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은 거창하지만, 그냥 편하게 주절주절 사변적인 글 한번 써봤습니다. 스켑랩에도 올렸는데 틀린 점이나 반박할 점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과연 인간에게 '앏' 혹은 '지식'이란 것은 무엇일까?



고대 플라톤의 <Theaitetos>이래로 현대 최신 과학이론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지식과 인식의 개념은 이렇게 이해 됩니다.


S knows that P :

1) P is true,
2) S believes that P, and
3) S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P.


즉, 어떤 명제가 '참'이고, 주체가 되는 사람(혹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그 믿음이 그 사람에게 '정당화'될 수 있다면 당연히 그것은 우리에게 '지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당장 1시간 전 서울상공 기상 상태에서부터, 하늘과 나무의 색깔, 친구의 정확한 병무청 신체검사 자료, 중력이나 행성의 존재, 광속의 절대성까지 인간의 모든 '지식'은 저 3가지 조건을 충족하기만 하면 100% 보장된다는 것은 보편적인 상식이라 여겨집니다.


그렇게 인류의 지식은 (그 조건들을 충족시키기만 하면) 확고한 것으로 잘 믿어지고 있던 중, 1963년 어느 날 Edmund L. Gettier라는 철학과 학부생(?)이 그 믿음의 순도를 확 낮춰버릴만한, 2페이지 반 짜리 쪽글(?)을 학술지에 써버렸군요. 참/정당화/믿음의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고도 '지식'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강력한 '반례'를 제시한 것이지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
http://www.ditext.com/gettier/gettier.html


내용인 즉슨, 우리가 지식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인식 주체가 합리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실제로는 거짓인 사실에 기초하고 있음과 동시에, 어쩌다보니 우연하게 참인 믿음을 결과적으로 가지게 된 것일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그 옛날 '데카르트 회의'의 현대판 버전에 가까운 이야기일 수 있고, 기존 지식의 그 위대한 정당성에 큰 '피해'가 갈 정도의 위력은 없다고 평할 수 있습니다만, '인간 인식'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들어줄만은 한 것 같습니다.


게티어 반례와 더불어, 현대 철학적 인식론 분야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대충 접근하려 했는가-에 대해 관심있으신 분은 아래 글을 참조하세요. 초반부에 게티어 반례를 쉽게 설명해놓은 부분은 아주 볼만합니다. 뒤로 갈 수록 논리학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골 아파지겠지만 ...


철학적 회의주의와 배제의 원리 (임일환)
http://blog.naver.com/mdpsjk?Redirect=Log&logNo=20022154773



"지난 20세기 철학적 인식론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발전 혹은 변화를 두 가지만 지적하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인식론자들은 대부분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한가지는 무엇보다 60년대 초 게티어에 의해 제기된 이른바 ‘게티어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금세기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여전히 발휘하고 있는 이른바 외재주의 인식론 (externalism)의 강력한 대두가 그것일 것이다.

주지하듯 게티어의 문제란 이천여 년 동안 철학자들이 당연시 여겨오던 지식의 개념 즉 정당성있는 참 믿음이 지식이라는 전통적 지식 개념이 불충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통찰한 게티어에 의해 제기된 문제이고, 게티어에 의해 촉발된 지적인 충격은 20세기 후반부의 실로 다종 다양한 새로운 인식적 정당성 이론의 모색과 발전을 꽃피우게되는 직접적 계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이처럼 새로운 지식의 개념의 분석과 이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골드만, 암스트롱, 드레츠케, 노직 등의 일군의 철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신빙주의’ (reliabilism) 인식론, 혹은 외재주의적 인식론의 태동은 오늘날 이른바 자연주의적 인식론이라는 기치 하에 현대 인식론의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실로 20세기 인식론 논쟁의 대부분이 토대론과 정합론의 대립이라는 전통적인 내재주의적 관점과 구도 내에서의 이론적 논란이었다면, 인식의 정당성조건이 반드시 인식 주체 내적인 조건일 필요가 없다는 외재주의적 인식론자들의 통찰은 인간 인식의 본성에 탐구에 새로운 방향과 방법론을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철학적 회의주의의 도전을 극복을 시사하는 새로운 단서를 제공하였다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2) 자연주의적 오류의 부당성에 대하여

