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한편 소개할까 합니다. 인터넷을 처음 사용했을 무렵에 마음깊이 존경하고 좋아했던 형이 쓴 글입니다. 그당시에는 신학도였고, 지금은 어엿한 목사님이 되었는데 이 형 덕분에 제가 처음으로 공부하는 사람에 대한 호감과 환상을 갖게 됐었죠. 그러고 보니 이 형이 전라도 사람이었네요. 영호남의 지역갈등에 대해 잘 몰랐던 시절, 전라도라는 생경한 지역이 제게는 이 형이 나고 자란 고향이라는 사실로 각인이 되버렸죠. 그래서 전라도에 대한 제 첫인상은 무한 호감이 되었는데..ㅎㅎ

갑툭튀 그 형 생각이 나서 다시 꺼내본 글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묵직한 울림을 주는 것이 모두가 일독했으면 하는 마음에 소개해 보는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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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주 수요일이니, 1월 6일인가 싶다. 

전날 밤새 보아야 할 책이 있어서 불가피하게 대학원 건물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요즘은 가끔 이렇게 밤을 지낸다. 비교적 느즈막한 시간이 되어서야 눈을 붙이게 되었고, 피곤한 몸과 어정쩡한 잠자리를 뒤로 한채 어스름한 새벽을 맞이하였다. 1월 6일 아침은 독일문화원 어학강좌 등록을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몽롱한 정신이 채 걸러지기도 전에 몸을 움직이고 어디론가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경험인지를,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나는 스쿨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도시락 두 개를 챙기며 버스가 오는 곳으로 달려나갔던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의 그 아침이 떠올랐다. 다행스럽게도, 쌀쌀한 새벽공기는 누적된 육신의 피로의 군단들이 대뇌로 막 몰려오기 전에, 이미 머리를 서늘하게 치고 들어왔다. 그래, 피로보다는 추위가 낫지, 하는 위안을 마음에 품고 쌀쌀한 공기를 가르며 독일문화원으로 달려갔다.

말을 키우려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을 키우려면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데, 독일어를 키우려먼 어디를 가야 할까나 하는 몸부림 속에서 내린 결단이 독일문화원 등록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원이 수원에 있는 관계로 서울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 내심 부담이 되었고, 학기중에는 도대체 짬을 낼 수가 없을 만큼 한신은 학생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1년 전의 기억이다. 대학원은 학부보다 강의시간도 적으니 넉넉하고 여유로운 과정이 될 것이라고 나를 위로한 대학원 선배가 있었다. 산술적인 계산으로만 치자면 틀린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양적인 여유가 질적인 여유까지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저번 학기에 단 2학점으로만 들었던 라틴어가 한 학기 종일 얼마나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는지를 회상해 보아도 쉽사리 헤아릴 수 있으리라.

이렇게 이리저리 시간을 고민하던 끝에 이번 겨울방학에 독일문화원 강의를 들어볼 수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저번 학기말에 독일문화원 인터넷 사이트를 통하여 방학강좌를 알아보니, 방학기간에는 따로 신입생은 뽑지 않는다는 것이라 전한다. 그래서 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전화를 걸어보았다. 담당선생이 말씀하시기를 단 하나의 가능성은 있다고 한다. 요는 다음과 같다. 재학생들이 새롭게 반편성 되는 과정에서 누락된 자리가 생기면 그 자리를 신입생이 대신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희망이 보였다. 형세가 이런 꼴이니 대부분의 독일문화원 어학강좌 학생들은 웬만하면 불량학생이 되어, 되도록이면 많은 이들이 반편성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묘한 바램도 갖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말 그 곳은 불량학생들이 참 많았다. 다음 학기 등록을 하지 않는 학생들이 생각보다 참 많다는 현실을 보고, 나의 놀라운 예견과 바램의 실현에 동이 나서 즐거워야 하는데, 오히려 슬퍼질 뿐이었다. 

"서울역에 내려서 83번 남산행 버스를 타고 남산도서관에서 내리면 된다." 독일문화원 지리를 소개하신 그 분의 지령이다. 이 정도의 정보면 충분히 독일문화원은 갈 수 있겠다는 무대포정신이 나에게도 혈액을 돌며 사기 충천하였다. 역시 그것도 적중하였다. 남산도서관을 내리는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한 십여명이 우루루 그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면서 어디론가 행군을 하듯 발빠른 속도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려는 처소가 남산 도서관인지 독일문화원인지 아니면 남산 타워인지는 나는 전혀 예견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들이 독일문화원을 가는 부류이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그들의 뒤를 그저 기러기 꽁무니 따라다니듯 따라 다닐 뿐이었다. 

