인들이 화려한 삼십년이라 불렀던, 경제 성장의 과실이 전폭적으로 공유되고 소득 차이가 감소했던 1945년에서 1975년 사이 동안의 선진 자본주의 경제들의 실제 경험과 멋들어지게 들어맞았다. (문제가 있는 -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얘기하겠다) 통계국 수치에 따르면 그 시기 동안 미국에서는 상위 20 퍼센트의 소득몫이 하락했으며 그 집단 내에서의 상위 5 %의 소득몫도 하락했다. 그와 동시에, 나머지 80 퍼센트의 소득은 증가했다.


But in the United States, the thirty glorious years were actually twenty-odd years; depending on how you measure it, the equalization process ended sometime between 1968 and 1974, again according to the census figures. Still, quibbles aside, the process of relative equalization went on for long enough that it felt like Kuznets was on to something with his curve. I say “relative” because these are still not small numbers: The richest 5 percent of families had incomes about eleven times those of the poorest 20 percent in 1974, the most equal year by this measure since the census figures started in 1947. But that number looks small now compared with the most recent ratio, almost twenty-three times in 2012.


그러나 미국에서는 화려한 삼십년은 실제로는 이십 몇 년 이었다; 어떻게 측정하느냐에 따라, 평준화 과정은, 통계국 수치를 또 한 번 따라 보면, 1968년과 1974년 사이 어느 지점에서 끝났다. 하지만 트집을 잡지 않는다면 쿠츠네츠가 그의 곡선을 제대로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상대적 평준화 과정은 충분히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나는 여전히 작지 않은 수치들 때문에 상대적이라고 말한다: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47년 이래 가장 평준화된 해인 1974년을 보면, 가장 부유한 5 퍼센트의 가구들은 가장 빈곤한 20 퍼센트의 가구들보다 약 열 한배 더 많은 소득을 올렸다. 게다가 그 수치는 가장 최근의 비율, 2012년의 거의 스물 세배와 비교하면 작아 보인다.


While those census numbersand similar statistical efforts based on surveys of households elsewhere in the worldare useful in outlining broad trends, they have a few serious problems. Most important, they don’t account for the very rich, a topic of extreme voyeuristic and political interest. Plutocrats do not answer surveys. The Federal Reserve does a triennial Survey of Consumer Finances that makes special efforts to cover the rich, but by design the members of the Forbes 400 are excludedfor reasons of privacy, according to the survey’s documentation. For serious analysis of the seriously rich, one needs to look at tax data, which is what Piketty (and his sometime collaborator Emmanuel Saez) has done.


그 조사 수치들 - 그리고 가구 조사에 기초해 있는 세계 여러 곳의 유사한 통계 결과들 - 은 광범한 추세의 윤곽을 그리는 데는 유용하지만 몇 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갖고 있다. 가장 큰문제는 그것들이 매우 부유한 이들을 포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인데, 이것은 극히 관음증적이고 정치적인 이해관심을 논제가 되게 한다. 재산가들은 조사에 응하지 않는다. 연준위는 매 3년마다 부자를 포괄하기 위한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는 소비자 재정 조사를 행하지만 포브스 400의 수치들은 의도적으로 배제된다 - 조사국의 문서에 따르면 그 이유는 프라이버시 보호 이다. 매우 부유한 이들에 대한 엄밀한 분석을 하려면 세금 데이터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바로 그것이 피케티(와 그가 때때로 공동연구를 행하는 임마누엘 사에즈)가 수행한 것이다.


Piketty’s study is largely confined to a handful of rich countriesthe United States, Britain, France, Germany, and Japan. These economies have the best data over the longest period of timeand besides, if you’re studying wealth, these are the countries where the moneyed have disproportionately lived. The French data is particularly detailed, because the French Revolution instituted an elaborate registry of property. The French didn’t do much to redistribute wealthit was, after all, a bourgeois revolutionbut they did a lot to catalogue it.


피케티의 연구는 대체로 소수의 부유한 나라들에 한정되어 있다 -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그리고 일본. 이 경제들은 가장 긴 기간을 포괄하는 가장 신뢰할 만한 데이터를 갖고 있다 - 게다가 부를 연구할 예정이라면 그 나라들은 돈 많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나라들이다. 프랑스의 데이터는 특히 상세한데, 프랑스 혁명이 정밀한 재산등록을 제도화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은 부를 재분배하는데 애쓰지는 않았지만 - 그것은 결국 하나의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 부의 내역을 일람하기 쉽게 하는 데는 애를 썼다.


