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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든 아니든 대학을 나왔든 안나왔든 리버럴이든 보수주의자이든 좌파든 
내가 식자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즉 무식하다고 생각하는 세 종류의 사람
들이 있다:

1. 도킨스류의 종교, 특히 기독교 비판에 휩쓸리는 사람들

2.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가 사회주의적 탈자본주의 전망의 종언/마르크스주
의의 죽음을 가리킨다고 얘기하는 사람들

3. 프로이트와 라캉 계열의 정신분석학은 전적으로 사이비이며 인문학 일각에
서 그것들을 대접하는 행태는 인문학과 과학 사이의 격차를 보여준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

(물론 안휩쓸리는 사람들, 얘기하지 않는 사람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서도 무식한 이들은 널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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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곳에만 머물러 있으면 좋겠습니다.

('*자'가 금칙어가 된건 좋은데 '추*자'까지 등록불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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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ud Lives! (By Slavoj Žižek)

프로이트 만세! (슬라보예 지젝)

 

* 출처: <런던 북 리뷰> 2810/ 2006525

http://www.lrb.co.uk/v28/n10/slavoj-zizek/freud-lives

 


In recent years, it’s often been said that psychoanalysis is dead. New advances in the brain sciences have finally put it where it belongs, alongside religious confessors and dream-readers in the lumber-room of pre-scientific obscurantist searches for hidden meaning. As Todd Dufresne put it, no figure in the history of human thought was more wrong about all the fundamentals with the exception of Marx, some would add. The Black Book of Communism was followed last year by the Black Book of Psychoanalysis, which listed all the theoretical mistakes and instances of clinical fraud perpetrated by Freud and his followers. In this way, at least, the profound solidarity of Marxism and psychoanalysis is now there for all to see.

 

최근 정신분석이 죽었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뇌과학의 새로운 발전이 최종적으로 정신분석을 독실한 신자들 및 꿈 해독가들과 나란히 그것이 속해 있는 곳에, 즉 숨겨져 있는 의미의 전과학적이고 반지성적인 탐색이 행해지는 잡동사니 방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토드 두프레슨이 말한 대로, 인간 사유의 역사에서 모든 근본적 문제들에 관해 프로이트보다 더 틀린 답들을 내놓았던 사상가는 없었다 - 일부 사람들은 마르크스는 예외라고 덧붙이겠지만 말이다. <공산주의 블랙 북>을 뒤이어 지난 해 출간된 <정신분석 블랙 북>은 프로이트와 그의 신봉자들이 범한 모든 이론적 오류들 및 허위적 임상보고 사례들을 열거했다. 바야흐르 이런 식으로나마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의 심원한 연대관계를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A century ago, Freud included psychoanalysis as one of what he described as the three ‘narcissistic illnesses’. First, Copernicus demonstrated that the Earth moves around the Sun, thereby depriving humans of their central place in the universe. Then Darwin demonstrated that we are the product of evolution, thereby depriving us of our privileged place among living beings. Finally, by making clear the predominant role of the unconscious in psychic processes, Freud showed that the ego is not master even in its own house. Today, scientific breakthroughs seem to bring further humiliation: the mind is merely a machine for data-processing, our sense of freedom and autonomy merely a ‘user’s illusion’. In comparison, the conclusions of psychoanalysis seem rather conservative.

 

한 세기 전,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그가 세 가지 자기애 질병들’[의 극복]이라 기술한 것들 중 하나에 포함시켰다. 첫째,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는 것을 입증했고, 그로써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서 끌어내렸다. 다음, 다윈이 인간이 진화의 산물임을 입증했고, 그로써 인간을 특권적 생물이라는 지위에서 끌어 내렸다. 마지막으로, 심적 과정들에서 무의식의 주도적인 역할을 규명함으로써, 프로이트는 에고가 자신의 집에서조차도 주인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오늘날, 과학의 비약적 발전은 인간에게 더한 굴욕을 안겨주는 것처럼 보인다: 마음은 데이터 처리 기계의 일종에 불과하고 우리의 자유 및 자율성 감각은 사용자 환영에 불과하다. 이와 비교하면, 정신분석의 결론들은 오히려 보수적인 것처럼 보인다.

