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늦게까지도 피해자가 이렇게 늘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사망자 2명 외에는 별 문제 없이 대부분 구조될 것으로 보였는데... 충격적이고 끔찍한 일이 너무 많아진 세상이긴 하지만 이번 사고는 상상의 범위를 뛰어넘는다.

 

내가 알고 있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상식이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사고 장소가 먼 바다도 아니고, 사고 선박이 낡고 초라한 구닥다리 쪽배도 아니고, 지금 이 시대가 사고대응 시스템이 부실한 1970년대도 아닌 21세기인데, 나름 선진국을 바라보고 있다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될 수 있나?

 

무엇보다 충격인 것은 선장과 선원들이 제일 먼저 배를 탈출했고, 그러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어떤 죄의식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선장은 물에 젖은 5만원권 1만원권을 말리고 있었다니 그 초인적(방향이 비뚤어지긴 했지만 일단 초인적인 것은 맞다)인 멘탈에 압도되는 느낌이다.

 

게다가 다른 선원은 그 돈 자기 달라며 옥신각신했다니... 자신들의 책임 아래 있던 수백명 아이들이 그 시각에도 죽어가고 있었을 텐데, 그 사실을 그들 역시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 아무 생각없이 돈 몇만원 갖고 화기애애한 장난이나 치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이 대목에서 조셉 콘래드의 소설 <로드짐(Lord Jim)>이 떠오른다. 평범한 일개 선원이었던 주인공이 사고 선박과 승객들을 버리고 도망갔다가 평생 죄책감과 자기혐오를 벗어나지 못하고 운명과 싸우는 내용이다.

 

그나마 로드짐은 자신의 행위로 평생 괴로워했지만 세월호의 선장과 승무원들은 그럴 것 같지도 않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이번 사고로 인해 자신들에게 닥쳐올 불이익이 어떤 것인지, 그 불이익을 돈으로 따지면 5만원 몇장, 1만원권 몇장이 될 것인지 그런 것 아닐까? 이런 예단이 위험하긴 하지만 현재까지 그들이 보이는 직업인으로서, 인간으로서의 소양을 보면 이런 내 추측이 결코 무리인 것 같지는 않다.


로드짐의 스토리를 요약한 내용을 소개한다. 이 요약문에는 나오지 않는데, 로드짐은 죽기 전에 원주민 여인을 사랑하고 있었고, 이 여인은 로드짐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애원한다. 그리고 원주민들도 그의 피신을 결코 막지 않고 있었다. 명예의 원칙에 근거해 죽음으로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는 순전히 로드짐의 선택의 문제였다. 그리고 로드짐은 평생 자신을 괴롭히던 불명예를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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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첫눈에 말쑥한 신사로 보이는 젊은이다. 그는 시골 목사인 아버지로부터 청교도적인 격렬한 양심과 책임감과 명예감을 이어받고 있다.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어느 날 밤, 순례자들은 사람이 빽빽이 들어찬 갑판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때 패트너 호는 별 충격도 없이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어떤 물체에 걸렸던 것이다. 파선될 것으로 판단한 선장과 선원들은 구명 보트가 단지 7정밖에 없으므로 800명을 도저히 구할 수 없다고 결정하고 순례자들이 자는 동안 몰래 탈출한다. 그들의 비겁한 행동에 강한 혐오감을 느낀 짐은 혼자 배에 남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구명정에 분승해 바다로 나가자 별안간 공포에 사로잡혀 그들 뒤를 쫓아 바다로 뛰어들어 함께 탈출한다.

 

그들은 고생 끝에 육지에 당도하여 그곳 영국 식민 당국에 조난을 보고한다. 그러나 한편 좌초되었던 패트너 호는 사실은 침몰하지 않고 선장과 선원 없이 멋대로 표류하다가 프랑스 군함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결국 선장 이하 승무원 전원이 멀쩡한 배를 포기했다는 사실이 판명되어 모두 재판에 회부된다. 이때 작가의 작품 대부분에 화자(話者)로 등장하는 수부 말로가 짐을 알게 된다. 짐은 다른 선원과 함께 재판에서 선원증이 몰수되었다는 사실보다는 불명예스럽게 아무것도 모르는 순례자들을 버리고 배를 떠났다는 수치심으로 고민한다. 그는 말로의 도움으로 괜찮은 직장을 얻었으나, 패트너 호의 선원을 만나자 다른 곳으로 숨어 버린다.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이 직장에서 저 직장으로,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정처없이 유랑하지만 소용이 되지 않았다.


괴로워하는 짐을 보다 못해 말로는 슈타인 회사의 사장인 친구 슈타인을 찾아가서 이야기한다. 슈타인은 즉시 짐의 고통에 진단을 내린다. 즉, 짐은 인간이 지닌 한계를 생각하지 않는 낭만주의자로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자신의 과오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슈타인은 해결책으로 슈타인 회사가 거래 지점을 열고 있는 말레이 군도의 외딴섬 파투산에 짐을 보낸다. 2년 후에 화자 말로가 파투산을 방문했을 때 모든 일이 잘 되어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주얼과 짐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고, 주민들은 폭군 추장을 제거하고 섬에 번영을 가져온 데 대하여 짐을 숭배하여 그를 '로드(영주(領主)) 짐'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짐도 과거의 죄책감에서 상당히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신사' 브라운이 파투산에 상륙함으로써 문제가 발생한다.


그는 법에 쫓김을 받고 있는 해적으로 식량과 돈 그리고 은신처를 얻으려는 기대를 가지고 파투산에 배를 댄 것이다. 브라운 일당이 임시로 윌리스가 맡고 있는 방책을 습격했을 때 짐은 강 상류를 탐험하고 있었다. 브라운 일당은 피로와 굶주림에 무척 지쳐 있었기 때문에 윌리스와 주민들은 그 습격을 물리친다. 브라운은 언덕으로 도망하여 그곳에 요새를 구축한다. 윌리스는 그 요새를 공격했으나 함락시킬 수 없었다.


짐이 탐험에서 돌아와 사태를 파악하고는 위험을 무릅쓰고 단독으로 찾아가 브라운을 만난다. 브라운은 도주할 기회를 달라고 애원한다. 짐도 재생의 기회를 누리지 않았는가. 짐은 이 살인마와 자신을 비교할 때 본질적인 차이를 발견하지 못한다. 자신도 제2의 기회를 가졌는데 어떻게 자기가 브라운에게 그것을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언덕을 내려와서 주민들을 설득시켜 포위망을 풀어 준다. 그러나 극악한 브라운은 갑자기 무방비의 주민들을 습격하여 윌리스를 포함한 몇 명을 살해함으로써 짐의 관용에 보답한다. 자기 생애의 두 번째 배반에 직면하여 절망한 짐은 윌리스의 아버지 도라민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 놓는다. 주민들의 관습법은 판단 착오로 윌리스가 살해당한 대가로 짐이 벌을 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길만이 잃은 영예를 진정으로 되찾을 수 있다고 느끼며 짐은 평온한 마음으로 아들을 잃은 도라민이 쏘는 탄환을 받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로드 짐 (세계문학사 작은사전, 2002.4.1, 가람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