Most rich countries introduced income taxes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which made it possible to study the volume and structure of incomes with some precision and detail. But it’s possible to journey further into the past for estimates of aggregate incomes and of the value of the capital stock. And indeed, much of 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 is devoted to outlining the contours of the value of that capital stock relative to incomesan effective way of analyzing capital’s relative heft over time. For Britain and France, the total value of the capital stockowned, as is almost always the case, largely by the 1 percent (whether aristocrats or members of the bourgeoisie, whether it’s France in 1780 or the United States in 2014)was about seven times national income from 1700 until around 1910. (National income, roughly speaking, is the sum of all forms of income in a given economywages, profits, interest, dividends, and so on.) With two world wars and a depression, the capital stock fell to about three times national income. (Curiously, Piketty notes that the monetary destruction of paying for war through taxes and inflation did more damage to the capital stock than the physical destruction of combat itself.) It began to recover around 1950, but was inhibited by extremely high tax rates in the first postwar decades. As of 2010, the capital stock had recovered to between five and six times national income in Britain and France. Data begins later for Germany, but the pattern isn’t dissimilar: a stock of capital about seven times national income in 1870, hammered down to just over two times in 1950, and a recovery to four times in 2010. The trajectory for the United States is much less dramatic: A capital stock of around three times national income in 1770 rose steadily to five times on the eve of the Great Depression, fell to about four times in 1940, but began recovering quickly, rising back steadily toward five times in 2010. The Second World War did little damage to the American rich, who largely inherited Britain’s empire with the coming of peace and the Yalta accords in 1945.


가장 부유한 나라들은 20세기 초에 소득세를 도입했는데, 그것은 소득의 양과 구조를 어느 정도 정확하고 상세하게 연구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총소득과 자본재 가치의 산정을 위해 과거로 더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실로 <21세기 자본론>의 상당 부분이 소득 대비 자본재 가치의 윤곽을 그리는데 할애되어 있다 - 자본의 상대적 비중의 추이를 분석하는 효과적인 방식.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 자본재의 총가치 - 자본재는, 거의 언제나 그렇듯이, 그 대부분을 1 퍼센트가 소유하고 있다. 소유자가 귀족이든 부르주아지이든, 1780년의 프랑스이든 2014년의 미국이든 그렇다 - 1700년에서 1910년경 까지 국민소득의 약 일곱 배였다. (국민소득은, 대략적으로 말하면, 한 주어져 있는 경제에서 소득의 모든 형태들 - 임금, 이윤, 이자, 배당금 등등 - 의 총계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들과 한 차례의 공황으로 인해, 자본재는 국민소득의 세 배로 떨어졌다. (기묘하게도, 피케티는 세금과 인플레이션을 통한 전비 충당으로 인한 화폐 소멸이 전쟁 그 자체로 인한 물리적 손실보다 자본재에 더 큰 손실을 입혔다고 쓰고 있다.) 그것은 1950년경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전후 첫 십년 동안의 극히 높은 세율에 의해 억제되었다. 2010년이 되자, 자본재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국민소득의 다섯 배에서 여섯 배 사이로 회복되었다. 독일에서는 조사가 늦게 시작되었지만 패턴은 다르지 않다: 1870년 자본재는 국민소득의 약 일곱 배였고 1950년에 두 배로 급락했으며 2010년에 네 배로 회복되었다. 미국의 궤적은 훨씬 덜 극적이다: 1770년 국민소득의 세 배 근처였던 자본재는 꾸준히 상승해 대공황 직전에는 다섯 배가 되었고 1940년에는 약 네 배로 하락했지만 재빨리 회복을 시작해 꾸준히 상승해 2010년에 다시 다섯 배가 되었다. 이차세계대전은 미국의 부자들에게 거의 손실을 입히지 못했으며 그들은 1945년 평화의 도래 및 얄타 협정과 더불어 대체로 대영제국을 물려받았다.


