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은 진영논리에서 자유롭나?


먼저 리차드 도킨스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일전에 나는 도킨스의 신학비판에대한 비판성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나는 도킨스의 이론에 찬성하지만 그가 지닌 사회적, 정치적 시각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계층적, 혹은 계서적 환원주의(hierarchical reductionism)라는 단어 자체가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주장하는 계층적환원주의라는 용어는 실제로는 환원론적 방법론이라는 말과 대동소이한 말이다. 그는 아마도 많은 비이공계전공자들이 환원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여 이공계전공자, 특히 생물학전공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사회생물학, 혹은 진화심리학을 공격하는 것에 맘 상했을 것이다. 그 분노가 환원주의자체에 대한 옹호로 나타난 것이 저런 다소 부정확한 용어의 창조라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나는 도킨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글에서 잠시 도킨스, 혹은 도킨스의 진영를 변호하고자 한다. 도킨스는 많은 사회생물학자들과 더불어 학계의 진영주의로부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학계에도 진영주의는 만연하고 있다. 유명하고 유능한 학자라고 해서 자신의 이름값만큼 진영주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스티븐 핑커가 저술한 <빈서판>에 나오는 내용을 발췌해서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헤른슈타인과 윌슨의 케이스

1971년, 헤른슈타인은 “사회적 지위가 인종, 가문, 유산 같은 임의적 유산에 의해 약하게 결정될수록 재능, 특히 (현대경제에서)지능에 의해서는 그만큼 강하게 결정될 것”이라는 다소 평범한 주장을 학술지에 실었다. 지능의 차이는 부분적으로는 유전의 문제고 지적인 사람은 지적인 사람과 결혼하는 경향성이 크므로 사회는 유전적 계통에 따라 계층화 될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이었다.


이 주장은 개연성의 문제이고 근거로 삼은 팩트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지능이 부분적으로는 유전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이야기 아닌가. 그러나 이 주장은 ‘급진적 학자’들에 의하여 마치 인종간의 지능의 차이는 선천적인 것이라는 이야기로 와전된다. 정신과 의사인 앨빈 푸생은 “헤른슈타인이 흑인의 적이 되었고, 그의 선언은 미국 내 모든 흑인의 생존을 위헙한다”는 선언을 한단다. 게다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깃발을 헤른슈타인을 위해 우리가 계속 들고 있어야 하는가?”라는 선동을 하기까지 한다. 어디서 많이 보던 수법이다.


헤른슈타인은 살해 위협을 받았고 온갖 시위와 야유 속에서 더 이상 강의를 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다.


스티븐 핑커는 다시 윌슨의 예를 든다. E. O. 윌슨은 <사회생물학 Sociobiology>를 발표하며 의사소통, 이타주의, 언어, 도덕관념 등이 자연선택으로 형성된 인간본성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가설을 발표한다. 이 주장은 즉시 “사회진화론”의 아류로 왜곡되기 시작한다. 살린스는 사회생물학은 초유기체학설에 대한 도전이자(이건 당연히 도전받아야할 이론 아닌가? 주체사상이 결국은 뒤르켐과 크로버를 기반으로 해서 막시즘과 레닌을 범벅하여 전도한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 같다) 문화 그자체의 완전함, 인간고유의 상징적 창조물에 도전하고 있다면서 뻥을 친다.


살린스는 기본적인 논리마저 왜곡한다. 해밀턴의 친촉을 희생하는 경향이 유전자의 복제를 돕는 것이라고 설명하자 살린스는 그 과정에서 유전자의 비율이 분수형태로 줄어드는 것에 착안해서 대부분의 문화에서 분수를 나타내는 문화가 없으므로 그게 사실일 리 없다고 주장한다. 촌수를 계산 할 수가 없어서 어느 친족에게 어느 정도 호의를 베풀어야 할지 알 수 없단다. 어이없다. 스티븐 핑커는 이런 어이없는 오류에 대해서 이렇게 답한다. “입체시에 필요한 삼각법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은 거리를 지각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윌슨의 주장에 반대하기 위해 윌슨을 유전자 결정론자로 만들어 버린다. 윌슨을 그대로 인정하면 인간사회가 ‘우생학적 계급사회’로 될까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의 두려움이야 말로 학문에 대한 심각한 폐해를 가져온다.