 

* 사용자 환영(user’s illusion) - 인간의 자유 및 자율성 감각은 실재적인 자유와 자율성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그 감각을 필요로 하기에 뇌 속에서 일어나는 무의식적 과정에 의해 생산된 환영이다.


Is psychoanalysis outdated? It certainly appears to be. It is outdated scientifically, in that the cognitivist-neurobiologist model of the human mind has superseded the Freudian model; it is outdated in the psychiatric clinic, where psychoanalytic treatment is losing ground to drug treatment and behavioural therapy; and it is outdated in society more broadly, where the notion of social norms which repress the individual’s sexual drives doesn’t hold up in the face of today’s hedonism. But we should not be too hasty. Perhaps we should instead insist that the time of psychoanalysis has only just arrived.

 

정신분석은 시대에 뒤쳐졌나?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인지주의적-신경생물학적 인간 마음 모델이 프로이트 모델을 대체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학문적으로 시대에 뒤쳐졌다; 정신병 진료에서 그것은 시대에 뒤쳐졌는데, 거기서 정신분석학적 치료는 약물 및 행동 치료에 밀려났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시대에 뒤쳐졌는데, 거기서 개인의 성적 충동들을 억압하는 사회적 규범 개념은 오늘날의 쾌락주의에 직면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서둘러서는 안 된다. 대신 우리는 이제야 정신분석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강조해야 할지도 모른다.

 

One of the consistent themes of today’s conservative cultural critique is that, in our permissive era, children lack firm limits and prohibitions. This frustrates them, driving them from one excess to another. Only a firm boundary set up by some symbolic authority can guarantee stability and satisfaction the satisfaction that comes of violating the prohibition. In order to make clear the way negation functions in the unconscious, Freud cited the comment one of his patients made after recounting a dream about an unknown woman: ‘Whoever this woman in my dream is, I know she is not my mother.’ A clear proof, for Freud, that the woman was his mother. What better way to characterise the typical patient of today than to imagine his reaction to the same dream: ‘Whoever this woman in my dream is, I’m sure she has something to do with my mother!’

 

오늘날의 보수주의적 문화비판의 일관된 테마들 중 하나는 우리의 순응적 시대에 아이들이 확고한 제한들과 금지들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들을 좌절시키는데, 그들을 이런 저런 과도함으로 몰아대기 때문이다. 어떤 상징적 권위에 의해 설정되는 하나의 확고한 경계선만이 안정과 충족 - 금지를 위반하는 데서 오는 충족 - 을 보증해 줄 수 있다. 무의식에서 부정이 기능하는 방식을 규명하기 위해, 프로이트는 그의 환자들 중 하나가 미지의 여성에 관해 꾼 꿈을 얘기한 후 행한 논평을 인용했다: ‘내 꿈속의 이 여성이 누구든 간에 나는 그녀가 나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이 부정은 프로이트에게는 그 여성이 그의 어머니라는 분명한 증거였다. 오늘날의 전형적 환자를 특징짓는 가장 좋은 방식은 동일한 꿈에 대한 그의 반응을 상상하는 것이다: ‘내 꿈속의 이 여성이 누구든 간에 나는 그녀와 나의 어머니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Traditionally, psychoanalysis has been expected to enable the patient to overcome the obstacles preventing his or her access to normal sexual satisfaction: if you are not able to get it, visit an analyst and he will help you to lose your inhibitions. Now that we are bombarded from all sides by the injunction to ‘Enjoy!’, psychoanalysis should perhaps be regarded differently, as the only discourse in which you are allowed not to enjoy: not ‘not allowed to enjoy’, but relieved of the pressure to enjoy.