Many interesting details emerge in Piketty’s treatment of US economic history. Despite our distinction as the most unequal of the major economies today, America was a relatively egalitarian place (for white people) in the nineteenth and early twentieth centuries. But, speaking of white people, the liberation of the slaves after the Civil War was probably the greatest expropriation of capital in history. If one counts slaves as wealthwhich, grotesquely, was how American society defined them from the country’s founding through 1865their value was about 150 percent of national income throughout the slavery era. And practically overnight, with Lincoln’s 1863 Emancipation Proclamation, they were no longer someone’s property.


피케티가 미국 경제사를 다룬 부분은 많은 흥미로운 세부를 포함하고 있다. 오늘날 주요 경제들 중 가장 불평등한 경제라는 우리의 특징적 면모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19세기와 20세기 초에는 (백인들에게) 상대적으로 평등주의적인 나라였다. 하긴, 백인에 대해 말하자면, 내전 후의 노예 해방은 아마 역사상 가장 큰 자본 몰수였을 것이다. 노예들을 부로 셈한다면 - 이것은 기괴하게도 미국 사회가 건국 시기부터 1865년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정의했던 방식이다 - 그들의 가치는 노예제 시대 내내 국민소득의 약 150 퍼센트였다. 그리고 1863년 링컨의 노예해방령 포고로 사실상 하룻밤 사이에 그들은 더 이상 누구의 재산도 아니게 되었다.


After that, though, America largely lost its expropriating nerve. Not entirely so, however: Piketty reports that it was politically easier for America to institute the income tax in 1913 than it would be in European economies, given residual populist resentment of the rich. That, and endless waves of immigration, which continuously upset the economic hierarchy, kept the United States more egalitarian than Europe into the 1970s. From that point on, although the rich got richer nearly everywhere, the United States became the affluent world’s undisputed inequality champ. It’s also more unequal than lots of “emerging” countries, such as China and India.


그러나 그 후 미국은 대체로 몰수 신경을 상실했다. 그러나 전적으로 상실하지는 않았다: 피케티는 미국이 1913년 소득세를 도입한 것은 부자들에 대한 민중주의적 분개가 남아 있었기에 유럽 경제들이 소득세를 도입하는 것보다 정치적으로 더 쉬웠을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것, 그리고 계속해서 경제적 위계를 뒤흔든 끝없는 이민 행렬이 미국을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보다 더 평등주의적인 상태로 남아 있게 했다. 그러나 그 후부터는, 비록 거의 어디서나 부자들이 더 부자들이 되기는 했지만, 미국은 부유한 나라들 중에서 논란의 여지없이 가장 불평등한 나라가 되었다. 미국은 또한 중국과 인도 같은 많은 떠오르는나라들보다 더 불평등하기도 하다.


Remarkably, despite those broad gyrations over the last two centuries, many continuities stand out in Piketty’s historical narrative. One is the stability in the rate of return on capitalthe same 45 annual percentage, decade in and decade out. Another is the preponderance of that magic 1 percent figure, which seemed like a polemical simplification in the Occupy days, but clearly has an actual historical basis.


놀랍게도, 지난 이 백년에 걸친 그 전반적인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피케티의 역사적 내러티브에는 많은 연속성들이 돋보인다. 하나는 자본수익률의 안정성이다. 약간의 등락이 있는 가운데 4-5 퍼센트 사이로 꾸준히 유지되었다. 다른 하나는 그 마술 같은 1 퍼센트 수치의 부각이다. 그것은 점거시위 기간 동안에 행해진 논쟁적인 단순화처럼 보였지만 분명히 실제적인 역사적 토대를 갖고 있다.


But something has changed within that 1 percent: While it was once dominated by a population of rentiers, coupon clippers who barely worked if at all, it is now dominated, especially in the United States, by a group of star CEOs and financiers who flatter themselves that they’re being paid for their extraordinary talents.


그러나 그 1 퍼센트 내에서 무엇인가가 변했다: 그것이 한 때는 금리생활자들, 일을 하는 경우에도 아주 약간의 일만 했던 무기명채권 소유자들에 의해 지배되었다면, 그것은 이제, 미국에서는 특히나 더, 자신들의 비상한 재능이 거액의 연봉을 정당화한다고 우쭐대는 스타급 CEO들과 금융업자들에 의해 지배된다.


