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민폐를 예언이라도 한 듯이 강준만 교수가 일주일전쯤 이런 칼럼을 썼네요. 요약겸해서 강조를 넣었습니다.

링크 들어가면 새정치에 대한 글도 읽을 만하네요.

http://www.inmul.co.kr/xroz/sub_read.html?uid=2401&section=section1

도덕 이론

“혹시 우리가 민주화에 대한 헌신과 진보적 가치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선을 그어 편을 가르거나 우월감을 갖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른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것이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입니다.”1

2012년 대선에서 패배한 민주당 후보였던 문재인의 대선 회고록 『1219 끝이 시작이다』에 나오는 말이다. 문재인이 민주당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잘 짚었지만,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표현은 문제의 심각성을 담기엔 모자라다. ‘도덕’이라고 보는 게 옳다. 즉, ‘도덕의 부재’ 또는 ‘도덕의 왜곡’이 오늘날 민주당의 위기를 불러온 주범일 수 있다. 우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좁은 의미의 ‘도덕’은 잊고 넓은 의미의 ‘도덕’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 사람 도덕적이야.” 이건 좋은 의미다. “그 사람 도덕주의적이야.” 이건 별로 안 좋은 의미다. 누군가를 ‘도덕적’이라 했을 땐 그 사람 개인의 행실에 국한시켜 하는 말이지만, ‘도덕주의적’이라 했을 땐 그 사람이 세상을 도덕의 잣대로만 본다는 의미다.

‘도덕주의’의 부정적 의미는 크게 보아 세 가지다. 첫째, 사고가 편협하고 경직되어 있다는 의미다. 둘째, 복잡한 세상 이해를 종합적으로 하지 않고 도덕이라는 일면만 보는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는 의미다. 셋째, 그 어느 쪽이든 이념 공동체 내에서 이념적 대의의 실천에 충실하지 않다는 비판의 의미다.

가급적 도덕주의는 피하되 도덕은 갖는 게 좋다. 그런데 어찌된 게 우리 사회에선 도덕은 박약하고 폄하되는 반면 도덕주의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도덕은 자신을 향하지만 도덕주의는 남을 향하기 때문이다. 남을 단죄할 땐 도덕주의의 칼을 쓰고, 자신의 처신은 도덕을 초월하는 풍토가 만연되어 있다.

도덕을 초월하다 못해 유린하면서 쓰는 말이 “대의(大義)에 충실하자”거나 “대국적으로 보자”는 말이다. ‘시대정신’이라는 말도 쓰인다. 도덕은 개인 수준의 사소한 것인 반면 ‘대의’와 ‘시대정신’은 세상을 바꾸는 거창한 일이라는 자기암시가 내포되어 있는 용법이다. 도덕을 초월하는 사람들이 도덕적 우월감을 갖는 진기한 현상도 목격된다. 아니 따지고 보면 진기할 것도 없다. 이 경우의 도덕적 우월감은 ‘대의’와 ‘시대정신’과 관련된 것으로 개인의 행실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도덕은 사소한 것인가? 영국 정치학자로 현재 미국 뉴욕대학 정치학 교수로 있는 스티븐 룩스(Steven Lukes, 1941~)는 『마르크스주의와 도덕(Marxism and Morality)』(1985)이라는 책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망친 건 ‘도덕’ 개념의 부재라고 했다. 물론 그가 ‘망쳤다’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방향이 그쪽이란 건 분명하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도덕은 변화하는 물질적 환경에 의존하며, 상대적일 뿐 아니라 폭로되어야 할 환상이고, 그 뒤에 계급적인 이해관계를 감추고 있는 편견의 다발일 뿐이다. 예컨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반(反)듀링론(Anti-Duhring)』(187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도덕이 국가들 사이의 차이와 역사를 넘어선 영원한 원리를 가진다는 것을 구실로 하여 그 어떤 도덕적인 도그마를 영원하고 궁극적이며 불변의 윤리적인 법칙으로서 우리에게 부과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반대로 우리는 모든 도덕 이론은 궁극적으로 분석해보면 그 시대에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 조건의 산물이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회는 이제까지 계급 갈등 속에서 움직여왔으므로, 도덕은 항상 계급의 도덕이었다.”2

