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강간에 대한 진화 심리학자들의 가설들과 여성주의(feminism) 이론가들의 가설들을 비교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우선 진화 심리학자들의 가설들을 정리해 보겠다. “가설”이 아니라 “가설들”인 이유는 강간에 대한 진화 심리학자들의 의견이 통일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론들”이 아니라 “가설들”인 이유는 여전히 대다수 진화 심리학자들이 강간에 대한 가설들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진화 심리학자들이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믿는다면 적어도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계 내부에서는 강간에 대한 의견이 이미 통일되었을 것이다.

 

진화 심리학자들의 가설들을 각 가설을 제기한 학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정리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정리하다가는 목록이 상당히 길어질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내 나름대로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정리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단순화하다 보면 어느 정도는 왜곡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각 가설들의 미묘한 특성들까지 다 살리기 위해 긴 목록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1. 적응 가설

 

강간에 대한 적응(adaptation) 가설에 따르면 강간에 전문화된 심리 기제가 남자에게 진화했다. 그것을 “강간 조절 기제”라고 부르자. 정상적인 모든 성인 남자에게 강간 조절 기제가 있다. 강간 조절 기제는 남자가 강간을 할 지 여부를 적응적으로 결정하도록 하고, 적응적인 방식으로 강간하도록 만든다. 물론 여기서 “적응적”이라 함은 이 기제가 진화했던 과거 환경에서 대체로 적응적이었다는 말이다.

 

적응 가설에 따르면 어떤 상황에서 남자가 강간을 하는 이유는 강간 조절 기제에 이런 저런 정보들이 입력되어 “강간을 한다”라는 출력 값이 나왔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 남자가 강간을 하지 않는 이유는 강간 조절 기제에 이런 저런 정보들이 입력되어 “강간을 하지 않는다”라는 출력 값이 나왔기 때문이다. 강간 조절 기제는 시각 기제처럼 자동적으로 작동하며 그 과정은 의식되지 않는다. 다만 그 출력 값이 때로는 의식될 뿐이다.

 

강간 조절 기제가 진화한 이유는 그 기제가 남자의 번식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때로는 여자를 강간해서 임신시킴으로써 번식 이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강간 조절 기제가 진화했다”는 설명은 일면만 드러낼 뿐이다. “남자가 때로는 여자를 강간하지 않아서 보복을 피함으로써 번식 손해를 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강간 조절 기제가 진화했다”가 다른 일면을 드러낸다.

 

강간으로 여자를 임신시킴으로써 번식 이득을 얻을 수도 있지만 강간을 하다가 여자의 남편, 아버지, 오빠 등으로부터 보복을 당해서 번식 손해를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자연 선택에 의해 강간 조절 기제가 진화했다면 무작정 강간을 하도록 만드는 방향으로 작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기제가 진화한 환경에서 대체로 이득을 최대화하고 손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예컨대 남들 보는 앞에서 부족장의 딸을 강간하는 것은 적응적 관점에서 볼 때 바보 같은 짓이다. 반면 남들이 없는 곳에서 가까운 친족이 없는 여자를 강간하는 것은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효한 번식 전략이다.

 

 

 

2. 부산물 가설

 

부산물(by-product) 가설에 따르면 남자에게 강간 조절 기제는 진화하지 않았다. 남자가 강간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성욕 조절 기제”와 “강제력 조절 기제”가 작동한 결과다.

 

남자의 성욕 조절 기제는 강간에 전문화된 기제가 아니다. 이 기제는 결혼한 상태에서 성교를 하려고 할 때도,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교를 하려고 할 때도, 아내와 성교를 하려고 할 때도, 외간 여자와 성교를 하려고 할 때도, 합의 하에 성교를 하려고 할 때도, 강간을 하려고 할 때도 작동한다. 성욕 조절 기제가 진화한 이유는 이런 온갖 상황에서 성욕을 적응적으로 조절하는 것이 번식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남자의 강제력 조절 기제 역시 강간에 전문화된 기제가 아니다. 이 기제는 동생의 먹을 것을 빼앗으려고 할 때도, 자식이 위험한 일을 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할 때도, 아내가 외간 남자와 즐기지 못하게 하려고 할 때도, 여자를 강간하려고 할 때도 작동한다. 강제력 조절 기제가 진화한 이유는 이런 온갖 상황에서 강제력을 사용할지 여부, 강제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등을 적응적으로 조절하는 것이 번식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성욕 조절 기제와 강제력 조절 기제 둘만 제시했다. 강간이 이 두 기제의 부산물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강간에는 이 기제들 말고도 다른 기제들이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성욕 조절 기제 또는 강제력 조절 기제라는 명칭이 부적절한지도 모른다.

