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따뜻한 어느 분이 몬스터와 우라사와 나오키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몬스터를 읽은 지 이미 오래되었고 딱히 우라사와 나오키에 대한 남다른 지식도 없는 형편이라 좋은 글을 쓸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부탁은 거절할 재간이 없다. 예를 들어 Dr. 덴마가 부탁한다면 우리는 누구라도 그의 부탁을 들어 줄 수밖에 없다. 그의 눈은 따뜻하고 진지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는 언제나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에게 말을 걸기 때문이다.


황량한 세계에서 따뜻한 눈빛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게 된다. 내가 기꺼이 이글을 쓰는 것도 전 세계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에 열광하는 것도 어쩌면 같은 이유일 게다.



1. 황량한 벌판 위에 서있는 두 인간

 

                         


요한 리베르또가 보고 있는 세계의 풍경이다. 그가 보는 세계는 황량한 벌판, 시들어 말라서 죽은 나무 몇 그루, 그리고 먼지 자욱한 지평선이 버티고 선 곳이다. 이 차가운 벌판에 사람은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다.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소통의 단절만이 차가운 바람처럼 휭휭 소리를 내며 세계를 채우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이 황량한 벌판에 선 채로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조종한다. 그들의 삶에 의미를 가진 기억을 통해 그들의 영혼을 자신의 진공으로, 자신이 가진 허무의 벌판으로 빨아 들인다. 그리고는 종국에 그 벌판에 선 채, Dr. 덴마와 마주한다. 자신의 허무를 끝내주기를 소망하며.


그때 덴마는 요한의 ‘마지막 풍경’에 기꺼이 동참한다. 그래서 요한의 황량한 벌판에는 이제 두 인간이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허무의 주인인 요한과 허무의 종결자 Dr. 덴마가.


요한의 허무는 종결된다. 그러나 요한이 원했던 식의 종결은 아니었다. 요한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허무를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마지막 풍경에 덴마가 서는 순간, 그 풍경은 이미 마지막 풍경일 수 없다. 허무로 점철된 세계는 따뜻한 가슴의 인간이 들어서는 순간에 이미 사라지기 시작하는 까닭이다. 덴마가 지니고 있는 ‘삶의 의미’가 마지막 풍경을 물들이기 때문이다 . 화선지에 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무채색의 세계에 갖가지 색깔의 ‘의미’가 번진 것이다.


요한이 보고 있는 세계, 그 마지막 풍경은 세상의 ‘실존’이다. 고독한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 진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상태를 ‘피투성皮投性’이라고 표현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세상의 의미들, 기호들은 실제로는 무의미한 것이다. 돈? 권력? 직위? 사회? 도대체 이런 것들의 의미가 무엇이란 말일까. 심지어 철학, 종교, 그리고 종교적 구원이라는 대량생산되고 소비되는 관념의 마취제도 실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찰해보면 우리는 곧 알게 된다. 의미 없음의 사막에 우리들은 내던져진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인다. 자신의 진공으로부터 만들어진 가짜 물약을 주사해 사람을 조종한다. 어차피 무의한 것이 삶의 본질이라면 어떤 행위도 무의미할 뿐이다. 선이 가짜이듯이, 악도 거짓일 뿐이다.


그러나 요한은 알지 못한다. 왜 보통인간은 그럼에도 삶을 행복으로 받아 들이는지. 맛있는 한조각의 빵을 먹고 행복에 젖고, 아이의 웃음에서 기쁨을 느끼고 친한 친구의 죽음에서 슬픔을 느끼는지.


덴마는 본능적으로 삶의 의미를 알며 창조하는 인간이다. 그에게 삶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기투(Entwurf)’다. 허무라는 질료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 소외되는 인간관계를 끊임없이 ‘나’와 ‘너’라는 인간적인 관계로 전화시키는 행위, 고독과 무의미한 세계를 사랑과 슬픔, 분노와 기쁨으로 채워넣는 행위, 덴마는 매 순간 존재의 형태를 의미의 창조로 바꾼다. 그는 기꺼이 삶의 무의미를 껴안고 자신의 힘으로 의미를 채워 넣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요한의 허무를 껴안는다. 요한이 바라보는 세상의 실존, 허무의 벌판 안에서.




