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로 읽어보세요.....

아참, 한윤형에 대하여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약술하자면 '우리모두' 안티조선 사이트 전성기 시절(?)에 한 고등학생이 우리모두 사이트에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조선일보 글짓기(정치 시사 분야로 기억함)에서 장원을 했는데 시상식에 참가해야겠는가?"


그 때 진중권이 대답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참가 여부야 본인의 결정이지만 나같으면 안가겠다"



뭐..... 그래서.... 참가안했고..... 진중권 후배 변희재.... 변희재 후배 한윤형....... 그리고 진중권 빠 1호 한윤형.... 진강논쟁 때 맹활약(?)


뭐... 그랬답니다. 이미..... 역사가 되어가고 있네요....



1. 노빠의 실존에 관한 이론들 

노빠의 실존에 관한 이론으로는 <노빠 유명론>과 <노빠 실재론>이 있다. <노빠 유명론>은 "노빠란 없다. 그것은 수구와 꼴통좌파들의 박탈감의 발현일 뿐이다."라는 주장을 요지로 하는 '강한 해석'과, "노빠라고 부를 수 있는 고정단일자는 없다. 다만 상이한 행동의 맥락 속에서, '노무현 광신적 지지'로 통칭할 수 있는 행위들의 다발이 보이며, 거기에 노빠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이다."라는 주장을 요지로 하는 '약한 해석'으로 구별된다. 

반면 <노빠 실재론>은, '노빠'는 개개인으로 실존하며, 그들의 행태와 사상의 경향성을 추적할 수 있다고 말한다. <노빠 실재론자>들은 구체적으로 "노빠들은 소수의 주도하는 30대와 다수의 끌려가는 20대의 연합이다.", "숫자는 6만에서 10만으로 추산된다." 등의 설을 내놓고 있다. 

노빠의 실존에 관한 이론의 특징은, <노빠 유명론>과 <노빠 실재론> 사이에 그어진 전선에 있다. 다른 이들이 "쟤는 노빠야..."라고 칭하는 대다수의 '진성노빠'들은 <노빠 유명론>의 입장을 취한다. 반면 "나도 노빠지만..."을 시작으로 노대통령이나 그 지지자들의 문제를 비판하는 '약한 노빠'들과, "저 노빠들!!"이라며 치를 떠는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은 <노빠 실재론>을 강하게 신뢰한다. 

문헌학자 강준만에 의하면, 처음에 '노빠'라는 말은 폄하어로 사용되었으나, 그후 일부 지지자들이 자신을 긍정하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국어연구가 고종석 역시 그 견해에 동의하면서, 노빠란 말이 처음엔 '으르렁 말'로 출발했으되 이제는 '가르랑 말'로 전화되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동시에 '노빠'란 말이 폄하어가 되지 않도록 노무현 지지자들이 올바른 행위를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노빠의 '거두'로 지목받은 정치인 유시민의 경우는 노빠의 실존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한 적이 없다. 


2. 노빠 실존 추정의 어려움 

노빠의 실체가 이토록 불분명한 것은 그들의 활동이 인터넷 공간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터넷에서 텍스트를 인식할 수 있지만, 그 텍스트가 특정한 인물과 연결되었으리라는 어떠한 확증도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사이버스페이스의 인식론적 한계는 우리의 연구에 커다란 장애를 가져온다. 


인터넷 사이트 중에서 노빠들의 집합소라 불리는 곳은 서프라이즈seoprise.com다. 그러나 여기에 글을 올리는 어떤 사람들도, 비슷한 논조의 글을, 오프라인 매체에 기고하는 법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노빠 현상'을 인터넷에서만 일어나는 특이한 문화현상으로 바라봐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과대평가되어서도, 과소평가되어서도 안된다. 