도킨스의 경우

리저드 도킨스는 엄청난 베스트셀러 <이기적인 유전자>를 발표하며 사회생물학, 혹은 진화심리학을 대중화시키는 데 공헌했다. 앞서 설명했다시피 도킨스는 계층적 환원주의를 주장하면서 자신에 대한 비판을 피하고자 했다. 그 이유는 리언 카민이 다음과 같이 주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생물학은 인간 존재에 대한 환원주의적, 생물학적 결정론에 입각한 설명이다. .....현재와 과거의 사회제도가 안고있는 세부적인 면모들이 특정한 유전작용의 불가피한 발현이라고 주장한다. - <우리의 유전자에는 없다>


그러나 물론 도킨스가 그렇게 무식한 주장을 할 리가 없다. 오히려 도킨스는 인간의 생활방식이 유전자보다는 문화에 결정된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설명하고 있다. 유전자는 경향성과 확률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 어떤 유전자도 결코 결정인자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은 거의 상식이다. 그러나 대중은 이런 상식이 없으므로 저런 선동은 언제나 제대로 먹히기 마련이다.


제임스 닐과 나폴레온 샤농의 케이스

스티븐 핑커가 소개한 사례 가운데 아마도 가장 충격적인 사례가 이 것일 것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헌신적이고 성실한 인류학자 두명을 몬도가네에 나올법한 사악한 백인 탐험가로 만들어 버렸다. 농담이 아니라 터너와 스폰셀이라는 두 인류학자는 닐과 샤농이 콘래드의 “어둠의 심장”에 나오는 악당이라는 글을 직접 발표했다. 닐과 샤농은 아마존의 야노마뫼부족에게 홍역을 퍼뜨리고, 유전이론을 실험하기 위해 치료를 늦추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닐을 비난한 이유는?

닐과 샤농은 이 아마존의 원시부족이 잦은 전쟁을 하고 학살을 일삼고 그렇게 살인을 많이 한 남자가 더 많은 아내를 가지고 있다는 데이터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런 “왜곡”된 데이터를 제시하는 이유는 파시즘적인 우생학을 퍼뜨리고 이를 통해 베네주엘라 정치인들이 이들 부족의 지역을 개발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이 성실한 과학자였고 이들 부족에 창궐한 전염병을 막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로 수백명의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비난이 날조되었으며 근거가 없는 것이었고 이들 학자와 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선교단의 지배하에 있는 부족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어이없는 왜곡과 선동들

이들은 모두 반대진영의 공격으로 인하여 부당하게 왜곡당하고 공격당했다. 진영주의의 또하나의 특징은 선동이다. 닐과 윌슨, 그리고 “급진주의자”에게 공격당한 또 한명의 사회생물학자인 트리버스는 모두 파시즘이나 정치적 우파가 아니었으며 당연히 우생학의 지지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닐은 우생학을 끊임없이 비판했으며 트리버스는 심지어 블랙팬더의 후원자였다. 그러나 이들이 강의실에 들어서면 확성기를 틀어대며 이들을 인종주의자며 파시스트라고 외치고 물을 뿌리는 학생들에 둘러 쌓여야 했다. 하버드에 다녔던 그 학생들은 안타깝게도 윌슨과 닐이 직접 쓴 논문을 읽어보지도 않았다. 반대진영의 비판글만을 읽은 그들의 눈에 윌슨은 파시스트이자 인종주의 괴물로 보였을 것이다.


진보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진보를 주장하기 위해 왜 사실을 왜곡하고 상대를 괴물로 만들어야 할까? 더구나 학자라는 양반들이 왜 학문적 결과까지 왜곡해야 했을까?


진영주의에 빠져드는 심리적 이유가 있을 것이다. 스티븐 핑커는 두려움과 혐오감을 꼽는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두려움일까? 핑커는 자신의 “교의”가 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위에서 온건한 학자들을 공격한 급진적인 학자들은 자신들의 학문이 실상은 ‘선험적’인 교의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교의에 조금이라도 흠이 날 것같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이 왜 이런 두려움에 빠지는지, 혹은 왜 이데올로기를 교의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더 자세하게 파고들면 흥미로울 것이다. 어쩌면 그 심리적 고찰은 학문에서 뿐 아니라 진영논리 자체에 대한 가설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진영주의의이 심리학에 대한 가설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