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지방선거 광주시장 후보 탐구]윤장현_살아온 길

강경남 kkn@gjdream.com | 2014-05-1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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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인권위 이사…한국에서 유일
“광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축복”


 새정치민주연합의 윤장현 광주시장 예비후보는 지금껏 단 한 순간도 ‘광주’를 놓아본 적이 없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전략공천을 통해 광주시장 후보로 내놓은 그는 “광주에서 나고 자란 것이 축복”이라고 했다. 시민운동계의 ‘대부’로, 한국에서 유일한 아시아인권위원회 이사가 될 수 있었던 것 모두 “광주때문에 가능했다”고 그는 강조했다.

 윤 후보는 1949년 광주 구동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님, 조부모님 3대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몰락한 선비 가문의 쉰둥이로 태어나 독학으로 글을 배워 교사로 부임해 공직 생활을 이어간다. 

 “아버지가 항상 큰 애, 장남이라고 하지 않고 ‘큰 사람아’라고 불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대학 다닐 때는 제 지갑을 검사하셨는데, 돈이 들어있지 않으면 꾸중들었던 생각이 나요. 좋은 생각·의지가 있어도 선배라는 사람이 호주머니가 비면 당당해질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셨던 것 같습니다.”

 ‘고운 아이’로 컸던 그는 광주 서중 시절 친구들과 독서클럽을 만들었다. “광주 서중이 일제시대 학생독립운동의 본산이죠. 그래서 ‘우리도 독서클럽해서 공부 좀 해보자’ 이런 생각을 했어요.” 독서클럽의 이름은 ‘피닉스(불사조)’, 모임 장소는 그의 집이었다. 



▶환경운동·5·18 등 광주 시민운동 대부

 대학에 들어갈 나이가 됐는데 “공부는 안 하고 어만 짓하다가” 낙방했다. 피끓는 젊은이들이 학생운동에 물 불 안가리고 몸바치는 시절이었다. 재수를 하는데, 공무원인 아버지는 “저 사람 저렇게 나둬서는 자기 앞가림보단 다른 쪽으로 가겠다” 싶어 그에게 의대를 권유했다. 닥터 노만, 체 게바라 등 의사 출신의 혁명가들에 대한 책을 읽었던 그는 “의사 출신이면서도 사회적 변화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라는 생각에 조선대 의대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후 군의관 시절, 그는 “분단의 현장에서 근무해야 한다”고 고집해 강원도 화천에서 근무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철책, 초소를 돌았어요. 산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늘 병사들 가까운 곳에 있었죠. 군에 있을 때 아버님이 광주 부시장이었는데, 제 바로 밑 여동생이 결혼할 때도 가지 않았어요. 작전 있을 땐 병사들과 있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국군통합병원으로 근무지를 옮긴 후에도 윤 후보는 중환자실에다 침상을 놓고 잠을 잤다. “그러다 무슨 일이 있었냐면 전북 이리역(현 익산역)에 폭발사고(1977년 11월)가 났다는 뉴스가 뜬 거에요. ‘어! 저거 우리 섹턴데’라는 생각에 의정장교에게 (현장으로 가야한다고)이야기했더니 ‘저기는 전주 35사단에서 카바하면 됩니다’라고 놔두라고 했죠. 그런데 저는 아닌 거 같아서 근무 없는 위생병·간호사 몇 명이랑 앰뷸런스 2대 끌고 현장으로 갔어요. 위병소에선 난리가 났죠. 그래도 저는 ‘영창 가야 되면 내가 갈게’하고 갔는데, 밤새 얼마나 아비규환이었던지. 아침에 병원장이 와서 엄청 혼이 났죠. 좀 있으니까 1군 사령관·참모총장이 왔는데 어깨를 두들겨주더라구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고?”

 제대 후 조선대병원 안과 주치의로 근무하던 중 80년 5월을 맞이한다. 병원을 떠날 수 없는 주치의였고, 조선대엔 계엄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 시절 도청에 들어가지 못한 아픔이 있었어요. 시민군 환자들을 보면서 ‘이 상황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죠. 이게 후일 제가 활동하는 모멘텀이 됐습니다.”

