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할머니...텔레비나 인터넷을 통해 이미 유명세를 탈만큼 탄 호칭이다.
나는 인터넷에서 단순한 호기심으로 뭔가 하고 사진을 드려다보다가 뒷끝이 오싹해지는 전율을 느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태, 어지간한 사건 사고에는 놀라지도 않고 기발한 몸치장을 한 남녀가 대로를 활보해도
돌아보지도 않게끔 신경이 무디어져 있다. 그런데 나에게 이건 좀 놀랍고 적지 않은 충격이다.

 1958년 봄이던가, 나는 충무로에 있는 알리앙스 프랑세즈에 불어를 배우려고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당시 알리앙스는
서울에서 프랑스 말을 배울 수 있는 가장 권위있는, 아마도 유일한 학원이었는데 서울대학의 유명교수가 직접 나와서
프린트로 된 교재를 들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나는 고교를 건너 뛰는 바람에 제2외국어는 부득이 독학으로 시작했는데
전라도 벽촌에서 혼자 공부하는 프랑스말 발음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상경하자 말자, 그곳을 찾게 된 것이다.

 저녁 늦은 강의실 분위기는 학습열기로 뜨거웠다. 밝은 형광등 여러개가 천정에서 비추고 있다. 수강생은 대부분 서울
의 이름있는 고교 학생들, 특히 여학생이 다수였다. 학적도 없는 더벅머리 시골뜨기인 나는 자연히 잔뜩 기죽은 표정으
로 뒷 자리에 앉아 오직 프린트 교재와 강사님의 유창한 프랑스 말 발음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유독 내 눈길을 끄는 여학생이 있었다. 이화여고라면 품이 넓은 하얀 칼라의 교복만 봐도 금방 그 학교 학생을 알아
볼 수 있는데 그 학생은 이화여고 학생이며 머리 뒤를 두 갈래로 짤막하게 묶은 모습이 뒤에서만 봐도 무척 매력적이었
다. 그 학생은 얼굴도 이쁘장했다. 뭐, 촌놈이 보기에 그랬다는 얘기다. 다만 이쁘장하기만 한 게 아니고 눈 쌀 주위나 꾸
욱 다문 입술 주위를 보면 성깔도 꽤 있어보이는 인상이었다. 이럴 때 남자는, 아니 나는 더욱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매력을 느끼면 뭐하나? 말 한마디 건네볼 수 없는 가련한 내 처지인데. 주머니에 차 한잔 값이 있나, 하다못해 옷차림이
라도 그럴법한가. 가령
 " 이 프린트 활자가 잘 안보이는데 plaisir 가 맞습니까?" 라던가
"불어출제 수준이 아주 낮다던데 여기서 배우는 교재는 너무 수준이 높지 않을까요?"
라던가 뭐 이런 질문을 슬쩍 다가서서 그녀에게 물어볼 수도 있을법한데 나는 차마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리고
몇달 내내 그녀 뒷자리에 앉아 그 두 갈래로 땋아내린 쪽머리만 쳐다보고 지내다가 그 학원과정을 끝마쳐버렸다.

 그리고 59년도에 외국어대학에 들어갔는데 나는 내 딴엔 불어는 웬만큼 되었으니 다른 외국어 하나를 더 해보자는
의욕으로 독어과를 택했고 요즘 박그네 옆자리에 앉아 한참 주가를 높이고 있는 김종인도 그때 독어과에 함께 들어
온 동기생 중 한명이다. 뭐 잘 난 동기생을 거명하여 한몫 하겠다는 게 아니고 뒤에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대학의 신입생이 되어..더구나 고교도 생략한채 들어간 대학이라 더욱 기대감에 부풀어 한창 꿈에 부풀어 있을 때
나는 학교 복도에서 놀랍게도 그녀와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쌍갈래로 머리를 땋아내린 그 이화여고 학생이 이번
에는 불어과 신입생으로 나와 같은 시기에 같은 학교에 들어온 것이다. 비록 과는 다르지만 규모가 작은 학교라
매일같이 복도에서 마주치기 마련이었다. 복에서 나와 마주친 그녀도 나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뭐 바보가 아니라
면 불과 한해 전에 알리앙스를 드나들던 그 촌뜨기 사내녀석을 설마 알아보지 못하진 않았을 게다. 그녀는 나와 복도에서
마주치면 약간 입을 비죽이는듯한 ,희미한 미소로 자기가 나를 알아봤다는 표시를 했다. 그뿐이었다.

