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대평가, 허드레문학... 다 좋다. 그런데 난 하루키문학 비평을 정말 단 한번도 공감하면서 읽은 적이 없다. 비평도 좋고, 비난도 좋다. 칭찬도 좋고 찬사도 좋다. 좋은데, 좀 설득력있고 깊이있는 비평이 있어야 읽는 재미가 있을 거 아니냔 말이다. 일본도 별 다를 바가 없는 거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 1Q84 를 말하다>라는 책 역시 마찬가지다. 얄팍하기 그지 없고 온갖 미시적인 파트를 언급할 뿐 하루키 문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한계가 무엇인지를 설득력있게 제시하지 못한다.

이번에는 동아일보 기사를 한번 보자. 제목부터 거창하다. <3권까지 식지 않는 ‘1Q84’ 열풍의 실체는…평론가 2인 지상논쟁> 그리고 그 내용은? 허망하다. 읽을 거리 하나 없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이름을 달고 지상논쟁이라고 내놓은 글의 내용은 하루키문학의 상상력이 위태롭다고 말하는 것이 어이없이 느껴질 만큼 위태로운 독해력을 보여준다.

" 현대인의 고독과 고립이라는 문제도 한국 독자들이 깊이 공감할 만큼 보편화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NHK 수신료 문제가 일본에서 종종 이슈가 되는 것은 맞지만 이것이 작가가 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릴 만큼 심각한 ‘미시사’일까"

이건 농담인 걸까? 현대인의 고독과 고립이 보편화된 주제가 된 지는 좁게 잡아도 반세기는 지났으리라 짐작된다. 게다가 도대체 이 교수님은 하루키 문학을 제대로 읽어 보기는 한 것일까?

하루키 작품에서 NHK 수신료가 과연 "집요하게 매달릴 만큼 심각한 미시사"이기 때문에 반복되어 나오는 것일까? 하루키가 사용하고 변주하는 대부분의 소재는 메타포이고 심볼리즘이라는 것은 하루키 독자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진실이다. 이 은유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 혹은 심볼이 적확하게 작동하는 것인지 논하는 것은 독자의 자유다. 하지만 그 상징 자체를 미시사로 읽는 것은 정말이지 곤란하다.

하루키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시스템과 그 시스템에 종속되어 가는 개인이다. 그렇다면 NHK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1Q84는 조지오웰의 <1984>에 대한 오마쥬다. 그리고 조지 오웰은 1984년의 디스토피아를 벽마다 달려 있는 모니터로 상징했다. 물론 실제 우리가 살아낸 1984년에는 벽마다 모니터가 달려있지 않다. 다만 집집 마다 혹은 방마다 TV가 있고 정부라는 더 큰 조직에 기꺼이 편입된 개인은 자기 아들을 데리고 집집마다 수신료를 데리러 다닌다. 개인의 영혼에 대한 조직의 장악은 너무나 강해서 어떤 수금원은 혼수상태에서 생령(生靈)이 되어 아파트 현관문을 두드리며 수신료를 내라고 요청한다. 탁! 탁! 탁!

하루키가 NHK를 등장시킨 것은 <1Q84>가 처음이 아니다. <태엽감는 새>에서도 주인공이 보는 것은 늘 NHK였다. 뿐만 아니라 현실의 세계와 저쪽 세계-현실을 반영하거나 혹은 현실을 창조하는 것으로 보이는 환상의 세계-를 이어주는 것도 NHK방송이었다. 주인공은 그 세계에 가서도 NHK방송 뉴스를 보는 것이다.

하루키에게 NHK가 상징하는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이야기는 풍성해진다. 그리고 비판의 착지점은 올바른 위치를 찾게 된다. 하루키의 아버지가 실제로 중국침략에 차출되어 출병한 군인이었다. 그리고 군국주의라는 벽에 부딪쳐 깨어진 작은 "계란"이었다. 그리고 덴고의 아버지 역시 만주에 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기꺼이, 큰 기쁨을 안고 일본 NHK의 조직원으로 입사한 인물이다. 전후 일본 정부는 군국주의는 버렸지만 정권과 정부와 NHK가 "시스템"이라는 것은 변함 없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국적과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여 개인들이며 시스템이라는 단단하고 높은 벽과 마주하고 있는 깨어지기 쉬운 계란"이라는 것이 하루키의 인식이다.

그가 가진 약점은 현실과 부딪치는 접점을 늘 모호하게 처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루키가 가진 문학적 한계이자 그가 가진 철학적 한계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에게 세계는 결코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선호"하여 진실에 대한 조명을 일종의 메타포로 풀고자 한다. 어쩌면, 그의 말이 진정으로 옳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지 답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모두 "세계가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는 누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칭한 메타포가 과연 적절한 것일까? 그의 소설 전반에 드러나는 허무와 고독과 고립이 세상의 진정한 모습일까?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많은 말들을 주고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으로서 하루키문학의 한계에 대하여 진지하게 응하는 하루키 비평가는 누구인가?

하루키의 문학은 얄팍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얄팍하고 허드레문학은 하루키에 대한 우리의 비평일지도 모른다. 참을 수 없는 비평의 얄팍함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