 1983년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는 1985년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으면서 본격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이 때 ‘영광핵발전소 무뇌아 사건’을 겪으면서 환경공해연구회, 환경운동연합(1992년)을 창립했다.

 5·18민중항쟁을 미래로 끌고 가기 위한 활동은 1993년 광주시민연대를 통해 시작했다. “광주의 오월을 한국의 특별한 상황으로 간주할 것이 아니었죠. 세계사적으로 보면 광주는 인류에 중요한 지역이 됐고, 이 가치를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아시아 지역에 희망을 주고, 연대하는 일을 통해 구현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5·18기념재단의 창립이사(1994년)로 참여했고, 1998년에는 광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으면서 광주 시민사회운동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2001년에는 한국에선 유일하게 아시아 인권위원회 이사가 됐다. “가장 상징적인 부분이에요. 제가 유명한 변호사·학자도 아닌데 한국에서 유일하게 이사로 참여한 것은 온전히 광주의 몫이죠.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광주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본적 옮겨야 하는 것 아니냐?” 사태에 정치 입문

 이후로도 그는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경영자문위원, 광주·전남 6·15공동준비위원회 상임대표, 한국 YMCA 전국연맹 이사장 등을 맡으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 2006년에는 아름다운 가게를 시작하며 ‘나눔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시민운동의 다양한 길을 연 그에겐 ‘시민운동의 대부’라는 별칭이 붙었다.

 “시민운동의 대부라는 단어에 대해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정확히 따지면 저는 전업 시민운동가는 아니에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진료를 보고, 의사로서 누릴 거 누리면서 남은 시간에 여러 일을 해온 겁니다. 누구 눈에는 프로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게 아니거든요. 100만 원도 못 받고 일하는 운동가들 보면 늘 아프고 힘들었죠.”

 많은 단체를 탄생시켰지만, 그의 ‘것’은 없다. “내 것으로 소유하는 순간 운동성을 잃거든요.”

 그랬던 그는 지난해 말 무소속 안철수 의원과 함께 새정치연합 창당 과정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고, 광주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작년 6~7월부터 후배들로부터 압박이 있었어요. 그때 저는 ‘다른 사람 찾아보자’고 했는데 잘 안 됐죠. 그러다 어느 날 지인들과 아프리카 진료 다녀온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아이들 미래를 위해서 본적을 옮겨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러다간 진짜 지역(광주)이 무너져 내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곤 남주 친구(김남주 시인) 묘에 가서 3시간 앉아 있다가 (광주시장 출마를)결심했죠.”

 

▶아버님·장모님 함께 모시고 사는 효자 

 이야기 끝 부분, 정치에 뛰어든 이후 마음 아팠던 경험을 털어놨다. “지금 저희 집이 91세 된 아버님과 93세 되신 장모님을 함께 모시는데, 이 일(정치)에 나와 제일 힘들고 안타까운 게 그거에요. 며칠 전에 늦게 들어갔는데, 씻고 나오니까 장모님이 방에서 ‘아구 죽겄네. 아 아파’ 신음소리가 나요. 가서 보니까 얼굴이 이렇게 부어있었어요. 진통제 드시게하고, 새벽에 얼음물 해서 찜질을 해주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나중에 치과를 가니까 얼굴이 그렇게 부었는데 보름을 참으셨더라구요. 이 노인이 얼마나 힘드셨을 텐데 하나도 못 봐드리고…. ”

 이 일을 떠올리면서 그는 말했다. “그게 나는 ‘살림(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관심을 놓치면 죽임이에요. 사회적 약자도 마찬가지고, 집 안에서도 그래요. 세상에 비전을 만들고 꿈을 만드는 것은 호기심이지만, 사람 살려내는 일은 관심 없이는 안 됩니다. 제가 광주에서 한 번도 관심을 끄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에요.”



 ▶윤장현은

 1949년 광주 남구 구동 출생

 살레시오고등학교 졸업

 조선대 의과대학

 중앙안과(현 아이안과) 원장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재)5·18기념재단 창립이사

 광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

 광주국제교류센터 이사장

 아시아인권위원회 이사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경영자문위원

 아름다운가게 전국대표

 한국YMCA 전국연맹 이사장

강경남 기자 kkn@gjdream.com

사진=함인호 ha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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