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의 "자유"와 리버태리안의 "자유"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전자의 자유는 경제적 영역에서는 최대의 자유, 복지국가의 축소를 외치면서도 우파적인 경찰국가화, 군사국가화에 대해서는 중립적이거나 때로 찬동하기도 한다. 자유의 확대와 복지의 축소를 내걸었던 레이건 정부는 사상최대의 국방비를 미-소군비 경쟁에 쏟아부었고, 부시 정부는 자유의 세계적 확산이라는 명목아래 미국 국내의 자유를 억압했다. 결국 신자유주의에서의 자유란 재산권 절대주의의 다른 이름이고, 계몽주의적 자유와는 궤를 달리한다고 봐야 한다.

공병호와 같은 국산 자유주의자들이 "영업의 자유"만을 부르짖으면서 정작 사회,군사,정치 의제에서는 우파 국가주의세력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의 기득권 재벌 세력은 87년의 민주화 이후 미국산 신자유주의를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확대시키기 위한 작업을 지난 20년간 해왔다. 거기에 고전적인 계몽적 자유주의가 끼어들 틈은 별로 없다.

차칸노르님은 한국 유권자의 성향이 "경제적 보수주의+정치문화적 진보주의"로서 미국의 리버태리안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계몽주의적 자유주의에 뿌리를 둔 서구의 리버태리안과, 재벌 기득권 이데올로그의 무한경쟁 시장만능주의에 경도된 한국 유권자의 자유개념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후자의 자유개념은 경제적 자유에 국한되고, 정치사회적인 의제에서는 공동체주의나 국가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 진보 좌파의 미국 문화좌파 흉내(동성애, 여권등에 대한 과잉 관심)가 진보 담론을 주도하는 것은 진보 진영이 사상적 공백상태에 처해있기 때문이지, 실제로 한국의 진보개혁적인 유권자가 문화좌파 혹은 리버태리안의 감수성을 가져서는 아니다. 

소위 "깨어있는 시민"현상은, 시장만능 사회의 습속에 익숙하고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 486, 397세대가 주도하고 있다. 87년 민주화 이후 진보 진영 일부는 양당제에 흡수되고, 일부는 폐쇄적인 좌파주의나 노동주의로 흐르면서 사상적 소속감을 잃은 과거 운동권들이 친노 세력이 주도하는 "정치 참여"의 레토릭에 반응을 보이고 정치적 에너지를 결집하고 있다. 과거 강렬했던 운동의 레토릭과 내재화된 시장만능주의의 습속의 결합은 경제 의제가 상당부분 거세된 추상적이면서도 격렬한 일종의 반정치(反政治)의 정치로 나아가는데 일조한다. 역설적이게도 중산층 이하의 서민계층, 즉 진보직이고 개혁적인 경제 정책으로 수혜를 입는 계층은 이러한 중산층 386 주도의 반정치 운동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다. 이것이 이명박 정부에 실망한 전체 유권자 집단의 표심이 쉽사리 민주통합당으로 쏠리지 못하는 이유다. 나꼼수와 깨어있는 시민은 정치적 악대차(밴드웨건)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통합당이 계속 이런 깨어있는 시민 레토릭에 끌려다닌다면 또다시 패배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