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환란 사태 때문에 우리 국민들에게 IMF라는 단어는 '국민상식'이 되어버렸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 '다이빙벨'이 그렇다.

어떻게 생겼는지 알 필요도 없고 평생 동안, 아닌 말로 세월호 참사와 같은 비극적이고 어처구니 없는 참사를 직접 당하지 않는다면, 그 것도 운이 억세게 좋아 생존하고 있지 않는 한, 한두번 구경할까 말까한, 최소한 나에게는 '벨'로 끝난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생뚱맞게 피터팬에 등장하는 '팅거벨'이 떠올려지는 기상천외한 물건이 바로 '다이빙벨'이었는데 이제는 '국민상식'으로 변해버렸다.


사실, 다이빙벨은 우리들에게 처음 소개된 물건은 아니었다. 영화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이미 들어보았거나 영화에서 본 경험이 있다. 그 영화 제목은 '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 우리나라에는 '잠수종과 나비'라는 재목으로 2008년 2월 소개가 되었다.

잠수종과 나비

영화 <잠수종과 나비>는 ‘쟝 도미니크 보비’가 남긴 책 [잠수복과 나비]를 최대한 참조했다. [잠수복과 나비]는 상상과 현실의 혼재 속에 ‘쟝 도미니크 보비’의 살아있는 의식을 담고 있다. 원작 그대로 영화화하는 여타 자전적 영화와는 달리 <잠수종과 나비>는 책의 기본적인 구조를 유지하되 움직이지 않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조화롭게 담겨있고, 실제 그가 느꼈을 매 순간의 감정들이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온 몸이 멈춰있는 현실 속에서 한쪽 눈과 과거의 기억,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쟝 도미니크 보비’의 기적과도 같은 업적인 [잠수복과 나비]는 영화 <잠수종과 나비>가 되어 보다 사실적인 감동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두드린다.


이 영화에서 잠수종이 눈 한쪽을 제외하고 전신마비에 걸린 장애인의 현실을 비유하는 소재로 '다이빙벨'이 나온다는 점에서, 다이빙벨 관련 전문가가 아니면 다이빙벨 논란에서 이 영화를 떠올린다는 것은, 설사 이 영화를 직관한 사람조차도,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세월호 참사에서 '다이빙벨'이 공식 용어로 떠올려졌지만 영화는 '다이빙벨'을 '잠수종'으로 번역했다는 것으로, 이덕하님께서 지적하신대로 우리나라 번역분야의 조야성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다이빙벨'은 우리 국민들에게 생소한 용어였다는 것이다.


그런 '다이빙벨'이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국민상식'이 되었고 시사상식 수준을 넘어 전문가들이 차고 넘치게 등장하여 아마 우리나라가 곧 '재난구조의 강국'으로 떠올려질 것이라는 당연히 '비야냥을 기반으로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한 엔지니어 입장에서 다이빙벨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존재이다. 


우선, 복합적인 엔지니어링 분야의 지식이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해를 하려면 기능을 정확하게 기술한 교과서가 있거나 아니면 다이빙벨을 활용한 재난구조 작업을 직접 목격하고 그 목격을 바탕으로 추론함으로서 비로서 이해가 가능한 것인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터넷의 온 동네를 헤집어 다니면서 다이빙벨에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 읽어보고 분석하면 다이빙벨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그 다이빙벨의 현장 구조에서의 유효성의 범위를 논하기에는 아마도 원칙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최소한 아크로에서 '엔지니어링 분야'에 종사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전문가들이 다이빙벨 논란에 속된 말로 '한 구찌조차 보태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물론, 나 역시 그렇다.


엔지니어링  접근에서 불충분한 이해를 전제로 한 상태에서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의 다이빙벨 관련 논란은 무책임한 주장을 무책임한 주장으로 덮은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즉, 인명구조라는 절대적인 목표 앞에서 다이빙벨 논란은 현장에서의 충돌 당사자들은 마치, 이미 진입하여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기득권이 새로운, 그리고 미래의 경쟁자로 떠올려질 수도 있는 상대에게 높은 장벽-예를 들어, 각 나라가 외국 제품들의 무차별한 공세를 완화시키려는 각종 인증 제도를 채택하는 것처럼-을 쌓고 있고 새로 시장에 진입하려는 경쟁자는 이미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기득권의 장벽을 어떻게든 허물려는 쟁투로, 내 눈에는 비추어진다.


그리고 현장에서의 충돌 당사자의 쟁투 위로 이미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기득권을 옹호하건 아니면 새로 시장에 진입하려는 경쟁자를 옹호하건, 입장에 관계없이 그 충돌 당사자의 쟁투를 보도하는 언론과 기관들은 무책임으로 일관되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이 현상을 영화 '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에 비유하자면 한쪽 눈을 제외하고 전신 장애가 된 장애인의 다이빙벨을 박차고 나오는 희망찬 미래를 그린 것이라면 세월호 참사에서 보여준 다이빙벨 논란은 그나마 멀쩡했던 한쪽 눈마저 망가뜨리는, 그래서 다이빙벨을 박차고 나오기는 커녕 다이빙벨과 함께 수면 밑으로 깊게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세월호 참사'보다 더 큰 참사가 대한민국의 일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것이 바로 '세월호 참사'에서의 다이빙벨 논란이지 싶다.


나는 여전히 다이빙벨에 대한 논란에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다. 엔지니어링 분야의 분석이야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위에서 '진입장벽'을 비유하면서 쓴 상황이..... 세월호 참사에서 다이빙벨 논란 관련하여 '여전히 유효하다는 뉴스'가 오늘 새벽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기사는 다이벵벨 관련 충돌당사자들의 입장이 서로 상반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느 쪽에 비판의 무게를 둘지는 각자의 판단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엔지니어링의 충돌적인 결과라면 그건 아닌 말로 '돈의 문제'이기 때문에 비판의 촛점이 상대적으로 명확해지고 집중될 수 있다.


그러나 인명을 구하는 일에서는 아닌 말로 'cut & try'가 존재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시간은 무한정 지체할 수도 없다. 한마디로 '신만이 알고 있는 영역'인데 인간의 입들이 너무 많이 개입되어 있다. 이 현상은 마치 기독교 초기의 치열한 '이단논쟁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어느 쪽에 비판의 무게를 둘지는 각자의 판단에 달린 것이겠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제 정신이 아닌 나라"라는 것.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