나는, 그리고 앞의 선발대들은 생각보다 긴 거리를 걸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챙피와 조소의 시선을 감내하면서라도 애시당초 "독일문화원이 어디예요?"라고 길가는 행인을 잡고 물어보았어야 할 터인데 하는 생각을 불안하게 갖을 만큼 끝도 없이 계속 걸어가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어디론가 마악 걸어가는 십여명의 군중의 뒤를 그냥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꼴이었다. 실로 물어볼 시기는 놓친 듯 했다. 걸어간 거리의 투자비용을 쉽사리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 불우한 의식이 감도는 와중에서도 내심 나는 묘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일단 한 십여명의 학생들이 대부분 대학생으로 보였고, 또한 여성동지들이었기 때문다. 즉 배 나오신 사장님이나 아주머니 분들께서 독일문화원으로 갈리는 만무하고, 또한 여성은 언어와 근원적인 친화력을 지니고 있는 종족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나로서 얼마든지 추측이 가는 질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걸어간 거리는 한 5분 내지 10분 정도였을까. 시계시간은 그정도였지만 의식의 시간은 열배는 더 진행된 느낌이었다. 나는 거의 녹초가 되어버렸다. 시계보다 중요한 의식의 시간, 그리고 그 의식의 시간에 짓눌린 심리적인 피로와, 잠을 설친 육체적인 피로가 자웅동체가 되어 온 몸의 피로는 더욱 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 정체와 목적지를 확인할 수 없는 군단의 행렬이 마악 내 눈 앞에서 오른쪽으로 한꺼번에 방향을 틀고 있었다. 피로가 몰려와도 이에 게의치 않고 나의 심장은 더 뛰고 있었다. 아니 피로와 긴장 때문에 심장이 더 뛰었다. 그들이 오른쪽으로 커브를 트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그들을 뒤 따라온 나로서도 어떻게 다른 방향을 모색할 재간이 없었다. 

나는 게임의 이름은 정확히 기억이 떠오르지 않지만, 불현듯 쥐가 나오는 오락게임이 생각났다. 선두주자가 한 방향을 틀면 수십 수백마리가 그 주자의 뒤를 따라 졸졸히 따라다니는 그 게임!, 낭떠러지에 그 선두주자가 발을 헛디뎌도 그 단세포적인 후발대는 계속 낭떠러지로 집단 몰사하는 그 게임! 한 십여명의 선두주자들이 오른쪽의 낭떠러지로 "으악!" 하는 소리를 지르며 하나 둘씩 연달아 떨어지는 듯한 공포를 머금고 나는 그들을 따라갔다. 나에게 그 오른쪽 커브길 저편은 문화원 아니면 낭떠러지, 둘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들을 따라가 오른쪽을 확 도니 단촐하지만 세련된 분위기를 간직한 건물이 바로 눈 앞에 보였다. 역시 쥐는 쥐고 사람은 사람이다. 아, 번득 생각난다. 그 게임은 레밍스였다. 

나는 심지어 재학생도 아닌데 재학생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재학생이 등록이 안된 상태에서 신입생을 충원한다면 여기에서 몇 시간을 또 쏟아 부어야 할 지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신입생, 아니 편입생의 마음을 이런 조그만 계기 속에서도 공감할 수 있는 호기라는 생각을 가지고 안위하기로 했다. 한 세시간 정도를 기다려서 결국 등록을 했다.

편입생은 힘이 없다. 그리고 반편성 시험도 없다. 단지 불량학생들이 많이 등록을 하지 않으면 않을 수록, 그 자리를 삐집고 편입생으로서 합류할 수 있는 그 묘한 운명을 간직한 주변인일 뿐이었다. 한마디로 편입생의 정체성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불굴의 정신이다. 불행히도 그 많고 다양한 단계의 수업은 거의 대부분 마감이 되었고 단지 GIa 수업만 우리에게 남아있는, 최종의 유일한 선택권이었다. 끊임없는 고민의 순간들이었다. 기초단계도 피가 되고 살이 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찜찜했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방학기간 동안 산더미처럼 쌓여있는가. 다시 학교로 돌아갈까. 아니면 수강을 그냥 신청할까... 그 많은 입학 희망자들 가운데 제일 마지막에 나는 결국 입학원서를 내었다. 

