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이디쉬어에 관한 추억>을 적다 보니 박노자의 저서를 소개하게 됐네요. 그렇다면 여기 곁 가지를 좀더 쳐서 그 이후 적은 글 하나도 올려보겠습니다. 거의 그대로 가져오지만 시간이 지났으니 살짝 수정만 가해서 그대로 올리고자 합니다. 

theacro.com을 제 블로그에 소개하면서  뤼야님의 글을 올린 적이 있어요. 글의 제목은 <박노자,20대, 병맛현상>이었죠. 그 글에서 뤼야님은 박노자의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중,  20대에 거는 박노자의 희망의 글을 가져 옵니다.

…20대들이 더 이상 절망감 이외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사회에서 "본질적으로 다 갈아보자!"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가능성이 높다.(65p); …젊은이들에게 이제는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는 결함투성이의 사회경제적 체제를 가진 대한민국에서 그리스 식 '젊은이 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조직화된 노동계급이 젊은이들과 같이할 수 있다면 이 반란은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306p)
그런데 이런 박노자의 인식을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이나 <해방에 관한 에세이>에서도 찾아볼수 있습니다.

마르쿠제는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사람들이 그 체제에 완전히 종속되어 가면서 더 이상 발전의 동력을 체제를 내재화한 사람들 사이에서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현재에 주어진 필연성을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그리고 불필요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바로 현재에 절망하고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는 룸펜프롤레타리아와 젊은 좌파지식인이었죠. 이 젊은 학생 좌파 지식인이 룸펜프롤레타리아와 동맹한다면 급진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작은 희망이 남아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의 책들이 신좌파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이른바 인기 지식인으로 등극한 그는 <해방에 관한 에세이>에서 신좌파학생들을 혁명의 담지자로  '임명' 합니다. 그리고 그 동반자로 슬럼가의 흑인과 베트콩을 나란히 같은 열에 자리잡아 줍니다(지젝이 어딘가에 발표한 글이 생각나는군요 그는 크메르루즈에 관한 비슷한 글을 적었던가요? 그들의 폭력과 잔인성에 대한 이해를 구하던 글이 있었죠).

결국 마르쿠제나 박노자가 주목한 것은 '절망감' 입니다. 그 절망감이 에너지를 축적하고 마침내는 혁명의 에너지로 터진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박노자는 마르쿠제보다도 더 통찰력이 없어 보입니다. 물론 마르쿠제가 똑똑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자본주의 체제내에 충분히 포섭된 "조직화된 노동계급"이 자본주의를 바꾼다는 것은 조직화되지 않은 룸펜프롤레타리아와 좌파지식인이 일시적으로나마 동맹하여 폭발하는 것보다도 훨씬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 않나요?

언젠가 박노자에 대한 글을 하나 올리고 싶었는데 그냥 이 글은 그 서문정도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박노자는 어딘지 책상물림 지식인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의 지식과 이론으로 세상을 여과시키려고 시도하는 것 같아요.그러나 세상은 결코 그런 모양새대로 가만히 있는 고형물이 아니죠. 세계는 오히려 끊임없이 움직이며 수많은 변수가 동시에 부딪쳐 산란하는 폭포수의 흐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박노자는 자신이 읽은 책의 지식으로 세상을 필터링하면서 그것을 진정한 세계라고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세계는 진정한 세계가 아니죠.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파이프가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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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Rene Magritte>

그러나 르네 마그리트는 그것이 파이프가 아닌 줄 알지만 박노자나 마르쿠제는 자신의 언어를 세계, 혹은 세계의 진실된 반영이라고 믿는 겁니다.

상징계는 결코 실재계가 아닙니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보르매우스의 매듭은 언제나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제가 라캉이나 지젝을 좋아하거나 신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상징계는 언어이고 언어는 결코 실재를 담을 수 없다는 기본적인 사실에 동의한다는 것 뿐입니다.

어쨌거나 마르쿠제나 박노자는 자신이 속한 세계와 자신이 가진 이론이 충돌하는 장면에서 절망을 느낍니다(이론적으로 세상은 진보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처럼 절망한 세대, 계층의 상실감이 다시 에너지로 뭉쳐질 것이라고 내다 봅니다.  절망의 에너지가 다시 희망으로 분출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죠. 그 믿음은 비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비합리적인 믿음이 다시 그의 이론을 완성시켜 줍니다. 절망의 에너지가 폭발하면서 세상의 진보를 가져 오니까요.

순환논리 아니냐구요? 당연히 그렇죠. 그러나 위의 인용문과 마르쿠제의 주장에서 무슨 논리가 필요한가요? 그냥 자신의 믿음을 늘어놓는 것이 중요한 거 아닐까요?