룩스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런 도덕관은 ‘결과주의(consequentialism)’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결과주의는 영국의 분석철학자 엘리자베스 앤스콤(Elizabeth Anscombe, 1919∼2001)이 1958년에 쓴 「현대의 도덕 철학(Modern Moral Philosophy)」이란 논문에서 만든 말로, 단순하게 말하자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the ends justify the means)”는 이론이다.3 룩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과주의는 결과에 의해서만 행위들을 판단하며 행위 주체들에게 모든 것을 고려할 때 가능한 한 최선의 결과를 산출하도록 요구하는 이론을 의미한다. 결과주의는 행위 주체가 전체적으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도록 행동한다면 항상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옳음과 좋음을 연결 짓는다.”4

흔히 결과주의의 반대로 명분주의 또는 명분론이 거론되지만, 둘 사이의 경계가 명확한 건 아니다. 명분을 앞세운 결과주의도 있기 때문이다. 명분을 앞세운 결과주의는 자신들의 목적이 더 선하고 정의롭다고 믿는 도덕적 우월감을 가진 세력에게 많이 나타난다. 마르크스주의가 꿈꾸는 인간 해방의 과정이 짧다면 결과주의의 강점이 두드러지겠지만, 과정이 길어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인간 해방은 멀고 인간 행태는 가깝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이는 인간 행태에 대한 대중의 혐오와 공포가 인간 해방이라는 가치를 압도할 수밖에 없다.

사회학자 김동춘은 『근대의 그늘』(2000)에서 이 원리를 한국의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평가에 적용시킨다. 그는 한국 좌익의 몰락은 반드시 일방적인 정치적 탄압에만 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탁통치 반대 운동 당시 좌익의 급작스러운 정치노선상의 변화는 좌익의 도덕성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으며, 한국전쟁 기간의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이들이 펼친 부정적 정책들은 사회주의 일반이 지닌 호소력을 급격히 떨어뜨리는 데 기여했다.……여기서 필자는 한국 사회주의자들이 ‘도덕성(morality)’의 문제를 등한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고 말하고 싶다.……전통적으로 유교적 도덕률이 사회적 힘을 갖는 한국에서처럼 이것이 잘 적용된 예도 드물 것이다. 민중은 원래 그러하지만, 특히 한국 민중이 지도자나 정치가를 평가하는 기본 잣대는 도덕성이다.”5

1990년대의 학생운동권, 특히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과 오늘날의 일부 진보 정당도 마찬가지다. 김형민은 1997년 6월 벌어진 두 차례의 ‘프락치’ 혐의자에 대한 타살 과정은 ‘괴물의 탄생’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는 “탄압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비판을 외면하고, 옳다고 믿는 ‘시대적 정의’를 위해 현실 감각을 포기하고, ‘자심한 프락치 공작’을 이유로 또래 젊은이들을 물 적신 담요에 말아 두들기고 ‘맞고 불래? 불고 맞을래?’를 뇌까리며 녹음기를 들이미는 괴물이 되었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최근 수삼년 동안, 나는 한총련 몰락의 데자뷔를 어느 진보정당의 노정에서 발견하고 있다. 자신들이 옳다는 가치를 근거로 당 대회장을 점거하고 거침없이 폭력을 휘두르고, 밖으로는 전파되기 어려운 자신들만의 신념 체계 속에 갇힌 채 정권의 탄압을 자신들의 정당성의 도구로 삼으며 현실 세계와는 점차 멀어지고 있는 이들의 행보는 한총련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6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George P. Lakoff, 1941∼)는 『도덕의 정치(Moral Politics)』(2002)에서 미국의 민주당 공화당 대결 구도를 도덕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열렬한 민주당 지지자인 그는 보수주의자가 승리를 거둔 1994년 중간선거 기간 동안 “내 눈에 보수주의자(공화당)와 진보주의자(민주당)가 서로 판이한 도덕 시스템을 가졌고, 양 진영의 정치적 담론은 상당 부분 그들의 도덕 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이 뚜렷하게 보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많은 진보주의자들처럼 나도 한때는 보수주의자들을 천박하고, 감정이 메마르거나 이기적이며, 부유한 사람들의 도구이거나, 혹은 철저한 파시스트들일 뿐이라고 얕잡아 생각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을 고도의 도덕적 이상주의자로 간주하며, 그들이 깊이 믿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보통 사람들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보수주의에 왜 그토록 열렬하게 헌신적인 사람들이 많은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보수주의를 잘 이해하게 된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보수주의를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7

레이코프는 그런 성찰 끝에 자신이 지지하는 민주당 진영에 이런 고언을 내놓는다. “진보주의자들이 정치에서 도덕과 신화와 감정적인 측면을 무시하는 한, 정책과 관심을 가진 그룹과 사안별 논쟁에만 집착하는 한, 그들이 이 나라를 뒤덮은 정치적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게 될 희망은 전무하다.”8