노빠의 실존은 아직까지는 특정한 텍스트를 바라보았을 때의 섬뜩한 예감으로밖에 증명할 수 없다. 가령 20대라고 주장하는 어느 화자가 올린 "내 주위는 모두 민노('민노당 지지자'의 약칭)다. 왜 그들은 노무현의 위대함을 몰라보는 것일까. 바보라고 할 수 있다."라는 텍스트를 보았을 때, 자신이 주부라고 주장하는 어느 주체가 올린 "그분이 부르셨다는 노래 가사 음정 박자까지 완벽하게 마스터했어요. / 뉴스시간을 기다리죠. 행여 그분 모습 보일까 싶어서요. / 온갖 기사 넘쳐나는 이곳에서 단 한 줄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죠."라는 텍스트를 보았을 때, 우리가 느끼는 섬뜩함은 상궤를 벗어나는 것이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노빠다.."라는 말을 내뱉게 되는 것이다. 





3. 노빠 문학의 분류 



후대의 국문학자들은 '노빠'의 문학을 세가지로 분류한다. (1) 정치SF (2) 간증 (3) 민노당 탈당기 가 그것이다. 이 세가지가 독특하게 어우러져 노빠들의 독특한 문화를 만든다. 









4. 노빠 문학 서설 



노빠 문학에 대한 실증적인 탐구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노빠학Nobbalogy 연구에 뛰어든 듀이학파의 노빠 문학 이해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지금까지 노빠 문학에 대한 총론적인 이해의 틀을 제공한 학파는 그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1) 장르와 계층구조 



듀이학파에 따르면, 노빠 문학 장르의 구별은 노빠적Nobbatic 계층구조의 반영이며, 그것을 영속시키는 장치다. 듀이학파는 노빠학자Nobbalogist들의 기본적 합의인 노빠의 정의를 환기시킨다. "노빠란 '정치적 선'이라는 가치지향과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인물지향 사이에 어떠한 모순이나 간극도 체험하지 못하는 정서적 공동체를 말한다." 그러나 가치지향과 인물지향은 처음부터 다른 층위에 있으므로, 언제나 그것을 통합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따라서 해석하는 주체는 그것을 통합적으로 체험하기 위해, 마치 신탁을 해석하는 무당처럼 그 양자를 조정하여 간극을 봉합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 간극을 주체적으로 봉합해간다면 자연스럽게 그들 간의 견해차가 누적될 것이며, '정서적 공동체'라는 노빠 특유의 응집력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노빠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노빠는 자연스럽게 계층분리를 단행하게 된다. 듀이학파는 이를 사제Templer와 열심당원Zealot으로 변별하고 있다. 여기까지 오면 사제 계급이 봉합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그 도구로 '정치SF'를 사용하고 있음을 추론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물론 대다수의 열심당원 계급은 사제 계급의 지도를 따라 통합성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되며, 이 절실한 체험담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간증'이다. 



이 계층구조는 강압성을 띄지는 않으며, 자연스러운 분리로써 체험된다. 열심당원이 사제로 승급되기도 하며, 사제가 노빠 공동체 밖으로 쫓겨나기도 한다. 이 점에서 이 계층구조는 심지어 지극히 '민주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사제의 역할은 간극을 메꾸는 것이며, 이 역할을 거부하고 간극을 인정하려 한 모든 사제들이 (물론 그들이 '정치적 선'에 대해 다른 노빠 사제들보다 올바른 견해를 가졌다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축출되었다는 것, 그리고 열심당원들은 사제의 능력에 찬탄을 보내며 '등수놀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이 계층구조의 폐쇄성은 명백하다. 



즉, 그 폐쇄성은 계급의 폐쇄성이 아니라 계급역할의 폐쇄성이다. 노빠적 계층구조의 계급이동은 비교적 자유롭다. 그러나 계급역할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심지어 고위사제High Templer일지라도) 조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 계급역할을 드러내는 노빠 문학의 장르가 바로 '(사제의) 정치SF'와 '(열심당원의) 간증'인 것이다. 





