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아래 글의 <version 0.2>를 위한 초고다.

 

「운전자들은 왜 안전 거리를 지키지 않을까?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3fZ/283

 

 

 

프로이트는 의식보다 무의식이 더 큰 힘을 발휘할 때가 많다고 이야기했다. 여기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초보 운전자는 숙련된 운전자에 비해 차간거리를 더 크게 유지하면서 천천히 운전한다. 왜냐하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운전 경력이 쌓이면서 차간거리는 점점 좁아지고 속도는 점점 높아진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네비게이션이 단속 카메라가 있다고 알려주는 곳에서만 속도를 줄이고 시속 100km 이상으로 달리면서도 차간거리는 30m 정도만 유지한다.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안전거리인 “100m 이상”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차간거리다.

 

전문가들이 시속 100km로 달릴 때 100m 정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위험을 인지했을 때부터 브레이크를 작동하기 직전까지 달리는 “공주거리”에 브레이크를 작동하는 순간부터 정지하기 직전까지 달리는 “제동거리”를 합한 “정지거리”가 100m 정도 되기 때문이다.

 

 

 

운전 실력이 아무리 늘어도 브레이크의 성능에는 전혀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엔진 브레이크, 풋 브레이크, 사이드 브레이크를 아무리 잘 조합해서 조작해도 한계가 있다.

 

운전 실력이 아무리 늘어도 반응 속도는 사실상 똑 같다. 따라서 공주거리가 운전 실력으로 줄어들지는 않는다.

 

바로 앞 차만 보지 않고 자신의 차선에서 달리는 앞의 다섯 대 정도를 보는 일은 운전을 조금만 해 봐도 다 할 줄 안다. 그 다음부터는 운전 실력이 아무리 늘어도 공주거리가 줄어들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시속 100km로 달릴 때 안전거리를 100m 이상 유지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주거리와 제동거리에 대해 어느 정도 생각해본 운전자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이 의식적 지식이다.

 

 

 

온갖 종의 동물에게 위험 인지 기제가 진화한 것 같다. 위험을 느끼면 불안해지거나 공포에 떤다. 각 종에 따라 위험을 느끼는 대상이나 상황이 다르다. 같은 포유류라 하더라도 물보다 무거워서 수영을 할 수 없는 침팬지는 물을 매우 두려워하지만 물에서 사는 돌고래는 물이 없는 곳을 두려워할 것이다.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인간의 위험 인지 기제가 어떤 식으로 생겼는지 상세하게 아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다만 몇 가지 추측을 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을 비롯한 여러 동물이 위험해 보이는 새로운 것을 보거나 경험하게 되면 불안해한다. 그러다가 여러 번 보거나 경험해도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으면 점점 더 안심하게 된다. 그런 경험이 쌓일수록 불안이 점점 줄어들어서 결국에는 완전히 안심하게 된다. 이것은 잘 설계된 위험 인지 기제 때문인 것 같다. “여러 번 해 봤는데 아무 일이 없으면 안심하라”는 상당히 훌륭한 알고리즘이다.

 

고속으로 운전하면서 차간거리를 30m 정도만 유지하는 것이 처음에는 불안하지만 그런 식으로 운전해도 위험한 일이 전혀 생기지 않으면 불안은 점점 줄어든다. 운전 경험이 쌓일수록 차간거리를 30m 정도만 유지하면서 운전하는 경험도 쌓인다. 위험한 일이 전혀 생기지 않으면서 그런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30m 유지하면서 고속으로 운전하기”에 대한 불안감은 점점 줄어든다. 그리하여 결국 아무런 불안도 느끼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 같다.

 

 

 

“운전 경력이 아무리 쌓여도 공주거리와 제동거리를 어느 한계 이하로 줄일 수 없다”라는 명제는 과학에 바탕을 둔 의식적 지식이다. 반면 인간의 무의식적 위험 인지 기제는 “이런 식으로 30m만 유지하고 운전을 아주 많이 했는데도 위험한 일이 전혀 생기지 않았으므로 이런 운전 행태는 안전하다”라는 식으로 “결론” 내리는 것 같다. 그리고 의식적 지식과 무의식적 지식이 충돌할 때 무의식적 지식이 승리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않은 것 빼고는 자신의 잘못이 전혀 없는데도 앞에서 난 사고 때문에 고속도로에서 추돌 사고를 당한 사람의 경우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런 사고를 당한 운전자나 동승자는 다음부터는 안전거리 확보에 훨씬 더 신경을 쓸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체계적 연구를 통해 확인해 보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자신이 그런 추돌 사고를 당했다고 해도 미래의 추돌 사고 위험율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 이것은 자신이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해도 앞으로 복권에 당첨될 확률에는 전혀 변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전을 열 번 던졌을 때 모두 앞면이 나왔다고 해도 다음 번에 앞면이 나올 확률은 정확이 50%.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위험 인지 기제의 “판단”은 다를 것이다. 갑자기 안전거리 미확보가 위험한 것으로 느껴진다.

 

 

 

과학에 바탕을 둔 정확한 의식적 지식이 진화한 위험 인지 기제의 무의식적 작동에 굴복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비행에 대한 불안이 그 한 예다. 통계적으로 볼 때 자동차 여행보다 비행기 여행이 훨씬 더 안전하다. 하지만 높은 곳을 두려워하도록 진화한 인간은 비행기를 탈 때 더 불안해한다.

 

 

 

만약 위에서 제기한 나의 설명(다른 학자가 이미 이런 설명을 제시한 적이 있을 것 같지만 적어도 나는 본 기억이 없다)이 옳다면 어떤 실천적 방안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첫째, 30m만 유지하면서 달릴 때 느끼는 안정감이 진화한 위험 인지 기제의 작동 때문이며 그런 기제들이 “엉뚱한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는 방법이 있다. 본능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것이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둘째, 추돌 사고 시뮬레이션을 통해 위험 인지 기제를 작동시켜서 겁을 먹도록 만드는 방법이 있다. 컴퓨터를 이용한 가상 현실을 통해 아주 실감나게 추돌 사고를 재현할 수 있다면 정말로 사고가 일어난 것으로 위험 인지 기제를 속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사람들은 불안감 때문에 안전거리를 확보하면서 운전하려고 할 것이다.

 

 

 

이덕하

2012-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