 

전통적으로, 정신분석은 환자가 정상적인 성적 충족을 방해하는 장애들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기를 기대 받았다: 당신이 그것을 얻을 수 없다면 분석가를 방문하라. 그러면 그가 당신이 그 금지들을 잊어버리도록 도와줄 것이다. 우리가 사방에서 즐겨라!’라는 명령에 의해 폭격당하는 지금, 정신분석은 다르게, 당신에게 즐기지 않는 것을 허락해 주는 유일한 담론으로 간추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즐기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즐기라는 압력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

 

Nowhere is this paradoxical change in the role of psychoanalytic interpretation clearer than in the case of dreams. The conventional understanding of Freud’s theory of dreams is that a dream is the phantasmic realisation of some censored unconscious desire, which is as a rule of a sexual nature. At the beginning of The Interpretation of Dreams, Freud provides a detailed interpretation of his own dream about ‘Irma’s injection’. The interpretation is surprisingly reminiscent of an old Soviet joke: ‘Did Rabinovitch win a new car on the state lottery?’ ‘In principle, yes, he did. Only it was not a car but a bicycle, it was not new but old, and he did not win it, it was stolen from him!’ Is a dream the manifestation of the dreamer’s unconscious sexual desire? In principle, yes. Yet in the dream Freud chose to demonstrate his theory of dreams, his desire is neither sexual nor unconscious, and, moreover, it’s not his own.

 

정신분석학적 해석의 역할의 이 역설적 변화는 꿈들의 경우에서 가장 분명하다. 프로이트의 꿈 이론에 대한 통상적 이해는 꿈은 어떤 검열된 무의식적 욕망 - 이 욕망은 대개 성적 욕망이다 - 의 환상적 실현이라는 것이다. <꿈의 해석>의 초두에서, 프로이트는 이르마의 주사에 관한 그 자신의 꿈을 상세히 해석한다. 그 해석은 놀랍게도 옛 소련에서 유행했던 한 농담을 상기시킨다: ‘라비노비치는 국가 복권에 당첨되어 새 자동차를 경품으로 탔나요?’ ‘원칙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는 새 자동차를 경품으로 탔습니다. 다만, 그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자전거였습니다. 그 자건거는 신품이 아니라 중고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경품으로 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도둑맞은 자전거였습니다!’ 꿈은 꿈꾼 이의 무의식적 성적 욕망의 표출인가? 원칙적으로, 그렇다. 하지만 자신의 꿈 이론을 예시하기 위해 프로이트가 선택했던 그 꿈에서, 그의 욕망은 성적이지도 무의식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더욱이 그것은 그 자신의 욕망이 아니다.

 

The dream begins with a conversation between Freud and his patient Irma about the failure of her treatment because of an infection caused by an injection. In the course of the conversation, Freud approaches her and looks deep into her mouth. He is confronted with the unpleasant sight of scabs and curly structures like nasal bones. At this point, the horror suddenly changes to comedy. Three doctors, friends of Freud, among them one called Otto, appear and begin to enumerate, in ridiculous pseudo-professional jargon, possible (and mutually exclusive) causes of Irma’s infection. If anyone had been to blame, it transpires in the dream, it is Otto, because he gave Irma the injection: ‘Injections ought not to be made so thoughtlessly,’ the doctors conclude, ‘and probably the syringe had not been clean.’ So, the ‘latent thought’ articulated in the dream is neither sexual nor unconscious, but Freud’s fully conscious wish to absolve himself of responsibility for the failure of Irma’s treatment. How does this fit with the thesis that dreams manifest unconscious sexual desires?

