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근래 광고음악에도 등장할 정도로 유행음악이 되었다. 그렇지만
60~70년대만 해도 국내에서 이 음악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음반이 귀했기 때
문에 이 곡을 들을 수 있는 장소도 제한된 몇 군데에 지나지 않았다. 최근 이 곡은 첼로라는
악기의 인기와 맞물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동기가 단지 조금 특이한 곡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 때문인지 혹은 이 곡이 현대인의 감수성과 코드가 맞았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하나의 악기에서 이 <무반주 첼로 모음곡>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음악을 나는 알지 못
한다. 만약 바흐의 이 첼로곡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첼로는 지금처럼 연주장에서 크게 인기
를 끄는 악기로 부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들>이 존재하지 않았더
라도 피아노는 그 영롱한 음색을 뽐내며 음악의 중심축으로 여전히 건재했을 것이다. 모차
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바이올린은 악기의 여왕 자리를 고수
했을 것이다. 그러나 첼로라는 악기의 성가는 바흐의 이 독주곡에 아주 크게 의존하고 있다.

 처음 내가 이 음악을 들었던 때부터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이 음악을 처음 만나던
그 순간을 잊지 않고 있으며 이 곡을 들을 때마다 그때를 회상하곤 한다. 나는 불행하게도
서른이 다 되어서야 이 음악을 처음 들었다. 이 음악은 나의 "음악듣기"를 한 차원 높은 곳
으로 끌어주었으며 나의 삶과 생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당연히 이 음악은 다른
모든 음악들과 구별되는, 내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음악이다.

 어느해 여름 오후 늦은 시간에 나는 명동성당 앞 작은 빌딩의 5층에 있던 <크로이첼>이란
감상실에 입장하기 위해 비좁고 가파로운 계단을 올라갔다. 그곳은 수용인원이 고작 서른
명도 못되는 작은 공간이었다. 그런데 내가 음악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전에 듣지 못했던
첼로 독주곡이 문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그 순간 온 몸에 전기 쇼크 같은 충격을 받았고 나
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그 곡이 다 끝날 때까지 바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파블로 카잘스가 연주한 <첼로모음곡 6번>이었는데 다행히 시작부터 끝까지 모
두 문밖에 서서 들은 셈이었다.
 그 음악을 들은 뒤 나는 음악실에 들어가지 않고 뒤돌아 나와서 오래동안 길을 걸었다. 충
격을 완화하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날 다른 음악을
더 들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카잘스는 바흐의 <마테수난곡>을 처음 듣고 충격을 크게 받은 나머지 몇달 동안 자리에
눕게 되었다고 한다. 이 얘기는 그의 비할데 없이 훌륭한 전기 <나의 기쁨과 슬픔>에 나온
다. 나는 바흐의 이 <무반주 첼로 모음곡 6번>을 겨우 한 차례, 그것도 문 바깥에서 들은
뒤 몇달 동안이나 이 음악의 선율에 사로잡혀 잠시도 헤어나지 못했다.-이 음악을 들은 직
후 공교롭게도 무슨 일로 체포되어 수감되는 바람에 몇달 동안  이 음악을 들을 기회가 없
기도 했다.- 길을 걸을 때나 누구와 마주앉아 얘기를 나눌 때나 심지어 혼자 어두운 공간
에 갇혀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6번의 프렐듀드와 사라방드의 선율이 환청으로 머리 속
을 흘러갔다. 6번의 시작부터 거의 끝까지 거의 모든 멜로디가 환청으로 내 귀에서 재생되
던 기적의 원인을 나는 알지 못하며 지금까지 신기롭기만 하다.

 이 음악을 듣기 전 나는 이른바 고전음악의 인기차트를 차지하는 곡들에 적지 않은 실증
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음악들은 달콤하거나 아름답거나 슬픈 음악들이다. 달콤하지도 기
쁘지도 슬프지도 않으면서 보다 단순한 기호와 구조를 통해 깊고 오묘한 의미를 함축하
고 있는 음악, 그런 음악이 세상 어딘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숙집 구들에 누워 혼자 그
런 상상을 하던 바로 그 무렵에 공교롭게 그 음악과 만난 것이다. 내가 막연하게 공상에
서 찾던 바로 그 음악이었다.