2. 나오키의 미시적 휴머니즘 - 음식, 소풍, 어린이, 맥주 혹은 일상의 휴머니즘


나오키가 풀어가는 이야기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휴머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오키가 강조하는 휴머니즘은 표현방식이 좀 색다르다. 읽은지 한참 되는 나오키의 작품에서 떠오르는 장면은 스치듯 그려가는 일상의 장면 장면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행복해져요. 덴마는 맛있는 그 독일식 샌드위치인지 햄버그를 먹으면서 정말로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몬스터의 그 복잡한 설정과 등장인물을 잊을지라도 나는 그 독일빵의 모양을 잊을 수 없다.


해피의 주인공 미유키는 어떤가? 척박한 삶 가운데에서도 식은 카레를 맛나게 먹는 법을 아는 열혈소녀다. 형편이 풀리면 멋진 이태리식 요리를 할 줄도 안다. 그녀가 만든 음식을 먹으면 그녀의 행복하고 따뜻한 마음에 전염되는 것이다.


마스터키튼을 생각하면 폭탄 테러범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읽은 지 가장 오래 된 작품이라서 다른 스토리는 흐릿하지만 이상하게 폭탄 테러범의 이야기는 잊을 수가 없다. IRA요원(이라고 생각된다)인 폭탄 테러범이 마음을 돌리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공원에서 만난 한 노인의 평온한 죽음이었다.


삶의 가치가 평범한 일상에 있을 수 있다는 것. 죽음을 넘나드는 격한 드라마 속에서도 인간이 찾는 삶의 가치는 맛있는 한 끼 식사에 있을 수 있다는 것. 우라사와 나오키가 설명하는 휴머니즘은 그런 것이다.


언젠가 실습 나온 후배들과 자유 토론을 하던 중 한 후배가 물었다.


“선배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삶이 뭐죠?”

“글쎄, 난 뭐 거창한 것을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 퇴근하다가 해지는 노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바람이 불면 뺨에 바람을 느껴보고, 골목길에 앉아 있는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 그런 게 가치 있는 것 아닐까? 사실 삶은 그런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잖아. 그런 순간들이 가치 없다고 생각한다면 삶의  70%가 무의미해져 버리는 거잖아. 삶이 가치 있는 것이라면, 매 순간이 가치 있는 거 아닐까?”


우리의 일상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라면, 혹은 일상의 삶에서 기쁨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면 삶의 의미를 이미 잃어버린 것이다.


일전에 올린 일본 감동의 일본CF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키유키의 6년의 삶, 그리고 그가 떠나고 남은 부모의 슬픔, 그러나 그 부모는 가장 행복한 순간의 기억으로 아키유키와의 보낸 6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아키유키가 없었다면 결코 깨닫지 못했을 것들에 대해서 아키유키에게 감사한다. 그가 깨달은 것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순간이 아름답고 의미 있다는 것 아닐까.


매 순간을 가치 있게, 삶의 순간순간을 풍요롭게....... 우라사와 나오키(혹은 스토리작가)가 역설하는 휴머니즘은 그런 것 아닐까?



3.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몇 가지 것들.......