 

그 꿈은 프로이트와 그의 환자 이르마가 그녀의 치료의 실패에 관해 대화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실패는 주사로 인한 감염 때문이었다. 대화가 진행되는 중에, 프로이트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입 안쪽을 살펴본다. 그는 상처 딱지들과 코뼈 같은 꼬불꼬불한 조직들의 불쾌한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시점에서, 호러는 갑자기 코미디로 변한다. 그들 중 하나가 오토라 불리는, 프로이트의 친구들인 의사 셋이 나타나 이르마의 감염의 가능한 (그리고 상호배제적인) 원인들을 가소로운 사이비 전문적 은어를 써가며 열거하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비난받아야 한다면, 꿈에서 밝혀지는 대로 그 누군가는 오토인데, 그가 이르마에게 주사를 놓았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결론내리기를, ‘주사를 그렇게 무신경하게 놓아서는 안 되며 주사기가 청결하지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그 꿈에서 표현된 잠재 사고는 성적이지도 무의식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이르마의 치료 실패에 대한 책임을 면하고 싶어하는 그의 완전히 의식적인 소망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꿈은 무의식적 성적 욕망을 표출한다는 테제와 일치하는가?

 

A crucial refinement is necessary here. The unconscious desire which animates the dream is not merely the dream’s latent thought, which is translated into its explicit content, but another unconscious wish, which inscribes itself in the dream through the Traumarbeit (‘dream-work’), the process whereby the latent thought is distorted into the dream’s explicit form. Here lies the paradox of the dream-work: we want to get rid of a pressing, disturbing thought of which we are fully conscious, so we distort it, translating it into the hieroglyph of the dream. However, it is through this distortion that another, much more fundamental desire encodes itself in the dream, and this desire is unconscious and sexual.

 

어떤 결정적 세련화가 여기서 필요하다. 꿈을 활성화시키는 무의식적 욕망은 꿈의 잠재 사고 - 꿈의 명시적 내용으로 번역되는 것 - 일 뿐 아니라 또한 트라움아르바이트 (‘-작업’)를 통해 꿈에 각인되는 별개의 무의식적 소망이기도 하다. -작업 과정에 의해 잠재 사고는 꿈의 명시적 형태로 왜곡된다. 여기에 꿈-작업의 역설이 놓여있다: 우리는 우리가 완전히 의식하고 있는, 압박감을 주는 불온한 생각을 제거하고 싶어 하며, 그래서 우리는 꿈의 상형문자로 번역해 그것을 왜곡한다. 그렇지만, 또 하나의, 훨씬 더 근본적인 욕망이 꿈에서 약호화되는 것은 이 왜곡을 통해서이며 이 욕망은 무의식적이고 성적이다.

 

What is the ultimate meaning of Freud’s dream? In his own analysis, Freud focuses on the dream-thought, on his ‘superficial’ wish to be blameless in his treatment of Irma. However, in the details of his interpretation there are hints of deeper motivations. The dream-encounter with Irma reminds Freud of several other women. The oral examination recalls another patient, a governess, who had appeared a ‘picture of youthful beauty’ until he looked into her mouth. Irma’s position by a window reminds him of a meeting with an ‘intimate woman friend’ of Irma’s of whom he ‘had a very high opinion’; thinking about her now, Freud has ‘every reason to suppose that this other lady, too, was a hysteric’. The scabs and nasal bones remind him of his own use of cocaine to reduce nasal swelling, and of a female patient who, following his example, had developed an ‘extensive necrosis of the nasal mucous membrane’. His consultation with one of the doctors brings to mind an occasion on which Freud’s treatment of a woman patient gave rise to a ‘severe toxic state’, to which she subsequently ‘succumbed’; the patient had the same name as his eldest daughter, Mathilde. The unconscious desire of the dream is Freud’s wish to be the ‘primordial father’ who possesses all the women Irma embodies in the dream.

