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피조물의 생명 있지만 무이성적인 부분에 대해서라면, 동물들을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취급하는 것은 그 자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에 훨씬 더 내밀하게 반대되며 그는 이것을 삼갈 의무를 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물들의 고통에 대한 그의 공감을 둔감하게하고 따라서 다른 인간들과의 자신의 관계들에서 도덕에 매우 유용한 하나의 자연적 성향을 약화시키고 점진적으로 근절시키기 때문이다.
[칸트, <윤리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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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근현대의 철학적 아버지이다. 근데 우리 자녀들은 전혀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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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정한 도덕은 이성을 결여한 존재들 (따라서 동물들)은 사물들이고 그러므로 동시에 목적이기도 한 것이 아닌, 한갓 수단으로서만 취급되어야 한다는 명제에 의해 능욕당한다. 그 명제에 일치해서 덕론의 형이상학적 원리 16절에서 칸트는 인간은 인간 외의 존재들에 대해서는 어떤 의무도 지지 않는다'고 명시적으로 진술한다. ... [칸트에 따르면] 연습을 위해서만 우리는 동물들에게 공감해야 한다. 동물들은, 말하자면, 인간들에 대한 공감을 연습하기라는 목적을 위한 병리적 환영이다. 이슬람 (즉, 유대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아시아 전체와 공히 나는 그러한 명제를 구역질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느낀다.
[쇼펜하우어,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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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는 얼핏 매우 고귀!!해 보이는 칸트의 주장이 구역질나고 혐오스럽단다. 하긴 칸트는 '우리 인간은 양한테 니 가죽은 네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거덩'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 인간이다. 그러나 그 칸트조차도 현대식 고기공장 앞에서는 질겁을 할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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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흔히 접하게 되는 주장, 즉 야만인들, 흑인들, 일본인들은 동물, 예를 들어 원숭이 같다는 주장은 이미 유대인 학살의 열쇠를 담고 있다. 유대인 학살의 가능성은 치명적 상처를 입은 동물의 시선이 인간에게 던져지는 순간 결정된다. 저건 동물일 뿐이야 라고 무시하며 인간은 그러한 시선을 뿌리치는데, 그러한 무시는 인간들에게 자행되는 잔인한 행위들에서 부단히 되풀이 된다. 잔인한 행위를 하는 이들은 동물들에 대해서도 그것을 결코 완전히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저건 ‘동물일 뿐이야’라는 것을 거듭 되풀이해서 자신에게 확신시켜야 한다.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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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는 틀렸다. 우리 현대인들은 동물들을 조금이라도 동물들일 뿐이지는 않은 것으로 믿기는커녕 동물들은 돌맹이들과 다름없다고 '완전히'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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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적 감정이 풍부한 분들은 안들어가시는 것이 좋다.

돼지의 일생
http://kjart007.tistory.com/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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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는 고기이기 이전에 감수성을 가진 동물이다. 고통을 느낄 줄 안다. 그런데 철창 속에 갇혀 지칠 대로 지친 암퇘지에게 27마리의 새끼를 낳으라고 다그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금 아프기라도 하면 왜 치료할 생각은 하지 않고 곧바로 죽여 버리는가? 새끼 돼지는 왜 마취도 하지 않은 채 거세를 하는 것인가? 21일도 되기 전에 왜 새끼 돼지들을 가차 없이 젖을 떼게 하는가? (식육으로 쓰기 위해 생후 6개월에 도살하는) 비육돈들은 왜 어둡고 악취 나는 곳에 가둬 기르는가?” 


* http://blog.daum.net/soopsogyeoubi/6 에 소개된 책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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