같은 맥락에서 뉴욕대학 심리학자 조너선 헤이트(Jonathan Haidt, 1963∼)는 도덕성은 이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며 이렇게 말한다. “도덕적 판단은 미학적 판단과 비슷하다. 우리는 그림을 보는 순간 그 그림이 우리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안다. 누군가가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이런저런 의견을 제시할 것이다. 도덕적 논쟁도 이와 매우 흡사하다. 두 사람이 어떤 문제를 놓고 강력한 감정을 표출한다. 감정이 먼저이고, 이유는 서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도중에 만들어진다.”9

잘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이념에 분노하지 않는다. 도덕에 분노한다. 거대한 것에 분노하지 않는다. 사소한 것에 분노한다. 자신을 중심으로 자신과 비교해서 분노한다. 이념이나 정책은 피부에 와 닿지 않기 때문에 분노의 소재로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한국의 현 여야 관계도 도덕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류학자 리처드 슈베더는 전 세계의 도덕 체계를 두루 살핀 끝에 도덕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중시하는 차원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통합과 질서를 중시하는 차원, 그리고 영혼의 깨끗함과 신성을 중시하는 차원 등 세 가지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 연구에선 개인·공동체·신성이라는 도덕의 세 차원 가운데 진보적인 사람들은 개인을 특히 더 중시하는 반면에 보수적인 사람들은 셋 다 비슷하게 중시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진화심리학자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전중환은 「보수와 진보의 도덕」이라는 제목의 『한겨레』(2013년 10월 29일) 칼럼에서 위와 같은 연구 결과를 소개한 뒤 “유권자들은 경제적 이득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에 따라 투표한다는 것, 그리고 여기서 보수와 진보가 이해하는 도덕은 사뭇 다르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유용한 시사점을 준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를 들어, 지난 대선에서 저소득층이 새누리당을 훨씬 더 지지한 이유는 교육 수준이 낮아서 사탕발림에 쉽게 넘어갔기 때문이며, 그러니 진보 세력이 그들의 삶을 향상할 유일한 대안임을 확실히 인식시키기만 하면 문제가 저절로 다 해결되리라는 분석은 이런 점에서 한계가 있다. 진보 세력은 보수적인 국민들이 그들에게 품는 생래적인 거부감, 곧 국가안보와 사회질서를 흔드는 ‘비도덕적인’ 정당이라는 시선을 어떻게 바꿀지 궁리할 필요가 있다.”10

탁월한 분석이다. 전중환은 말을 조심스럽게 했지만, 요즘 유행하는 말로 ‘돌직구’를 날리자면 민주당(이젠 ‘새정치민주연합’이 되었지만, 논점을 살리기 위해 ‘민주당’으로 부르겠다)은 우선적으로 도덕에서 새누리당에 패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민주당 지지자들은 당장 “어떻게 새누리당의 도덕이 더 낫단 말이냐?”고 펄쩍 뛰겠지만, 보수와 진보가 이해하는 도덕은 사뭇 다르다는 점을 상기하는 게 좋겠다. 물론 진보가 억울하게 생각하는 건 당연하지만, 보수와 진보에 대한 유권자들의 판단 준거점이 다르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즉, 똑같이 과오를 저질러도 진보가 더 욕먹게 되어 있다. 세상 민심이 그런 걸 어이하랴.

그럼에도 도덕을 강조하는 건 ‘진보 죽이기’의 음모라거나 진보가 그런 음모에 휘말려들면 안 된다는 주장을 공공연하게 펼치는 진보 논객들도 적지 않다. 진보 진영의 내부 비판에 대해서도 그럴 시간과 힘이 있으면 보수 진영을 비판하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런 주장에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진보 진영은 사실상 그간 그런 식의 대응을 해온 셈인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이젠 한번쯤 뒤돌아볼 때도 되지 않았을까? 무력혁명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면서, 즉 선거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면서 일반 유권자들의 정서를 무시해서 어쩌자는 건가.