게티어는 게티어대로 그렇다 치고 (원래 글 쓰기 전엔 두 가지 주제를 하나로 묶어서 뭔가 해보려 했으나 시간이 없어서 대충 짤라서 씁니다;) 저는 예전부터 지식 담론 곳곳에서 유행처럼 사용되는 '자연주의적 오류'의 부당성에 대해 썰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일반적인 개념으로서 이는, 오직 사실 명제들만으로는 당위 명제를 정당하게 끌어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계에는 적자생존의 원칙이 보편적으로 적용, 존재한다. 그러므로 실제로 강한 자가 더 잘 살아남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시 말해, 모든 당위 명제는, 반드시 하나 이상의 다른 당위 명제를 포함해야지, 사실 명제만으로는 '정당하게' 도출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자연주의적 오류는 흔히 정치적 우파들의 수사법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물론 정치적 좌파들의 수사법을 반박하기 위해 버나드 데이비스가 창안한 개념 '도덕주의적 오류'도 있지요. "모든 이는 평등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유전적 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이에 해당합니다) , 사실 좀 더 깊이 파고들면, 과연 일상 대화에서 '자연주의적 오류'를 정당하고 엄격하게 적용시킬 수 있는가-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제가 좋아하는 언어,심리철학자 존 설(John R.Searle)의 '자연주의적 오류 반박' 코멘트를 빌리자면 가령,

(1) Jones는 Smith에게 “나는 돈 5달러를 네게 줄 것을 이에 약속한다.”고 말했다. (사실 명제)
(2) Jones는 Smith에게 5달러를 줄 것을 약속했다. (사실 명제)
(3) Jones는 Smith에게 5달러를 지불할 의무(obligation)를 지게 된다.
(4) Jones는 Smith에게 5달러를 지불할 의무가 있다.
(5) Jones는 Smith에게 5달러를 지불해야 한다.(ought to pay) (당위 명제)


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물론 실제로 "5달러를 지불해야 한다."라는 당위 명제가 "인간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식의 다른 '당위 명제들'과, "인간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마음이 부담스러워지고 당사자의 불쾌감을 생성시킬 수 있다."라는 심리적 사실 명제들과 짬뽕되어 뒷받침될 수도 있지만, 존 설이 제시한 사례처럼 '오직 사실 명제에 의해서만' 5달러 지불 의무가 정당하게 도출되는 경우도 없다고는 말 못하니까요.


사실 저는, 이 세상에 엄격한 의미에서 궁극적으로는 '사실 명제'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물론 '발견,발화'되거나 '생각'된 것들을 말합니다. 아무도 생각해내거나 말하지 않은 명제는 물론 순수하게 사실 명제일 수 있지요) 영국의 일상언어 철학자 오스틴(J. L Austin)(존 설도 이 사람의 영향 하에 있지요)의 의견에 찬성한다는 점에서, 아예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연주의적 오류'자체는 기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가령, "저 집은 벽돌집이다, 물은 H2O다."라는 '사실 명제'조차 궁극적으로는 '현실'에 영향을 조금이라도 미칠 수 밖에 없는 '당위적 효과'를 지니게 된다는 오스틴의 주장을 전제한다면, 애초에 "오직 사실 명제들만으로 당위 명제를 추론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라는 '자연주의적 오류'의 근간을 뒤흔들게 되니까요.


위의 사례를 이용하여 쉽게 말하면, "나는 5달러 줄 것을 약속한다."는 명제가 발화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사실'일 수 있지만, "나는 5달러 줄 것을 약속한다."라는 명제가 쓰여지거나, 발화되거나, 다른 이가 듣거나, 나의 마음 속에서 작동하는 그 순간부터는 이미 '당위적 명제'로 존재하게 되버린다는 것이지요.