 

이 글의 주된 목적은 강간에 대한 적응 가설과 부산물 가설이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는 것이다. “성욕 조절 기제”와 “강제력 조절 기제”라는 명칭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아직 뇌 속에 어떤 기제들이 있으며 어떻게 생겼는지 별로 아는 바가 없다.

 

 

 

3. 양심 가설

 

진화 심리학계에서는 이런 저런 형태의 적응 가설과 부산물 가설이 경쟁하고 있다. 양심 가설이라고 이름 붙인 가설은 내 생각이다. 물론 진화 심리학자가 이미 비슷한 가설을 발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양심 가설에 따르면 남자가 강간을 하거나 하지 않는 이유는 성욕 조절 기제, 강제력 조절 기제, 양심 조절 기제가 작동한 결과다. 성욕 조절 기제와 강제력 조절 기제는 위에서 살펴보았다.

 

“양심 조절 기제”는 어느 정도 도덕적으로 행동할지를 결정한다. 물론 양심 조절 기제 역시 강간에 전문화된 기제가 아니다. 사람을 때리려고 할 때, 물건을 훔치려고 할 때, 바람을 피우려고 할 때, 강간을 하려고 할 때 모두 작동한다.

 

“강간에-대한-도덕적-판단 기제”가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기제는 강간에 전문화된 기제다. 하지만 강간 조절 기제와는 다른 기제다. 강간 조절 기제는 남자의 입장에서 강간을 할지 여부, 강간을 어떻게 할지 등을 결정하는 기제다. 반면 강간에-대한-도덕적-판단 기제는 강간이 어느 정도 나쁜지를 판단하도록 하는 기제다.

 

강간에-대한-도덕적-판단 기제의 출력 값은 양심 조절 기제에 입력 값으로 들어간다. 결국 남자가 강간을 하거나 하지 않는 이유는 성욕 조절 기제, 강제력 조절 기제, 양심 조절 기제, 강간에-대한-도덕적-판단 기제 등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강간 조절 기제를 가정하지 않는다면 면에서 부산물 가설이다. 하지만 강간에-대한-도덕적-판단 기제가 강간에 전문화된 기제라는 점에서 적응 가설의 냄새도 약간 풍긴다.

 

여기에서도 “양심 조절 기제”와 “강간에-대한-도덕적-판단 기제”라는 명칭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양심 가설”이라는 명칭이 별로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나도 안다. 더 나은 명칭을 생각해내지 못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

 

 

 

적응 가설과 부산물 가설의 공통점

 

적응 가설에서는 강간 조절 기제의 진화를 가정했다. 강간 조절 기제의 진화에서 강간이라는 형태의 성교로 여자를 임신시킬 수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부산물 가설에서는 성욕 조절 기제의 진화를 가정했다. 성욕 조절 기제의 진화에서 이런 저런 형태의 성교로 여자를 임신시킬 수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적응 가설이든 부산물 가설이든 선택압(selection pressure) 분석에서 “성교로 여자를 임신시킬 수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진화 생물학에서 선택압은 기능(function) 또는 목적 개념과 연결된다. 목적론(teleology)이라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 “목적”이라는 용어를 피하고 “기능”이라는 용어만 고집하는 진화학자도 있지만 그것은 그리 본질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적응 가설이든 부산물 가설이든 선택압의 측면에서 보면 강간은 “여자를 임신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목적” 또는 “위해서”라는 단어를 피하고 싶다면 “여자를 임신시키는 것이 성욕 조절 기제 또는 강간 조절 기제의 기능 중 하나다”라고 말하면 된다.

 

이 때 선택압 수준의 분석(궁극 원인)과 심리 기제 수준의 분석(근접 원인)을 구분해야 한다. 남자가 “이 여자를 임신시켜야지”와 비슷한 생각 또는 정보 처리를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하면서 강간을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임신이 강간 조절 기제 또는 성욕 조절 기제의 진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어쨌든 적응 가설이든 부산물 가설이든 “강간은 여자를 임신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라는 함의가 들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여성주의자들이 진화 심리학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