Economics as a discipline loves stories about equilibrium and convergence. Vast inequities should, in theory, be “competed away,” as neoclassical economics likes to say. But mostly they’re not. Globally, poorer countries should gain on richer ones as technology and education spread and mobile capital’s search for higher returns makes the poor less poor. That has happened to some degree, but rapidly developing economies such as India and many African nations remain much poorer than the United States or Western Europe. In the case of personal wealth, old fortunes should decline and be replaced by new ones, just as manual typewriters were replaced by electric ones, and electric typewriters were superseded by computers. But in fact old money is remarkably persistent. Yes, we’ve seen the creation of a large number of new fortunes over the last few decades, a change from wealth’s dark days of the mid-twentieth century. Bill Gates is the son of a well-off lawyer who was nowhere near a billionaire; Mark Zuckerberg sprang from the loins of a dentist and a psychiatrist. They are the very picture of modern new wealth. But despite those new fortunes, inheritance remains very important. David Rockefeller, worth $2.8 billion at the age of ninety-eight, is number 193 on the Forbes 400. Overall, Piketty concludes, it’s likely that half or more of the wealth of the upper orders originates in inheritance.


하나의 분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은 균형과 수렴에 관한 이야기들을 애호한다. 막대한 불평등은, 이론상, 신고전 경제학이 즐겨 말하는 대로, “경쟁을 통해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대체로 사라지지 않는다. 전지구적으로 보면, 더 가난한 나라들은 기술과 교육이 보급되고 가동 자본의 더 높은 수익률 추구가 가난한 이들을 덜 가난하게 만들기 때문에 더 부유한 나라들을 따라붙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만 그랬다. 인도 및 많은 아프리카 나라들 같은 급속한 개발 도상에 있는 경제들은 미국이나 서유럽보다 훨씬 가난한 채로 남아있다. 동산(動產)의 경우에는 수동 타자기가 전동 타자기에 의해 대체되고 전동 타자기가 컴퓨터에 의해 대체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낡은 재산들은 가치가 하락할 수밖에 없으며 새로운 재산들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상 낡은 돈은 확연하게 지속한다. 실로, 우리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수많은 새로운 재산가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았다. 빌 게이츠는 억만장자 근처에도 못 끼는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이다; 마크 주커버그는 치과의사와 정신과의사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들은 현대의 새로운 부의 초상이다. 그러나 그들 새로운 재산가들에도 불구하고, 상속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남아있다. 98세의 나이에 28억 달러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데이비드 록펠러는 포브스 400에서 193위이다. 피케티의 결론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볼 때, 상류층이 소유하고 있는 부의 절반 이상이 상속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And though Piketty doesn’t explore this, I’ve long suspected that a major force for the repeal of the estate tax in the United States has been that the billionaires of the neoliberal agethe tech and finance moguls, some famous, some barely knownhave been thinking about their legacy. The scions of the second Gilded Age want to see their grandchildren on the Forbes 400, just like David Rockefeller is a ghost of the first Gilded Age. I’m less sure whether they want to see their names on traditional foundationsmaybe more the entrepreneurial kind. But it’s clear that the political salience of the “death tax” is a reflection of a cadre of fortunes of a sort that was long out of fashion.


그리고 비록 피케티는 파헤치고 있지 않지만 나는 오래 전부터 미국에서 재산세 폐지론의 주요 동력들 중 하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억만장자들 - 일부는 잘 알려져 있고 일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기술 분야와 금융 분야의 거물들 - 이 자신들의 유산에 관해 해온 생각이 아닌가 의심해왔다. 두 번째 부호 시대의 자손들은, 데이비드 록펠러가 첫 번째 부호 시대의 유령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손자들이 포브스 400에 등재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이름이 전통적인 재단들 - 아마도 더 기업적인 성격을 갖는 것들 - 에 등재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지 여부에 대해서는 덜 확신한다. 그러나 사망세의 정치적 요점에 오랫동안 한물 가 있었던 종류의 재산가들 중 핵심인사들이 반영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Piketty’s book could have done with a pruning. It is original and very important, and deserves a wide audience. But even a connoisseur gets winded after four hundred pages, much less six hundred plus. It’s often wordy and repetitive. But it is not in any sense heavy going. The prose is clear, and there’s a minimum of mathPiketty, a professor at the Paris School of Economics, has little taste for conventional (meaning mostly American) economics. Early on, he is critical of his discipline’s “childish passion for mathematics” and its lack of interest in other social sciences or culture. He often refers to novels, particularly those by the likes of Austen and Balzac, that illuminate the world of wealthsomething you’d never find in the latest number of the American Economic Review. And he takes passing swipes at prestigious US academic economists, who generally find themselves near the top of the income distribution and who, not coincidentally, believe that that distribution of income is just and efficient.