 

프로이트의 꿈의 궁극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 자신의 분석에서, 프로이트는 꿈-사고에, 이르마의 치료가 실패한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그의 표면적소망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지만, 그의 해석의 세부에는 더 깊은 동기들의 암시들이 있다. 꿈에서의 이르마와의 대면은 프로이트에게 몇몇 다른 여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구강 검사는 또 한명의 환자, 한 여자 가정교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녀는 그가 그녀의 입을 들여다 볼 때까지 그에게 젊은 미인의 표상이었다. 이르마의 창가 위치는 그에게 그가 매우 높이 평가했던’, 이르마의 한 절친한 여자 친구와의 만남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그녀에 관해 생각하면서, 프로이트는 이 다른 숙녀 또한 히스테리 환자였다고 상정할 모든 이유를 갖고 있다. 상처 딱지들과 코뼈는 코에 난 종기를 완화시키기 위해 코카인을 사용했던 기억, 그리고 그의 예대로 광범위한 코 점막 괴사가 진행 중이었던 한 여성 환자를 떠올리게 한다. 의사들 중 한명과의 의논은 한 여성 환자의 치료가 심각한 중독 사태를 야기하고 그로 인해 그녀가 죽었던경우를 떠올리게 한다; 그 환자의 이름은 그의 맏딸 마틸드와 같았다. 그 꿈의 무의식적 욕망은 이르마가 그 꿈속에서 구현하는 모든 여성들을 소유하는 원초적 아버지가 되고 싶은 프로이트의 소망이다.

 

However, the dream presents a further enigma: whose desire does it manifest? Recent commentaries clearly establish that the true motivation behind the dream was Freud’s desire to absolve Fliess, his close friend and collaborator, of responsibility and guilt. It was Fliess who botched Irma’s nose operation, and the dream’s desire is not to exculpate Freud himself, but his friend, who was, at this point, Freud’s ‘subject supposed to know’, the object of his transference. The dream dramatises his wish to show that Fliess wasn’t responsible for the medical failure, that he wasn’t lacking in knowledge. The dream does manifest Freud’s desire but only insofar as his desire is already the Other’s (Fliess’s) desire.

 

그렇지만, 그 꿈은 그 이상의 수수께끼를 제기한다: 그것은 누구의 욕망을 표출하는가? 최근 논평들은 그 꿈 배후의 진정한 동기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플라이스를 면책 및 면죄시키고 싶어하는 프로이트의 욕망임을 분명하게 확정한다. 이르마의 코 수술을 했던 것은 플라이스였으며 그 꿈의 욕망은 프로이트 자신이 아니라 그의 친구를 무죄로 만드는 것이었다. 플라이스는 그 당시 프로이트의 안다고 가정된 주체,’ 그의 전이의 대상이었다. 그 꿈은 플라이스가 그 의료 실패에 책임이 없음을, 그가 지식을 결여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그의 소망을 극화한다. 그 꿈은 프로이트의 욕망을 표출한다 - 그러나 그의 욕망이 이미 타자의 (플라이스의) 욕망인 한에서만 그렇게 한다.

 

Why do we dream? Freud’s answer is deceptively simple: the ultimate function of the dream is to enable the dreamer to stay asleep. This is usually interpreted as bearing on the kinds of dream we have when some external disturbance noise, for example threatens to wake us. In such a situation, the sleeper immediately begins to imagine a situation which incorporates this external stimulus and thereby is able to continue sleeping for a while longer; when the external stimulus becomes too strong, he finally wakes up. Are things really so straightforward? In another famous example from The Interpretation of Dreams, an exhausted father, whose young son has just died, falls asleep and dreams that the child is standing by his bed in flames, whispering the horrifying reproach: ‘Father, can’t you see I’m burning?’ Soon afterwards, the father wakes to discover that a fallen candle has set fire to his dead son’s shroud. He had smelled the smoke while asleep, and incorporated the image of his burning son into his dream to prolong his sleep. Had the father woken up because the external stimulus became too strong to be contained within the dream-scenario? Or was it the obverse, that the father constructed the dream in order to prolong his sleep, but what he encountered in the dream was much more unbearable even than external reality, so that he woke up to escape into that reality.