  이 음악의 세계는 무한히 열려있는 공간이다. 아무런 주제도 메시지도 제시하거나 해명
하지 않는 모호성에 이 음악의 미덕이 있다.
"이 음악 안에 존재하지 않는 감정이란 없다." 고 한 카잘스의 말이나
"이 음악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들을 때마다 늘 새로운 것을 느낀다." 고
한 로스트로포비치의 말도 모두 이 음악의 이같은 포괄성과 모호성을 비유한 말로 들린
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듣고 아름답다거나 멋지다고 말하면 분명 핀잔을 들을
것이다. 우리의 일반적 감각에 비춰보면 이런 표현은 확실히 이 음악과는 걸맞지 않는다.
 이 음악에는 본질적으로 제대로 된 선율다운 선율이 없다. 그렇지만 이 곡과 친밀하게
사귀다 보면 도처에 숨어있는 매력적 선율과 마주칠 것이다. 음악에는 즐거움을 주는
음악, 위안을 주는 음악, 생각하게 해주는 음악이 있다. 이 음악은 우리가 익숙해 있던
것들과는 다른 세계를 보여주며 우리를 꿈꾸게 만든다. 바흐 음악을 두고 앙드레 지드
가 "인간적 감정이 배제된 동경의 세계라고 말한 것이 있는데  이 첼로곡이야말로 마
치 악보 속에 피안, 혹은 이상향이 형태로 그려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음악은 우리
를 한없이 고양시켜 주기도 하며 그것은 비천한 현실에 허덕일 때 큰 위안으로 다가온다.

 모든 첼리스트들에게 바흐 <무반주첼로 모음곡> 연주는 하나의 통과의례가 된다. 그런
가하면 음악학교 오디션에서도 이 곡은 늘 첫 자리를 차지한다. 첼로를 막 시작한 초등학
생도, 세계적 명성을 얻은 대가들도 매일처럼 이 곡을 가지고 연습에 매달린다. 로스트로
포비치 같은 현대의 대가가 60세를 훌쩍 넘긴 다음에 이 음악의 정식 음반을 내놓은 걸
보면 이 음악에는 어린이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천진성과 대가들도 쉽게 다루기 까다로
운 함정이 공존하는듯 하다.
 카잘스 이래 현대의 대표적 주자들이 모두 생애의 정력을 기울여 음반을 남겼다. 로스트
로포비치, 요요마, 마이스키, 푸르니에, 빌슴바, 비스펠베이 등이 비교적 우리에게 익숙
한 이름들이다. 그런데 연주도 시간이 지나면서 기교는 물론 해석의 다양성이란 측면에
서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개척자의 열정과 이 곡에 대한 확고한 의지로 지울 수 없는 전범을 보여준 파블로 카잘스
도 지금 들어보면 조금은 낡았다는 느낌을 준다. 차분한 해석으로 카잘스와 곧잘 비교되
기도 하던 푸르니에 역시 그런 느낌을 준다.로스트로포비치는 유감스럽게도 이
음악에 대한 지나친 경배심 때문에 연주 자체가 활력을 잃은 감이 있다. 그런 점은 요요마
도 비슷해 보인다. 요요마는 최근까지 이 곡을 여러차례 녹음했지만 내 견해로는 크게 만족
스런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미샤 마이스키는 이 음악에 관한한 행운아에 속
한다. 그는 재즈처럼 연주해서 웃음거리가 된 첫 음반의 실패를 딛고 오랜 심사숙고 끝에
감행한 두번째 도전에서 대성공을 거뒀다. 이 성공이 없었다면 지금 같은 마이스키의 명
성은 상상하기 어렵다.

 나는 이태 전 두 사람의 새 얼굴과 만나서 그들의 새로운 연주를 즐기는
행운을 얻었다. 프랑스인 막스 클레망과 벨기에 사람 로엘 디엘티엥이 그들이다. 이들은
개성이 매우 강한 연주를 들려준다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런 경향은 자유와 비상
이라는 이 음악의 숨은 본질과도 잘 부합된다. 이들의 연주는 몇사람의 유명 연주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 음악에 대한 제한적 고정관념을 깨트려주었다.
 장 막스 클레망의 연주는 웅변이며 우주적 스케일의 유장한 연주인 반
면 로엘 디엘티엥의 연주는 아담한 상자 속 속삭임처럼 은밀하고 정답게
다가오는 연주이다. 성격은 무척 대조적이지만 이 두 연주가 모두 높은 설득력을 보여준
다는 점이 중요하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이 곡을 작곡할 때
 자기가 지금 무슨 사고를 치는 줄도 모르고 평소처럼 평온한 자세로 이 곡을 작곡했을
거라는 어느 서구 비평가의 말이 가끔 떠오른다.
 -새 해 복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