피케티의 책은 가지치기를 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독창적이고 매우 중요하며 광범위한 독자층을 끌만한 책이다. 그러나 사백 쪽 후부터는 전문가조차도 헐떡이게 되는 마당에 육백 쪽이 넘는다. 그것은 종종 장황하며 반복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읽어내기 어렵지 않다. 산문은 명료하며 최소한의 수학만이 들어 있다 - 파리 경제학 학교의 교수인 피케티는 관습적인 (대체로 미국적인을 의미) 경제학을 거의 애호하지 않는다. 초기부터, 그는 경제학의 어린 아이처럼 수학에 열중하기와 다른 사회과학들이나 문화에 대한 그것의 관심 결여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종종 소설들을, 특히 부의 세계를 조명하는 오스틴과 발작 같은 이들의 소설들을 참조한다. 이것은 미국 경제학 리뷰의 최근호들에서는 당신이 결코 발견하지 못할 어떤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일반적으로 소득 분배의 꼭대기 가까이에 있으며 우연치 않게도 소득 분배가 공정하고 효율적이라고 믿는 명망 있는 미국의 강단 경제학자들을 대략적이면서도 신랄하게 비판한다.


But the major frustration of the book is political. Piketty clearly shows that short of depression and war, the only possible way to tame the beast of endless concentration is concerted political action. The high upper-bracket tax rates of the immediate postwar decades couldn’t have happened without serious fears among elitesfresh memories of the Depression, threats from strong domestic unions, competition on a global scale with the USSR, which, for all its problems, was living proof that an alternative economic system was possible. As those things waned, upper-bracket taxes were lowered, wages and benefits were cut, and capital’s increased mobility led to increased competition among jurisdictions to offer a “favorable investment climate”meaning weak regulations, low wages, and minimal taxes. All these trends have contributed to the concentration of capital over the last thirty years, as wealth and power have shifted upward on an enormous scale. None of these features will be reversed spontaneously. Nor will they be altered through “democratic deliberation”several times Piketty notes the hefty political power of the owning classor improved educational access, as Piketty actually urges at one unfortunate point. Brushing up the working class’s skill set is no match for the power of r > g.


그러나 그 책의 주요한 좌절감은 정치적 성격을 갖는다. 피케티는 공황과 전쟁을 제외하면, 끝없는 집중이라는 야수를 길들일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방도가 일치된 정치적 행동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종전 직후 십년의 상위계층 고세율은 대공황에 대한 엘리트층의 생생한 기억, 강력한 국내 노조들의 위협, 그것의 모든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대안적인 경제체제가 가능하다는 살아있는 증거였던 소련과의 전지구적인 규모의 경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것들이 사라지자 상위계층 세율은 하락했고 임금과 복지급부금은 삭감되었으며 증가된 자본 이동성은 각 나라들 사이에 규제 완화, 저임금, 그리고 최소 세금을 의미하는 유리한 투자 환경을 제공하려는 경쟁을 부추겼다. 이 모든 추세들은 막대한 규모로의 부와 권력의 상향 이동을 야기하면서 지난 삼십년에 걸친 자본의 집중에 기여했다. 이 면모들 중 어느 것도 자발적으로 역전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것들은 민주주의적 심의를 통해서나 - 피케티는 몇 번이나 소유계급의 건실한 정치권력을 언급한다 - 피케티가 실제로 한 유감스럽게 하는 지점에서 촉구하는 교육 기회의 개선을 통해서도 변경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숙련도를 높이는 것은 r > g 의 힘을 상쇄시킬 수 없다.


Starting with the title, the eternally recurrent specter of Marx hangs over this book. Early into the first page of the introduction, Piketty asks, “Do the dynamics of private capital accumulation inevitably lead to the concentration of wealth in ever fewer hands, as Karl Marx believed in the nineteenth century?” Phrasing the question as something grounded in the past is a nice distancing technique, as the psychoanalysts say, but the answer is clearly yes. Several times, Piketty disavows Marxjust a few lines later he credits “economic growth and the diffusion of knowledge” for allowing us to avoid “the Marxist apocalypse”but he also concedes that those prophylactics have not changed capitalism’s deep structures and the tendency for wealth to concentrate. It seems, in other words, that Piketty’s own research shows that the old nineteenth-century gloomster had a point.