민주당에 가장 필요한 건 레이코프가 했던 종류의 자기성찰이다. 즉, 보수주의자들을 경멸하고 혐오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존중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민주당이 수십 년째 신봉해오고 있는 ‘민주 대 반민주’라는 신념이자 구호는 민주당에 ‘독약’이 되고 있다. 설사 이런 이분법 구도에서 민주 쪽에 속한 사람일지라도, 민주당을 지지하면 ‘민주’요 반대편을 지지하면 ‘반민주’라는 도식은 시대착오적인 정도를 넘어 속된 말로 ‘찌질’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 정치는 기본적으로 ‘반감의 정치’이므로 예전에도 그랬듯이,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이 스스로 무너짐으로써 민주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질 수는 있다. 또 막상 선거 때가 되면 평소 지지율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도 한국 정치의 익숙한 풍경이다. 민주당도 그런 생각으로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 공격에 심혈을 기울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정당을 지지하든 우리가 그런 식의 정권교체나 선거 승리를 기대한다는 건 국가적·국민적 차원에서 볼 때에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이 점에서 보자면, 최근 민주당 의원 최민희가 “박근혜 정부가 성공해야 진보 집권 기회가 온다”며 “진보와 정의를 외치는 사람은 절제의 미덕을 가져야 한다. 예의를 지키는 게 진보의 미덕이다”고 말한 건 매우 고무적이다.11

노골적인 친(親)공화당 노선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미국 폭스뉴스 사장 로저 에일리스(Roger Ailes, 1940∼)는 “저기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푸른 주(민주당이 승리한 주)’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깊은 반감을 품고 있다”고 했다.12 폭스뉴스는 그런 ‘반감’을 밑천으로 성공적인 장사를 한 셈이지만, 그걸 뒤집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새누리당과 그 지지자들을 어리석고, 탐욕스럽고, 더 나아가 사악하다고까지 생각하는 한 민주당은 필패(必敗)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흥미롭고도 놀라운 사실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논객들과 언론인들의 대부분이 그런 시각으로 새누리당과 그 지지자들을 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가 분노하게끔 조롱하면서도 그걸 풍자나 정당한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게 바로 싸가지의 문제요 도덕의 문제라는 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자들도 도덕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노선과 정책과 법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물론이다. 그러나 그 중요한 걸 해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정치인과 정치집단이 도덕적 신망을 잃어 ‘식물화’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그 목적이 아무리 숭고해도 도덕이 파탄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이게 바로 결과주의의 한계다. 도덕주의는 내쫓고 도덕을 불러들여야 한다. ‘싸가지 없는 진보’는 진보에 해가 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 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 1905∼1997)의 말을 빌리자면,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13 우리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상황을 견뎌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황을 바꾸는 긍정적인 변화의 바람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왜’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좋지 않을까? 좌우(左右), 여야(與野), 지역, 계층, 세대 등의 분열과 갈등 구도, 그리고 프랙털 원리에 의해 그 구도 안에 자리 잡은 또 다른 분열과 갈등 구도를 넘어서 우리 모두 화합과 평등을 지향하는 한 단계 발전한 세상의 실현을 위해서 말이다.
 
1) 문재인, 『1219 끝이 시작이다』(바다출판사, 2013), 310쪽.
2) 스티븐 룩스(Steven Lukes), 황경식·강대진 옮김, 『마르크스주의와 도덕』(서광사, 1985/1994), 27쪽·36쪽.
3) 「Consequentialism」, 『Wikipedia』.
4) 스티븐 룩스(Steven Lukes), 앞의 책, 211쪽.
5) 김동춘, 『근대의 그늘: 한국의 근대성과 민족주의』(당대, 2000), 265∼266쪽.
6) 김형민, 「의장님만 믿고 또래 젊은이를 고문했는가」, 『한겨레』, 2014년 3월 8일.
7)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 손대오 옮김, 『도덕의 정치』(생각하는백성, 2002/2004), 33쪽·402쪽.
8)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 앞의 책, 41쪽.
9) 조나 레러(Jonah Lehrer), 강미경 옮김, 『탁월한 결정의 비밀: 뇌신경과학의 최전방에서 밝혀낸 결정의 메커니즘』(위즈덤하우스, 2009), 274쪽.
10) 전중환, 「보수와 진보의 도덕」, 『한겨레』, 2013년 10월 29일. 전중환은 “도덕은 본능이다. 곧 도덕성은 우리의 조상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여러 적응적 문제들을 풀고자 선택된 보편적인 심리기제의 산물이다”고 말한다. 전중환, 『오래된 연장통: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사이언스북스, 2010), 192쪽.
11) 박성우·강태화, 「친노 최민희 “박근혜 정부 성공해야 진보 집권 기회”」, 『중앙일보』, 2014년 2월 14일.
12) 마이클 르고(Michael LeGault), 임옥희 옮김, 『싱크! 위대한 결단으로 이끄는 힘』(리더스북, 2006), 99∼100쪽.
13) 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 이시형 옮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청아출판사, 1984/2005), 137쪽; 톰 버틀러 보던(Tom Butler-Bowdon), 이정은 옮김, 『내 인생의 탐나는 자기계발 50』(흐름출판, 2003/2009), 2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