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토론을 통해 정신분석학은 과학은 아니라고 판명났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정신분석학은 과학이라고 씁니다.

어느 누구도 알아 듣지 못 할 "자기중심적 독백(egocentric monologue)"을 하면서 말이죠. 정신분석학은 과학이다라는 독백을 하면서 말이죠.

마치 어린 아이가 어른은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을 스스로에게 하듯이, 그리고 어른은 알아 듣지 못하는 아이들끼리의 대화처럼 말이죠.아동 심리학자인 피아제는 전자의 경우 뿐만 아니라, 후자의 경우도 독백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이렇듯 어른은 알아 듣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언어를 피아제는 "자기중심적 독백"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의 언어가 독백이겠습니까? 24개월 된 아이가 하는 말이 발음이 부정확한 경우 혹은 생소한 문법과 어휘를 쓰는 경우, 몇 번을 물어서라도 무슨 말인지를 물어야하죠. 내가 들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에는 아이에게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는지 되물어 보고, 확인을 해야죠. 무엇보다 피아제가 독백이라고 하는 아이의 언어는 나름의 질서와 체계를 가지고 있죠. 아이 스스로가 자신이 이해되지 못 한다는 사실에 답답해 하면서도, 자신을 이해시키려는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자신의 언어가 어른에게 이해되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아이가 보이는 반응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내보이는 환희와는 또 다른 환희이죠.

어른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고 아이의 언어를 독백이라고 치부한다면, 그 어른은 아이를 키우는데 꽤 애를 먹을 겁니다. 아이가 어른의 언어를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만큼, 그보다 덜도 아니고 더도 아니고, 꼭 그만큼만이라도 어른은 아이의 언어를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죠. 그래서 라캉은 "이 [아이의] 자기중심적 언어는 훌륭하게 귀담아 듣는 사람을 위한 찬가의 경우에 속한다"(This egocentric discourse is a case of hail to the good listner!)라고 말합니다.

라캉은 피아제가 "자기중심적 독백"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나의 "대화"라고 부릅니다. 정신분석학적인 용어를 쓴다면, "대타자와의 대화"가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아이의 언어는 언제나 누군가를 향합니다. 언제나? 예, 언제나. 심지어는, 어른의 눈을 바라보지 않으면서, 시선이 땅을 향하는 순간에도... 어른이 자신의 언어를 알아줬으면 하는 마지막 절망의 순간에도, 아이의 언어는 언제나 누군가를 향합니다. 어른의 언어를 흉내내면서, 어두운 곳에 숨어 어른의 언어를 자신 스스로에게 끊임 없이 되뇌면서...

저는 어린 아이의 언어에 대해 "자기중심적 독백"이라고 말하는 주류 심리학과 "대타자와의 대화"라고 말하는 정신분석학 중에서 무엇을 "과학"이라고 불러야할지 알지 못합니다. 당연히 전자가 과학적이겠죠. 어른의 세계에서는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여 "자기중심적 독백"이라고 치부되는 아이의 언어를 배제하였으니, "과학"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비과학적인 것을 싹둑 잘라버렸으니 말이죠. 저는 정신분석학을 이런 주류의 과학에 대항하는 것으로서 이해합니다. 전에도 썼듯이 "대항과학(counterscience)"이라고 말이죠.

정신분석학의 역사가 보여주듯, 정신분석학이 과학으로 인정되어 주류 과학에 편입이 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정신분석학의 죽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는 역으로, 정신분석학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과학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정신분석학의 운명입니다. 물론, 이런 저런 개념들이 주류에 편입될 수는 있을지언정...

물론, 피아제의 아동 심리학은 심리학의 진화와 더불어서, 비판받고 보완되어왔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예에서 보여지는 주류 심리학의 과학적 전제는 여전하다는 생각입니다. 즉, 이해될 수 없는 어떤 것, 알려질 수 없는 무의식이라는 것은 과학이 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정신분석학의 운명입니다.

그래도 저는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할 것같은 말을 되풀이 합니다. 그것이 저의 운명이기도 하니까요. 정신분석학은 과학이다... 정신분석학은 과학이다... 정신분석학은 과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