제목부터 시작해서, 끊임없이 다시 나타나는 마르크스의 유령이 이 책을 떠돈다. 서론의 첫 쪽에서 이미 피케티는 사유자본 축적의 동학은 불가피하게, 칼 마르크스가 십구 세기에 믿었던 대로, 점점 더 소수의 수중으로의 부의 집중을 야기할까?”라고 질문한다. 그 질문을 과거 속에 정초되어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정신분석가들이 말하곤 하는 대로 교묘한 거리두기 테크닉이지만 답은 분명히 예스이다. 피케티는 몇 차례나 마르크스를 거부한다 - 몇 줄 안지나 그는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적 묵시록을 회피하는 것을 허용해줄 것이라며 경제성장과 지식의 보급에 신뢰를 보낸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 예방약들이 자본주의의 심층구조와 부의 집중경향을 변화시키지 못했음을 시인한다. 달리 말해, 피케티 자신의 연구는 그 낡은 십구세기 비관론자의 예측이 일리 있었음을 보여준다.


Unlike most modern economists, Piketty at least credits Marx’s ambition and profundity. But for Piketty, the main problem with Marx is his unequivocal call for political confrontation. Having described a process of inexorable material polarizationand with it, increasing plutocratic power over the statePiketty remains distressingly moderate as he sounds out some of the political implications of his analysis. A major reason for his posture of socialist skepticism, he declares, is that he came of age as Soviet-style Communism was falling apart, which left him “vaccinated for life against the conventional but lazy rhetoric of anticapitalism.”


대다수의 현대 경제학자들과 달리 피케티는 적어도 마르크스의 야심과 심원성은 인정한다. 그러나 피케티에게 마르크스의 주요 문제는 그의 노골적인 정치적 대결 요청이다. 불가피한 물질적 양극화 과정을 - 그리고 그것과 함께 부호들의 정치권력 증대를 - 기술했음에도 불구하고 피케티는 그의 분석의 정치적 함축들 일부를 드러낼 때 곤혹스러울 정도로 온건한 태도를 취한다. 그는 분명하게 말하는데,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회의주의적 태도의 주요 이유는 그가 소련 스타일의 공산주의가 붕괴했을 때 성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붕괴는 그가 관습적이지만 게으른 반자본주의 수사학에 감염되지 않을 수 있게 해주었던 백신이었다.”


Anticapitalist rhetoric need not be lazyand for all the empirical sophistication of Piketty’s work, his political thinking is hardly a model of complexity or effort. He mostly aspires to contribute to rational democratic deliberation about “the best way to organize society.”


반자본주의 수사학은 게으를 필요가 없다 - 그리고 피케티의 저작의 모든 경험적 정밀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치적 사유는 그다지 복잡성이나 노력의 모범이 아니다. 그는 사회를 조직하는 최상의 방도에 관한 합리적인 민주주의적 심의에 기여하고 싶어한다.


Still, while such deliberation is clearly necessary, political action cannot be factored out of that process just because we happen to have lived through the Cold War’s unmourned collapse. It’s energizing to see that a younger generation of political intellectuals, who were in grade school when the Berlin Wall came down, missed the anticapitalist vaccination. They might be able to take Piketty’s data and cause some genuine trouble with it. Because serious troubledemonstrations, strikes, insurgent political movementsis what it will take to derail capitalism’s inevitable tendency toward concentration. Short of that, it looks like we’ll be continuing our journey along the road to a new serfdom.


하지만 비록 그러한 심의가 분명 필요하기는 해도 우리가 냉전의 애도될만하지 않은 붕괴를 겪었다고 해서 그 심의 과정으로부터 정치적 행동을 배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했을 때 고교생이었지만 반자본주의 백신을 맞지는 않았던 젊은 식자층이 있다면 좋겠다. 그들은 피케티의 데이터를 집어 들어 그것으로 어떤 진짜 분쟁을 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심각한 분쟁 - 시위, 파업, 반정부적인 정치운동 - 이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부 집중 경향을 틀어지게 하는데 요구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 없이는, 우리는 새로운 농노제에 이르는 길을 계속 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