나는 우라사와 나오키를 좋아한다. 그의 만화는 읽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잠시라도 세상은 참 좋은 곳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비록 살육이 판치고 음모가 난무하는 세상을 그리더라도 그곳에는 역시 인간이 살고 있고, 더구나 그 인간은 따뜻하면서도 강해서 주어진 가능성 내에서는 가장 멋지게 마무리 해 준다. 누군들 그의 세계를 외면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야와라를 읽을 때에도, 해피를 읽을 때에도 심지어 키튼이나 몬스터를 읽을 때에도 마음 속에 내내 걸리는 몇 가지 것들이 있었다. 나오키가 그리는 세계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느낌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이 그리는 세계를 마음대로 묘사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희망이 가득한 세계를 그린다. 그러나 난 그의 세계에서 오히려 희미한 ‘절망’의 그림자를 느낀다. 그 희미한 느낌이 아마도 그의 작품에서 느낀 불편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가 그리는 여성캐릭터의 성격은 19세기 미국 여성작가가 그리던 ‘열혈 명랑 소녀 행복쟁취 스토리’의 전형적인 주인공의 그것이다. 사회가 급변하던 그 시절, 착취와 불행, 부와 극빈이 교차하던 그 변혁의 시대에서 일군의 여성작가들은 오로지 낙관성과 착한 성품만으로 뭉친 여성 캐릭터를 내세워 세상이라는 것은 이렇게 착한 마음만 있으면 성공한다는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를 전파했고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녀들이 그려낸 희망과 사랑, 인정이 가득한 <플레젠트빌>은 사실은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감춘 인위적인 세계였다. 민중은 그 인위적인 마취제를 읽으면서 사실은 자신이 못나고 착하지 못해서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현실을 외면했던 것이다.


물론 나오키의 작품이 결코 당시의 미국소설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가 그리는 리얼리즘이 개연성 없다는 말도 아니다. 그러나 나오키월드의 리얼리즘은 스토리작가의 엄청난 디테일과 자료조사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캐릭터의 성격과 갈등은 청소년만화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지닌 불굴의 인정, 사랑, 휴머니즘의 보노라면, 혹은 작위성 마져 느껴지는 강도 높은 휴머니즘을 보고 있노라면 리얼월드의 절망이 오히려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다. 조금만 더 현실성 있는 캐릭터, 조금만 더 현실성 있는 휴머니즘을 이야기한다면 나오키의 세계를 아무런 불편함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책을 덮고 나오키 월드를 떠나면서 마음껏 행복할 수 없는 것은 그 아쉬움때문이다.




위에서 대략 설명했지만 나오키는 휴머니즘을 두 가지 방법으로 형상화 한다. 하나는 내가 전적으로 찬성하는 방법으로서 미시적인 휴머니즘이다. 그의 작품이 아름다운 물고기라면 그가 형상화한 미시적인 휴머니즘은 물고기에 촘촘히 박혀 햇살을 반사하는 찬란한 금비늘같다. 그래서 설사 작품의 내용을 잊어버린다고 해도 그 빛나는 햇살의 편린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조각처럼 가슴에 박혀버린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방법은 과장된 주요 캐릭터의 묘사와 그에게 동조하는 조연들을 통한 인위적인 휴머니즘이다. 이 부분이 내게는 좀 불편하다. 어쩌면 나오키는 세상에 만연한 절망과 물질주의를 향해 휴머니즘을 외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강하게 제련되고, 더 뾰족하게 날 선 휴머니즘을 던져 보는 것이다. 그가 만든 아름다운 물고기가 가끔 흐린 물  속을 헤엄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부분 때문이다.


나오키는 잊고 있다. 절망을 절망으로 표현할 때 희망이 피어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은근하고 차분하게 빚어내는 절망 속에서 독자가 스스로의 희망을 일굴 수도 있다는 것을.


그의 내공이라면, 충분히 그런 휴머니즘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느껴지기에 내 아쉬움이 더 큰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은 이미 청소년만화의 경계를 넘어섰다. 문학을 넘어서는 상상력과 디테일묘사, 그리고 플롯. 여기에 조금만 더 설득력 있는 캐릭터를 요구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나오키 월드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이 보다 찬연한 것으로 도약하기를 기다려 본다. 한결같은 것이 미덕일 수는 있지만 창작의 영역에서는 매너리즘일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