 

 

왜 우리는 꿈을 꾸는가? 프로이트의 답변은 기만적으로 단순하다: 꿈의 궁극적 기능은 꿈 꾸는 이를 계속 잠에 빠져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개 어떤 외적 교란 - 예를 들어, 소움 - 이 우리의 잠을 깨울 위험이 있을 때 우리가 꾸는 꿈의 종류와 관계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수면자는 즉각 이 외적 자극을 통합하는 상황을 상상하기 시작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더 오래 잠에 빠져 있을 수 있다; 외적 자극이 너무 강해지면, 그는 결국 잠을 깨게 된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간단한가? <꿈의 해석>의 다른 유명한 예에서 어린 아들이 방금 죽은 한 지쳐있는 아버지가 잠에 빠져 그 아이가 불길에 휩싸인 채, 끔찍한 비난을 퍼부으며 그의 침상 옆에 서있는 꿈을 꾼다: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게 안보여요?’ 곧 바로 아버지는 잠에서 깨 촛불이 쓰러져 그의 죽은 아들의 수의에 불이 붙었음을 발견한다. 그는 잠자고 있던 중에 연기 냄새를 맡았으며, 그래서 잠을 계속 자기 위해 불타는 아들의 이미지를 꿈에 통합시켰다. 그 아버지는 꿈 시나리오 내에 봉합되기에는 그 외적 자극이 너무 강해서 잠을 깼을까? 아니면 그 역으로, 그 아버지는 잠을 계속 자기 위해 꿈을 만들어냈지만 그가 꿈에서 조우한 것은 외부 현실보다 훨씬 더 참을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 현실로 도피하기 위해 잠을 깼을까?

 

In both dreams, there is a traumatic encounter (the sight of Irma’s throat, the vision of the burning son); but in the second dream, the dreamer wakes at this point, while in the first, the horror gives way to the arrival of the doctors. The parallel offers us the key to understanding Freud’s theory of dreams. Just as the father’s awakening from the second dream has the same function as the sudden change of tone in the first, so our ordinary reality enables us to evade an encounter with true trauma.

 

두 꿈 모두 외상적 조우가 포함되어 있다(이르마의 목구멍 모습, 불타고 있는 아들의 모습); 그러나 두 번째 꿈에서, 꿈꾼 이는 그 조우의 시점에서 잠을 깨지만 첫 번째 꿈에서는 그 공포는 의사들의 등장으로 소산된다. 두 꿈의 유사성은 우리에게 프로이트의 꿈 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한다. 두 번째 꿈에서 아버지의 깨어남이 첫 번째 꿈에서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와 동일한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일상적 현실은 우리가 진짜 외상과의 조우를 회피할 수 있게 한다.

 

Adorno said that the Nazi motto ‘Deutschland, erwache!’ actually meant its opposite: if you responded to this call, you could continue to sleep and dream (i.e. to avoid engagement with the real of social antagonism). In the first stanza of Primo Levi’s poem ‘Reveille’ the concentration camp survivor recalls being in the camp, asleep, dreaming intense dreams about returning home, eating, telling his relatives his story, when, suddenly, he is woken up by the Polish kapo’s command ‘Wstawac!’ (‘Get up!’). In the second stanza, he is at home after the war, well fed, having told his story to his family, when, suddenly, he imagines hearing again the shout, ‘Wstawac!’ The reversal of the relationship between dream and reality from the first stanza to the second is crucial. Their content is formally the same the pleasant domestic scene is interrupted by the injunction ‘Get up!’ but in the first, the dream is cruelly interrupted by the wake-up call, while in the second, reality is interrupted by the imagined command. We might imagine the second example from The Interpretation of Dreams as belonging to the Holocaust survivor who, unable to save his son from the crematorium, is haunted afterwards by his reproach: ‘Vater, siehst du nicht dass ich verbrenne?’