조금 더 나아가면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지요. 가끔 보이는 생각(이덕하님도 자연주의적 오류를 좋아하시는 듯한데)인데, 실제로 흑인의 지능이 평균적으로 백인들보다 떨어진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어느 정도 입증'되었다고 가정할 때, 어떤 '자연주의적 오류 개념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명제로만 당위 명제를 추론하는 것은 오류다. 즉 흑인 지능이 평균적으로 백인보다 떨어진다는 과학적 '사실'은 전혀 인종차별적 발언이 아니며, 그 사실과 인종차별과 같은 정치적 주장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걸 밝힌 과학자들보고 인종차별적 발언했다고 몰아가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볼 때 (존 설의 입장을 따른다면) 이 논리에는 치명적 약점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아무리 자기네들은 '순수한 사실 발견 차원에서 연구'를 했다고 주장해도, 아무리 정치적 당위 주장과는 별개로 진리 발견을 한 것이라고 '주장'을 했어도, 애초에 위의 사례에서 "나는 돈 5달러를 네게 줄 것을 이에 약속했다."라는 명제가 '당위적으로 작동'하듯 (물론 이 작동은 과학자-인종차별주의반대자들과의 관계와는 다르게 올바르게(?) 작동한 것이지만) 인종차별주의 반대론자들의 '관점'에서는 당연히 그런 연구 행위 자체가 '흑인'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조장할 수 있다고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뭐 어렵게 이런 비유 안써도, 왜 실생활에 그런 거 많지요. 어떤 '과다 체중 여성'이 있습니다. 진실 탐구와 발견을 아주 좋아하는 과학자 남성이 말합니다. "너 좀 뚱뚱하다. 이건 널 비난하는 게 아니라 여러 과학적 기준에 근거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 뿐이야. 기분나빠하지마. 너가 만약에 내 이런 말을 기분 나빠한다면 너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거야. 즉, 너가 뚱뚱하다는 사실로부터 순수하게 뚱뚱하다는 것은 나쁘다-라는 당위 명제를 니 멋대로 추론하는 것은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거지." 


다시 말해, 흑인이 백인보다 평균적 지능이 딸린다는 '실제 사실' 그 자체(물론 과학자들이나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 연구하기 이전의 순수한 객관 사실)와, 그 과학적 사실을 '과학자들이 발견'해서 "우리가 그 사실을 밝혀냈다. 이것은 사실이다."라고 주장하는 발화 상황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겁니다. 제가 볼 때 과학자들은 전자의 '진리성'에 너무 몰두하다보니, 후자의 것, 즉 '언어의 발화 상황이 필연적으로 초래하게 될 당위적 효과'를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요.


뭐 제 이런 생각은 양날의 검이긴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자연주의적 오류' 자체를 싸잡아 기각해버리면, 소위 '꼴통 우파'들이 써먹는 짓, "세상은 죄다 약육강식이야. 그러니까 강한 놈이 약한 놈 지배하는 건 자연스러운 거고 바람직한 거야."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반박할 강력한 '논리적 무기'를 일단 자체 폐기하는 꼴이 될 수도 있고, '자연주의적 오류'를 내세워 "'신자유주의'가 정치성이나 당위적 효과와는 상관이 없이 그저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지배적 시스템으로 강화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자유주의의 높은 효율성은 사실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갖고 그게 바람직한 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너네들 목소리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거야." 따위의 '교묘한 술책'들을 반박할 수 있는 새로운 무기로 써먹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니까요. 후자의 경우, 한국에선 장하준씨가 그 패턴을 써먹은 적이 있지요. "너네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랑 상관없이 효율적이니까 강추한다는 너네들 말야, 사실은 보호무역 사다리 다써먹고 이제 거추장스러우니까 치우라는 꿍꿍이 때문이 아니냐."라고 하면서요  (물론 장하준씨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폐기하여 그렇게 끌고 간 것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