 결코 용감하게 다가서지도 못하는 주제에 상상력은 비상하게 발달해서 그 여학생을 두고 나는 벼라별 상상과 공상
을 했었다.
 이것도 인연 아니냐? 그 알리앙스에서 몇달을 함께 공부했던 그 아가씨가 어찌해서 이 작은 외딴 학교에서 나와
다시 만나 4년을 같은 캠퍼스에서 보내게 된 것이냐? 분명히 그녀와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운명의 어떤 끈이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요즘 문죄인 때문에 운명이란 말이 별로 좋은 어감으로 오지 않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4년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걸음걸이가 아주 특이했다. 키가 크지 않으면
서도 보폭이 넓어서 멀리서 봐도 그 여학생을 알아볼 수 있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언제나처럼 약간 비죽이는 미
소로 힐끗 쳐다보고 그냥 지나쳤다. 나는 독일어과 다니면서 늘 프랑스어과 학생들을 부러워했다. 그래서 프랑스
어과에 들어가서 도강도 여러차례 했고 프랑스어 학점도 신청해서 땄다. 그 여학생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프랑스어 도강을 여러차례 한것은 그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4년은 훌쩍 지나갔고 말 한마디 나누지 못
한채 그 여학생과 나는 또 각자 다른 세계로 흩어졌다.

 그리고 몇십년만에 인터넷 동영상으로 '맥도날드 할머니"로 등장한 그 이쁘장했던 그러나 성깔께나 있어보이던
그 여학생을 보게 된 것이다. 십여년동안이나 자리에 누어보지도 못하고 가게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 밤
을 지새우고 노숙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온다는 맥도날드 할머니를....

 아아, 다가서서 말 한마디 건네볼 수 없을 정도로 도도하고 깔끔했던 그녀는 도대체 어떤 과정의 삶을 살았기에
지금의 모습으로 출현한건가?
 나는 그 학생시절에 정말 그녀를 좋아하고 깊이 사랑했던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다만 그녀의 매력과 아주 특
이한 걸음걸이, 도도한 성격에 약간의 호기심만을 갖고 있었던 것 뿐인가? 인터넷의 동영상 앞에서 나는 자문해
본다. 해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 두가지 모두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이 많이 흘러
마음의 정체가 흐려진 탓이다.

 다음은 일산에 사는 불어과 동기생-그러니까 그녀와 같은 반이던 내 친구와 며칠 전 전화로 나눈 대화내용이다.
이 친구는 현대그룹에 근무하다 그만두고 지금은 은퇴생활을 하고 있고 과가 달랐지만 글쓰기 취미로 학생시절
나와 알게 된, 친구이다.
"어이, 그 맥도날드 할머니 기사 봤나? 자네랑 같은 반이란 게 맞지?"
"00자  아냐. 물론 봤지.허허허"
그는 대뜸 그녀 이름부터 발설했다.
"우리 친구들이 몇이 모여 그렇찮아도 도울 방법을 의논하고 그랬지. 그런데 문제가 간단치가 않아요."
"뭐가 문제인데..?"
" 작은 아파트나 뭐 거처할만한 곳을 구해준다 해도 듣지 않아. 도와줄려거던 워커힐 호텔에 한달만
묵게 해달라는 거야."
"하필 왜 워커힐이야?"
"그래서 주선을 맡은 친구 말이 그건 어렵다는 거지. 그런데 가서 자살할까봐 그건 곤란하다는 거야.
자네 그 000 좋아했었지 않아?"
"그걸 어떻게 알았지?"
"언젠가 자네가 그런 말 했었던 것 같애. 뭐 그 당시에 000 에 관심 가진 친구가 한 둘은 아니었거든.
그땐 꽤 이뻤고 매력 있었지. 참 허무하지?"
"근데 그녀가 지금도 기다린다는 그 인물은 대체 누구야? 실체가 있는 얘긴가?"
"실체는 무슨.. 평생 품고 살아온 공상 속의 인물이겠지. 있다고 해도 수십년 전 스처간 이미지일 거야."

 유난히 춥다는 이 겨울에 그녀는 또 어디서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같은 시기에 같은 학교를 나온 어
떤 친구는 지금 나라를 바꿔보겠다고 의기양양하게 목을 곧추세우고 연일 지면을 장식하는데 어떤
여성은 맥도날드 가게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 긴긴 겨울밤을 지세워야 하다니...이것이 그 인간
자신의 선택에서 비롯된 행로의 차이인가? 아니면 미리 정해진 그야말로 운명의 차이인가?
아니면 공상과 허상에 매달린 인간과 현실에 아주 충실하게 따르고 매달린 인간과의 차이인가?
송년을 앞 둔 이 며칠 이런 잡생각들이 머리속을 오락가락 하고 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