생각해 보니 등록은 했지만 수업료를 준비하지 못했다. "수업료는 온라인을 보내면 어떨까요?" 등록을 받는 분의 대답은 단호했다. 오늘, 그것도 지금 아니면 안된다고 한다. 한 겨울의 밖은 청승맞게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은행이 저 밑에 있다고 한다. 오십미터? 백미터? 그저 가까운 거리에 은행이 있는 줄 알고 우산도 없이 그 길을 나섰다. 아니 애초부터 우산은 없었다. 내려배기라 힘은 들지 않았다. 비는 축축히 내리고, 바람은 불고, 쓸쓸한 거리였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라면봉지가 바람을 타고 부유하더니 어디론가 자기자리를 찾고 떨어진다. 

이번에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지, 아니면 운이 좋아 문화원으로 입성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떨고 있는 레밍스의 운명을 박차버리기로 했다. 내 인생은 내가 여는 것. 사람을 만나는 대로 물어보고 결국 은행에 도착했다. 한 십여 분은 걸은 것 같다. 돈을 찾고 문화원으로 돌아가려는 즈음 내가 걸어왔던 길목들을 되돌아 보니, 생각보다는 경사가 매우 가파른 높은 곳에 문화원 방향이 보이는 것이었다. 

인간은 그가 편안할 때에는 자신의 상황을 온전히 조명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인가보다. 무심코 걸어간 내려배기가 다시 이렇게 나의 족쇄가 되어버릴 줄이야. 비는 오고, 날씨는 춥고, 바람은 불고, 올라배기는 버겁고, 몸은 피곤하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차가운 비는 몸에서 나는 열과 맞불이 되어서 옷 사이로 김이 모락 모락 나고 있었다. 그 최악의 컨디션은 말로 설명할 길이 없었고, 나는 심신이 너무나 지쳐 있었다. 

나의 축축한 등에는, 언제나 거뜬히 독파할 재량으로 갖고 다니지만 결코 쉬이 자신의 운명을 나에게 맡기지 않는, 자존심 강한 몇 권의 무거운 책과 가방이 매어 있었고, 오른쪽 어깨에는 나의 것도 아니고 누구 심부름으로 건네주어야 할, 아주 무거운 오래된 486 25Hz 독일제 노트북 컴퓨터가 쥐어 있었다. 거의 무거운 고철 수준이다. 게다가 연속으로 몇 분 간격으로 옆 봉창에서는 삐삐가 호출을 해대고 있었다. 거의 임전무퇴이자 진퇴양난의 점입가경이었다. 

힘겹게 독일문화원으로 되돌아 와서 옷에 아직 스며들지 않은 빗방울들을 털어내고 한 가마니 쌀을 어깨에서 땅바닥으로 집어던지듯이 책가방과 노트북과 웃옷을 내팽개치고 나는 추운 겨울 김을 모락 모락 내면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전화로 호출을 확인하고 다시 연락 받을 곳에 전화하였다. 

독일문화원은 생각보다 스케일이 큰 공간이다. 겉에서 볼 때에는 어느 산장의 조그마한 1층 휴게실과 같은 분위기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건물은 지하로 모두 연결이 되어 있었고 자그마한 다양한 강의실과 커다란 강당과 자료실 열람실 등이 오밀조밀 얽혀 있는 공간이다. 어렵게 돈을 내고 등록을 하고 지친 육신을 이끌고 연구소로 가는 길목에 나와 같이 입학(?)을 한 동기를 만나게 되어 같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남편이 독일인이신 어느 아주머니 동기였다. 그녀는 말한다. 본인은 독일어의 에이비시도 모른다고. 

GIa를 입학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나는 아직 잘 모른다. 어떤 이는 아베체부터 배우는 곳이라고 표현하면서 너무 쉽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기초부터 철저히 하지 않으면 높은 단계로 올라가면 갈 수록 더욱 헤멜 것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 나의 등록을 받아주신 선생님 같은 분의 말씀 -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라고 아주 인상적으로 말한다. 그리고 무시(?)하지 말라고 말한다. 