(2) 정치SF 



오랫동안 정치SF를 연구해온 노빠 문헌학자들은 정치SF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이 장르의 이름을 '정치SF'로 할 것인지 '정치판타지'로 할 것인지를 두고 한국 SF계와 판타지계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논쟁과 상관없이 결과는 쪽수대로 나타났다. -즉, 쪽수가 적은 SF계가 불명예를 받아들였다.) 



첫째, 마르크스주의의 대립구도를 차용하고 있다. 서민 대 특권층, 개혁 대 수구, 강북 대 강남 등의 이분법이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의 합리주의적 요소는 배격하고 있다. 이들의 텍스트에선 주의주의적 요소가 두드러지며, 진정성, 진심, 기대, 소망, 희망, 믿음 등의 어휘가 자주 사용된다. 사제 계급 중 1인인 김동렬 옹의 어휘목록에선 가끔 '미학'도 '진정성'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물론 '역설적'이란 의미로 사용될 때가 더 많기는 하지만, 그것은 별도의 쳅터를 통해 탐구해보자.) 



셋째, 간극을 노무현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기 위해 '도마뱀 꼬리 자르기' 기술이 많이 동원된다. 가령 '노무현 대선자금'은 '민주당 대선자금'과 분리되며, 민주당 구주류와 노무현 계파는 분리되며, 열린우리당으로 따로 갈라져 나간 후에도 정동영 등 실용주의파와 노무현은 분리된다. 이 분리의 전략을 온몸으로 실현하는 정치인으로 유시민이 있다. 마땅히 그에겐 경의를 표하며, 대사제Great Templer라는 명칭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여하간 이러한 '분리' 덕분에, 그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누군가'를 비판하게 되고, 그러면서 '개혁'에 동참한다는 야무진 착각에 빠지게 된다. 노빠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 분리의 전략을 따라하지 않고 '열린우리당 정동영'이 아닌 '열린우리당'을 비판할 경우, 그는 "가슴이 없는 이"로 매도당한다. 자칫하다간 진중권처럼 "발가락의 무좀만도 못한 이"(사제 '서영석'에 의하면)로 전락하기도 한다. 



넷째, 마르크스주의의 구별법을 차용하고 있으면서도 이념정당을 반대하고 대중정당을 지향하겠다고 말한다. 일종의 민주노동당 따돌리기 전술이다. 대사제 유시민은 현명하게도 자신의 포지션을 미국 민주당 수준에 맞춤으로써 이 모순을 극복하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신(God)께서는 이 모순의 존재가 잘 이해가 안 가시는지 가끔 삑사리를 내신다. 





(3) 간증 



'간증'은 '정치SF'보다 더욱 드라마틱한 문학이다. 그것의 문학적 가치는 정치SF보다 높으며, 문헌학적 가치도 훨씬 우수하다. 그것은 일종의 신화적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떠나감 - 감동 - 돌아옴 - 다짐 



1) '떠나감'은 한국정치현실에 절망하여 정치혐오주의자가 된 지난날의 자신을 가리킨다. 여기서 핵심은 그가 원래부터 '정치혐오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며, 무언가에 상처입고 떠나갔다는 것이다. 대개 그들이 체험했다고 말하는 것은 80년대의 운동이며, 떠나간 계기 역시 80년대의 상처다. 



2) '감동'은 노무현을 체험함으로써 이 세계로 돌아올 결심을 굳힌 사건을 가리킨다. 



3) 결심을 한 이들은 돌아오게 되며, 돌아와서 이 세계에서 얼마나 큰 행복을 얻었는지를 말한다. 



4) 그리고 앞으로의 '헌신'을 '다짐'한다. 



간증의 핵심은 이 텍스트엔 정치적으론 거의 아무런 '내용'도 없다는 것이다. 무언가가 있다면 정치SF의 첫 번째 특징에서 서술한 마르크스주의적 이분법이다. 그들의 내용은 용어의 대비로 채워져 있으며, 그들의 구조는 위에 서술한 그대로다. 이 구조는 대통령 선거 당시 노무현 캠프 쪽에서 CF로도 써먹었다. 