전 물론, 박노자를 좋아하고 그의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가끔 그의 글을 읽으면 조금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위의 인용문 같은 글이 툭툭 튀어나오곤 하니까요.

어디더라? 아마도 <하얀가면의 제국>에서 읽은 것 같은데요. 그는 티벳을 침공한 중국을 비난하면서 티벳의 종교적 제사의 미신성을 비판한 중국학자의 논리를 비난합니다. 티벳의 종교는 합리적이며 그리 미신적이지 않다는 주장을 편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전 이 문제를 전혀 다르게 생각합니다. 티벳의 민중들은 아마도 미신적이었을 겁니다. 근대 티벳을 방문한 많은 인류학자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신앙은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미신을 향유할 권리를 가진 것과 그들이 미신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맥락에 속한 문장입니다. 우리는 전자를 주장할 수는 있어도 후자를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후자를 주장하다가 그것이 팩트와 거리가 먼 것으로 확인 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에 또 다른 문제 역시 놓여 있습니다. 박노자나 마르쿠제는 자신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성과 문명에 이미 길들여진 존재라는 겁니다. 우리의 이성과 문명에 맞지않는 비문명을 볼 때, 우리는 어떻게 주장해야 할까요? 예컨대 여성의 성기를 할례하는 야만적 풍속을 문화적 상대주의로 받아들여야 하나요? 어린이를 죽이거나 학대하는 풍습도 문화적 상대주의에 속하는 것일까요?

지젝이라면 그걸 받아들이자고 주장할지도 모르겠군요. 박노자라면 눈을 감고 그 모든 장면들이 제국주의자들의 왜곡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군요. 스피박이라면, 이 둘은 결국 상위주체의 눈으로 하위주체를 전적으로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이들의 언어로 하위주체의 입은 막혀있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군요.


영화 <디스트릭트9>은 아프리카의 많은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이 영화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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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나이지리안들이 외계인의 신체를 잡아먹으면서 그 안의 주술적인 힘을 끌어내고자 하는 장면입니다.

아프리칸들은 실제로 대단히 미신적입니다. 아직도 그들은 사람이 동물로 변신할 수 있고 무당은 저주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들에게 이러한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은 팩트입니다.  이 팩트가 우리의 문명과 우리의 이성과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하나요?

저들은 실제로 그렇지 않다고 말하거나 저들의 저러한 행위는 그 나름의 합리성이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눈을 감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로 실재을 가리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가 실재를 앞서는 것은 일종의 '증상'입니다. 망상은 실재계와 상징계가 어긋날 때 이를 복구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라캉은 주장했죠. 우리 모두가 어느정도는 망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실재를 가리는 것에 익숙해 있는 겁니다.

아, 다시 말하지만 저는 라캉의 이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저 편하니까 이렇게 멋대로 원용할 뿐입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라캉과 지젝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곧 잠이 오니까요.


가볍게 가볍게 적었지만 이 문제는 그다지 단순하지 않습니다. <슬픈 열대>와 <문화 상대주의>을 대충 읽은 한 영화평론가는 <아포칼립토>에 나오는 인간제물을 문화 상대주의로 이해해애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수천명을 죽여 태양의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를 우리는 문화 상대주의로서 받아들여 그것이 옳다고 주장 해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그들은 미개하니 우리의 이성으로 계몽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할까요?

진보진영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현실의 부정입니다. 그들은 그렇지 않아! 나의 노동계급은 그렇지 않아! 나의 위수동은 그렇지 않아! 많이 보던 장면이지 않나요? 가장 최근 모습은 나의 노짱은 그렇지 않아! 인가요. 하긴 친노를 진보라 할 수는 없네요. 그냥 대중일 뿐이죠.

현실과 이념이 충돌할 때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은 어디일까요? 이념을 돌아보고 수정하고 다시 맞추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론이 현실을 못보게 만든다면 그 이론은 버려야 합니다. 이론은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지 현실을 외면케 하는 눈가리내는 아니니까요. 현실을 가리는 이론은 더 이상 이론이 아니라 교의일 뿐입니다.


P.S. <학문에서의 진영논리>에서 적었지만 학계에서도 이런 일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하나의 이론이 정립되고 주류가 되면 그 이론에 반하는 것은 쉽게 무시됩니다. 그리고 그 주류 이론은 또 당대의 인식이나 주류 사회사상도 반영되기 마련입니다. 이집트학에서 지배종족설은 상당히 오래동안 무시됩니다. 외래 엘리트 종족이 도래하여 이집트 문명을 건설했다? 우선 우생학 느낌이 나는 엘리트 종족이 보기 싫고, 이집트 민중의 자생설을 부정하는 내용도 듣기 싫습니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고고학적 자료가 이를 뒷받침하는 데도 의도적으로 이를 무시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