나는 곰곰히, 이렇게 고생하면서까지 이 곳을 등록하는 그 이유를 되짚어 보게 되었다. 물론 GIa 단계의 난위도의 문제도 모종의 고민의 일종일 수 있겠지만, 그 사안은 당장에 월요일 수업을 들어보면 해결될 문제이니,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구체적으로 Pnds 시험을 보는 것일 게다. 그리고 합격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가장 막강한 교수법과 테크닉을 축적한 문화원이니 만큼 나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리라는 희망이 있으니 새벽의 찬공기와, 그 축축한 겨울비와, 끝도 없이 펼쳐지는 올라배기를 가르며 등록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Pnds 자체가 목적인가? 그것 또한 잠정적일 뿐이다. 유럽 대학의 입학을 위한 조건일 뿐이다. 그럼 대학 입학 자체가 목적인가? 이 지평에 들어서면 이제 고민의 내용과 수위는 한층 다양해진다. 하지만 선명하게 대답이 착상되지는 않았다. 나는 묻고 물었다. 너가 오늘 하루를 이렇게 뛰어다니게 한 근원적인 엘랑비탈이 무엇인가? 좋은 외국대학 들어가서 반반한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서? 날씨가 추워서 그러했는지, 아니면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변변하게 마련되지 못해서 그랬는지, 묘한 침묵과 긴장이 감돌았다. 어쩌면 그 이상의 대답을 아직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즉각 대답이 튀어나오지 않았고 나는 내심 내가 참 부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절망하게 되었다. 나의 하루를, 혹은 나의 인생을 뛰어 다니게 하는 욕망의 발원지가 바로 그 정도의 명분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 말이다. 결국은, 결국은, 그까짓 박사학위를 지향하여 내 인생의 방향이 암묵적으로 재편되어 있었다는 것을, 나의 침묵의 행간 속에서 깨달았던 것이다.

제도권 아카데미아의 정점은 누가 뭐라 하여도 박사과정의 이수이다. 또한 아무리 박사가 바글거리는 한국사회라 할 지라도, 박사가 똥값인 한국사회라 할 지라도, 여전히, 한 보폭 더 뒤로 해서 평균적으로, 숭앙의 기호인 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박사는 어떠한 댓가를 치루고서라도 얻어야만 할 지식과 명예와 권력의 창출 조건은 아니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사라는 간판은 전문가, 혹은 진정한 마기스터라는 명분을 가지고 운신의 폭을 허용해주는 안전핀으로서의 역할을 적절히 대행하여 준다. 그렇기 때문에 박사학위는 학문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의 필요조건적인 욕망과 욕구의 대상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나의 미묘한 지향이 학문의 충분조건으로서 박사학위에 선을 대고 있었다는 놀라운 무의식의 욕동을 보고 있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기가 찼다. 단지 박사의 라이센스를 갖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풍요로운 삶과 명예가 주어지는 묘한 한국의 지식사회와 대학사회의 현실을 그렇게 고깝게 보았던 나 자신이 그 불우한 의식에 이미 깊이 침윤되어 가고 있다는 현실에 나는 기가 찼다. 자신이 획득한 박사학위가 얼마나 불성실하고 볼품이 없으면 번역하여 고국의 지적 유산의 벽돌을 한 켜 쌓아놓지는 못할 망정, 십 년 이 십년이 가도 자기 논문 하나 번역 해대지 못하고,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많은 선생과 교수들을 우리는 모르는 바가 아니다. 최소한의 예우로서 우리는 모르는 체 할 뿐이었다. 

수업시간에 공공연하게 순수한 학생들을 현혹하면서, 본인의 왜소한 학문의 지평을 부풀리거나, 학자적 양심을 포기하고, 다른 학문적 견해나 학자들을 높은 억양으로 매도하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학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또한 강의실의 수준높은 비판의 강도는 강의실 밖의 학회나 공동의 세미나에서 연계되지 않은 채, 단지 학생들을 볼모로 한 신경질적 세카즘이나 개인적인 화풀이로 추락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와 같은 모습을 발견하고, 세미나 시간에 모 박사님과 얼굴을 붉힌 저번 학기의 경험이 기억 저편에서 피어올랐다. 

적당히 세류와 호홉하며 보폭을 맞추어 사는 것이 우리네의 뒤틀린 지혜라면 지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한국사회가 지닌 전근대적인 지성의 풍토나 척박한 학문의 토양 위에서 학문의 르네상스를 외쳐대고 성숙을 외쳐대는 다윗의 돌팔매는 결코 곱게 보여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지식전선에 포진되어 있는 우리는 충분히 예견 할 수 있다. 궁핍한 우리네의 현실 풍토에서 잘 짖으면 우상이 되지만 잘못 짖으면 개가 된다. 또한 개와 우상 사이에서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정체성의 확보의 이면에는 다양한 함수가 연루되어 있다. 어쩌면 개가 되든 우상이 되든 게의치 않는 자만이 짖을 수 있는 용기가 발동하는 것일런지 모른다. 이미 짖는다는 것은 모호한 회색빛 중간지대를 포기하는 것이고 그것 자체는 위험부담을 동반한 모험이기 때문이다. 