(4) '민노당 탈당기'의 특수성과 보편성 



그렇다면 '민노당 탈당기'는 무엇인가. 많은 노빠학자들은 '민노당 탈당기'의 존재를 근거로 듀이학파의 노빠 계층론을 비판해 왔다. '민노당 탈당기'의 작성자들은 적어도 스스로 간극을 판단하는 주체들이며, 열심당원에 포함되지 않지만, 그들의 텍스트 역시 구조만 있고 내용은 없다는 점에선 그들을 사제 계급으로 볼 수도 없다는 것이다. 



듀이학파 역시 '민노당 탈당기'의 존재를 매우 거북스러워했으며, 그들의 논문을 보면 그것의 존재를 무시하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듀이학파는 '민노당 탈당기'를 열심당원들의 '유희적 창작물'로 보았다. 민주노동당이 노빠들 마음에 안 들때마다 민주노동당의 정당성에 타격을 입히는 용도로 창작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한 듀이학파 학자는 이 이론을 다음과 같은 쌍소리로 정식화했다. "언제 입당이나 한적 있냐? 괜히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들은 그 근거로 '민노당 탈당기'와 '간증'의 구조적 유사성을 제시했는데, 이 논의는 물론 타당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다른 논의에 비해서는 세련미가 떨어진다. 



최근에 와서야 일련의 절충주의자들이 나타나 듀이학파의 입장과 문헌학자들의 입장을 통합했다. 그들은 듀이학파의 주장처럼 대부분의 '민노당 탈당기'를 유희적 창작물로 볼 수는 있으되, 그중 일부는 '진품'으로 볼 수 있고,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도 서술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에 의하면, 듀이학파의 주장처럼 노빠들을 사제와 열심당원으로 분류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구조에 포섭되지 않으면서 사제의 정신과 열심당원의 능력을 가진 부류가 있는데, 이들을 '냉담자' 내지는 '변두리 노빠'라고 칭할 수 있고, 이들이 '민노당 탈당기'를 생산한다고 한다.



냉담자는 가치지향과 인물지향 사이에 간극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들은 사제처럼 그 간극을 억지로 봉합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제보다 우월한 정신의 소유자다. 그러나 그들은 정서적 공동체를 갈구한다는 점에서는 열심당원과 동일하다. 그들은 일종의 단계론적인 입장에서, 가치지향과 인물지향에 간극이 생길 때 '새로운 인물지향'을 찾아 떠나간다. 그 대상은 대개 노무현보다 왼쪽에 있다고 알려진 민주노동당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그들에겐 완전히 새로운 환경이다. 거기엔 노빠적 계층구조도 없고, 정서적 동질성도 희박하기 때문이다. 서로간에 물고 뜯는 민주노동당의 정파는 냉담자들에게도 인간이하의 야박한 존재로 비춰지며, 가치지향의 엄밀성은 인간미를 결여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대개의 민주노동당 당원들은 (물론 이것도 편협함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들이 '과거에' 추구했던 노무현이란 인물지향에 대해 사회평균치만큼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 모든 시련을 딛고서 민주노동당이란 새로운 환경에 안착한 사람들도 물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급기야 다시 정서적 공동체를 찾아 노빠로 재전향하고야 만다. 그 이유는 크게 1) 민노당은 나쁜 조직이었다. 와 2) 아직 민노당은 때가 아니다. 로 구별할 수 있다. 



그들 역시 정서를 중시하는 노빠이기 때문에, 떠날 때는 동지들의 감정이 상할까 두려워 텍스트를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반드시 탈당기를 남긴다. 이처럼 소리없이 떠나며 소리내며 돌아오는 냉담자의 존재는 노빠들의 결속력을 약화시키기는커녕 더욱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상한 모자님의 '노빠'는 링크로 대신합니다. (여기를 클릭)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