 

아도르노는 나치의 좌우명인 독일이여, 깨어나라!’가 실제로는 그것의 정 반대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당신이 이 부름에 응한다면, 당신은 계속 잠자고 꿈꿀 수 있을 것이다(즉 사회적 적대라는 실재와의 조우를 피하기 위해). 프리모 레비의 시 <기상신호>의 첫 번째 연에서 수용소 생존자는 집에 돌아가 음식을 먹으면서 그의 친지들에게 그가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 하는 것에 관한 강렬한 꿈들을 꾸면서 수용소에서 잠들어 있던 일을 떠올린다. 그는 폴란드 간수의 일어나!’라는 명령에 의해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두 번째 연에서, 그는 전쟁이 끝나 집에 돌아와 있으며 실컷 먹으면서 친지들에게 그가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때 그는 갑작스럽게 다시 일어나!’라는 외침을 들었다고 상상한다. 결정적인 것은 첫 번째 연에서 두 번째 연으로 이행하면서 꿈과 현실 사이의 관계가 역전된다는 것이다. 그것들의 내용은 형식적으로 동일하다 - 친지들과의 단란하고 즐거운 한 때가 일어나!’라는 명령에 의해 방해받는다. 그러나 첫 번째 연에서는, 꿈이 기상신호에 의해 잔인하게 방해받는 반면, 두 번째 연에서는 현실이 상상된 명령에 의해 방해받는다. 우리는 <꿈의 해석>에서의 두 번째 예가 홀로코스트 생존자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이다. 아들을 화장장에서 구해낼 수 없었던 그 생존자는 그 후 그의 비난에 시달린다: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게 안보여요?’

 

In our ‘society of the spectacle’, in which what we experience as everyday reality more and more takes the form of the lie made real, Freud’s insights show their true value. Consider the interactive computer games some of us play compulsively, games which enable a neurotic weakling to adopt the screen persona of a macho aggressor, beating up other men and violently enjoying women. It’s all too easy to assume that this weakling takes refuge in cyberspace in order to escape from a dull, impotent reality. But perhaps the games are more telling than that. What if, in playing them, I articulate the perverse core of my personality which, because of ethico-social constraints, I am not able to act out in real life? Isn’t my virtual persona in a way ‘more real than reality’? Isn’t it precisely because I am aware that this is ‘just a game’ that in it I can do what I would never be able to in the real world? In this precise sense, as Lacan put it, the Truth has the structure of a fiction: what appears in the guise of dreaming, or even daydreaming, is sometimes the truth on whose repression social reality itself is founded. Therein resides the ultimate lesson of The Interpretation of Dreams: reality is for those who cannot sustain the dream.

 

우리가 일상 현실로 경험하는 것이 점점 더 현실인 듯 꾸며진 거짓말의 형태를 취하는 우리의 스펙터클 사회에서, 프로이트의 통찰은 진가를 발휘한다. 우리 중 일부가 강박적으로 즐기는 쌍방향 컴퓨터 게임들을 생각해보라. 그 게임들은 신경과민의 약골이 다른 남자들을 두들겨 패고 여자들을 폭력적으로 회롱하는 난폭한 마초라는 스크린 인격을 채택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약골이 따분한, 무력감을 주는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사이버스페이스로 도피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너무 쉽다. 사실, 그 게임들은 그 이상을 얘기해 주는 것 같다. 게임들을 즐기면서 혹시 나는 윤리적-사회적 제한들 때문에 현실 생활에서는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나의 인격의 비꼬여 있는 핵심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가상적 인격은 어떤 방식으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내가 현실 세계에서는 결코 할 수 없을 것을 게임 속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내가 이것은 게임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라캉이 말한 대로, 진실은 허구의 구조를 갖고 있다: , 또는 심지어 백일몽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때때로 진실이며 사회적 현실 자체는 그 진실의 억압에 기반 해 있다. 거기에 <꿈의 해석>의 궁극적 교훈이 놓여 있다: 현실은 꿈을 계속 꿀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