짖지도 않아도 잘만 굴러가는 우리네의 이 죽은 대학사회와 지식사회에 대한 태생적 환멸을 기억 속에 간직한 내가, 그 긴장을 상실한 시스템에 편입될 수순을 충실히 밟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와 동시에 내가 처음 학문의 뜻을 품고 대학의 문을 열었던 희미한 과거가 홀연히 떠올랐다. 첫 단추부터 다시 시작하며 지금 나의 정체성을 내밀하게 문제 삼자는 무의식의 뇌동이었으리라.

모든 인문학의 물음은 나 자신에 대한 물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에 대한 물음이 결여된 급조된 물음과 담론의 층위는 일단 수상한 치정일 것이다. 대학시절은 나에 대한 물음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면 지금 대학원 시절에는 그 발견의 깊이를 확보하는 좋은 계절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박사과정이라고 한다면, 나의 물음을, 폭넓은 그간의 영향사를 바탕으로, 가장 정확하고 예리하게 포착하는 마기스터의 도정일 것이다. 그 지점에서 부터 나에 대한, 타자에 대한, 사회에 대한, 문명에 대한 묘안과 성찰이 열릴 것이다. 

물음이 없이 인문학을 한다는 것, 나의 몸에 대한 진솔한 대면이 없이 타자와 우주의 몸에 대한 언술을 건넨다는 것, 그리고 지적 지평이든 정치적 지평이든 권력 수혜의 비호를 쫓는 가련한 영혼의 전략으로 학위의 과정을 밟아 나아간다는 것, 이러한 행적이 지니는 개인적인 사회적인 폐혜는 불을 보듯 뻔한 것 아닌가.  

더군다나 신앙의 문제를 해명하려는 신학의 자리에서 아카데미아의 정점을 향해 걸어 간다는 것은 애시당초 섬세한 논의를 요하는 출발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쩌면 지식생산과 축적의 과부하에 치여 결국 아카데미아의 수순에 편입하려는 인생의 모색 자체는 신학과 교회의 전통에서는 결코 쉽사리 용인될 수 없는 치졸한 군상인 것이다. 다른 영역과는 달리 아카데미아를 넘어서는 아카데미아, 혹은 아카데미아를 넘어서는 피데가 우리 신학의 여정에서는 더욱 철저하게 요구되기 때문이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요 삶은 푸른 생명나무라는 괴테의 정신은, 어디에나 해당이 되지 않으리요만, 신앙의 정신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성찰인 것이다.

어느덧 가장 사소한 몸의 누적과 피로에서부터 출발한 물음이 Pnds 그리고 박사학위, 결국은 신학도의 근본적인 정체성의 물음으로 전이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모든 물음의 배면에 깔린 가장 근본적인 물음, "왜 나는 여기에 있는가?"에 대한 해명이 여전히 선명하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의식으로 다가오는 희미한 느낌은, 바로 이러한 물음 마저도 포기해 버린다면,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뒤로 하고 다시 출발해야 하리라는 모종의 비장감이 서린 단호함이었던 것이다. 

이후 몇 시간을 연구소에서 사념에 잠기다가 원래의 방향이었던 학교행 차편을 포기하고 고향행 기차로 몸을 실었다. 아무 이야기가 없어도, 아무 조건이 없어도 나를 기꺼이 품는 고향과 부모님과 가족이 그리워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추운 겨울 대지를 가르며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의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학문과 진리의 길에 처음 발을 디딘 그 떨린 마음 그대로 다시 시작하자. 그리고 그 결기와 신념이 퇴락하거나 박살나 버린다면 바로 그 자리가 학문과 진리에 대한 지향을 마감하는 무덤으로 생각하자, 하며 나에게 다짐하고 나에게 위로하였다. 

한 1년이 지나면 핏빛 젊음을 마음에 품고 입성한 아름다운 한신의 계절이 다 지나가리라.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청초로운 환희와 눈물의 추억으로 한신의 시간은 나의 빛바랜 기억 저편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짧은 육십 평생에서, 길으면 십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나는 고뇌하는 혼이라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정신을 심장에 품고 내밀한 학문의 여정을 걸어가리라. 시간을 먹고 사는 잔혹스럽고도 광폭한 세월의 품에 겹겹히 쌓일 가족 친구 내가 아는 많은 이들의 행복, 갈등, 슬픔, 그리고 죽음과 눈물 마저도 감내하면서 진리와 학문에 설 수 있는 그 기백의 영혼이 나에게 허락되기를 기원하였다. 

내 영혼과 기차는, 고향의 품을 향해 말없이 그 어둡고 깊은 겨울목을 건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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