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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지식인들의 반응 

먼저, "장면 정권을 수호하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거의 유일한 예외가 바로 개신교인 논객이자 사상가였던 함석헌으로, 그는 딱 잘라서 "혁명은 민중이 하는 거지, 군인은 혁명 못 한다." 며 대놓고 깠다.[14](…) 그 외에 다른 예로는 그나마 경향신문 사장 한창우 등이랄까. 다만 한창우의 경우 금세 군사정권의 응징을 받았다.

보다 일반적으로는, 쿠데타를 바라보는 지식인들의 시선은 적잖이 복잡했다. 어떤 이들은 드디어 기득권이 청산된다며 기대감을 보였고, 반면 어떤 이들은 반공 친미 노선에 상당히 안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쿠데타를 평가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5.3 일반 국민 및 대학생들의 반응 

쿠데타 직후 미국 24군단 소속 첩보부대(Counter Intelligence Corps; CIC)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 10명 중 4명은 우호적, 2명은 다소 우호적이나 시기상조, 4명은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1961년 5월 31일 주한 미국대사관은 미 국무부에 "서울대생들이 쿠데타에 대해 찬성 50, 반대 50의 지지를 보이고 있다." 고 보고했다.

대학생들의 경우,[18] 쿠데타 당일에는 모든 수업이 취소되었으나, 다음날부터 곧바로 정상적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때 학생들은 대체로 관망적 자세를 취했는데, 장면 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가 하나의 이유였다. 게다가 그들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 내 세력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고, 따라서 그들의 진의가 무엇인지 일단 알아야 했기에 당분간은 차분히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그들에게 쿠데타라는 "뜻밖의 군의 움직임" 은 상당히 막연한 상황이었던 것도 있다.

이하의 두 인용은 쿠데타 익일의 서울대 및 고려대 학보 1면 헤드라인이다.

쿠데타 성공, 학원은 평온, 당연감(當然感) 속에 사태 주시

군사혁명에 학생들은 침묵, 무표정. 사태 진전을 주시

이후 군사정권이 3.15 부정선거의 잔재를 청산하고 사회악을 뿌리뽑기 위한 뭔가를 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먼저 서울대 학생회가 5월 23일 쿠데타를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 6월경, 서울대 학보의 「학생대담」에서는 군사정권에 대해서 크게 다음의 3가지를 요구했다.

  • 반공 및 (4.19) 혁명의 완수
  • 경제 및 민족정신 확립 이후 정권의 민정이양
  • 기본적인 자유의 보장
그 외에 "부정부패를 과감히 척결할 것" 이나 "선의의 독재는 필요하다" 는 등의 주장도 있었다.

쿠데타 직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다른 여론조사에서는 무려 83%에 달하는 학생들이 "우리나라 실정에 비추어볼 때, 서구식 민주주의는 부적합하다." 고 응답했다. 이것은 그들이 4.19혁명을 이루어냈음에도, 혁명 이후 장면 정부의 무능력함에 일종의 회의를 느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위키러 여러분들이 직감했듯이 박정희가 "민족적 민주주의" 또는 "우리식 민주주의" 를 주창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호의적 반응을 보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