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는 바람님의 <북촌 방향/ 짧은 평>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홍상수의 예전 영화들보다 '해변의 여인'(2006)부터의, 그의 비교적 최신작들을 더 유쾌하게 감상하는 중입니다. 실은 홍상수의 초기작은 제대로 본 적이 없고, 영화관에서 본 것도 '극장전'(2005), '해변의 여인'(2006), '하하하'(2009), '옥희의 영화'(2010), 그리고 최근작인 '북촌방향'(2011)뿐입니다 영화를 좀 볼 줄 안다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홍상수의 초기작은 아무래도 제 취향은 아닌 것 같습니다.

홍상수의 영화는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 많습니다. 특히 최근작일수록 "똑같은 얘기를 왜 계속하느냐"는 말을 많이 듣는 것 같습니다. 대개의 홍상수의 영화에는 특정한 공간, 남자와 여자, 남자와 여자 사이의 썸씽, 그리고 제 갈길 가는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죠. 저는 거의 반복되는 이런 기본 골격에 대해서 미리 대본을 써놓지 않고, 촬영 전에 대략의 컨셉만 배우들에게 알려주고, 즉석에서 배우 상호간, 배우들과 감독간의 호흡을 통해 영화를 찍는 홍상수의 스타일, 철학과 맥을 같이한다고 봅니다.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세계, 세계관을 최근작 '북촌방향'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유준상이 김상중, 송선미와 북촌의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주절주절 늘어놓는 개똥철학이 바로 그것이죠. 유준상은, 우리는 이 세상이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일정한 흐름을 보이는 선형적인 세계라고 착각 혹은 그렇게 의도적으로 생각하고 산다고 말합니다. 실은 수많은 우연과 우연이 그저 산재되어 있을 뿐인데, 그 우연과 우연의 점들을 우리가 하나하나 이어가며 거기에 인과관계, 이야기, 흐름,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우연성에 필연성을 부여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소리겠죠. 실은 제가 개똥철학이라고 했지만 베르그송의 철학과 다르지 않죠. 홍상수가 대본없이 그날그날 상황(영화를 촬영하는 공간, 시간, 그곳의 날씨, 주변 여건 등등)에 맞춰서 평소 생각해왔던 것 혹은 당장 떠오르는 것을 배우들에게 알려주고, 배우들은 그것을 듣고 평소 자신의 연기 패턴, 하고자 하는 연기, 그리고 배우들 상호간의 소통을 통해 임의적, 즉흥적으로 치고받으며 영화를 만들어갑니다. 홍상수라는 작가, 영화배우들, 스탭, 촬영장소, 촬영장소가 처한 각종의 상황들 사이의 즉흥적인 상호작용의 결과물이 홍상수의 영화이고, 홍상수의 이러한 영화 방법론 자체가 홍상수의 세계관까지 보여주는 것이겠죠. 제가 '결과물'이라고 했지만, 실은 정확한 표현은 아닐겁니다. 홍상수가 '완성'한 영화는 익명의 대중들에게 임의적으로 관람되고, 그 영화를 관람한 수많은(별로 많진 않지만 어쨌든) 관객들에 의해 이렇게 이야기되며 수많은 사람들의 머릿 속에서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의 형태로 떠돌아다니니까요.


예술가는 시대의 징후를 가장 먼저, 자신들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포착해낸다고 합니다. 백남준은 미래에는 모든 개인이 각자의 방송국을 소유할 것이라고 했다고 하죠. 오늘날의 스마트폰, SNS를 전혀 알지 못하는 그였지만, 텔레비전과 정보통신기술에서 지금과 미래의 맹아를 읽어낸 예술가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라디오에서, TV에서 하는 방송을 듣고, 보고 비교적 균일한 세상를 접하고, 또 구성하는 것이 기존의 세계의 문법이었다면 지금은 각자가 원하는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각자가 원하는 세상을 만나고, 그것을 구성하죠. 스마트폰과 인터넷이라는 기초적인 도구는 공통되지만 말입니다.

라디오, TV의 시대에는 모두가 공유하는 하나의 서사, 이야기로서의 세계가 가능했지만, 인터넷, 스마트폰, SNS시대에는 분절된 개인들 사이의 개인적인, 우연적인, 임의적인, 즉흥적인 상호작용 자체로서의 세계(이것을 세계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만 존재합니다. 이런 세계에서는 일관된 인과관계로 구성된 '이야기'는 따분한 옛날 헛소리가 됩니다. 순간적인 번뜩임, 즉흥적인 쾌감, 우연과 우연의 충돌과 조화의 과정 자체에서 발현되는 순간의 무질서적인 질서(혹은 질서적인 무질서)들로 이루어진 '이야기'(전통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대체할 단어가 없어서)가 주목받죠. 기-승-전-결의 구조를 띤 음악의 작법 자체는, 샘플링을 비롯한 작법의 혁신, 파괴를 통해 이미 낡은 것이 된지 오래고, 전통적인 인과적 서사구조, 즉 내용, 이야기 거리를 담았던 영화는, 가장 기초적인 영화의 구성요소인 공간, 배우, 감독만 남겨놓은 채 해체, 재구조화되고 있죠. 굳이 홍상수를 비롯한 소위 '예술영화'를 만드는 작가들을 거론하지 않고 '상업영화'를 떠올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오히려 상업영화는, '상업'영화인만큼 시대적 징후를 더 일찍 포착해서인지, 인과적 서사구조, 내용, 이야기보다(최소한의, 간단한 이야기 구조-권선징악-만 사용한 상태에서) 특수효과, 액션, 선정성, 급격한 반전 등을 사용함으로써 즉흥,우연,순간,임의성을 강조했다고 볼 수도 있죠.  


하지만 이러한 우연의 세계, 즉흥의 세계에서도 고정된 무언가는 있죠. 사람(남자와 여자)과 그들이 살고있는 시간과 공간이죠. 물론 엄밀하게 따지면 이런 것들도 다 우연의 산물이지만, 어쨌든 지금 나와 그, 그녀가 있고, 나와 그, 그녀가 함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으니까, 그리고 시험도 아닌데 뭐 그렇게 엄밀하게 따질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어째서인지는 순전히 제 생각이지만, 홍상수의 영화에서 남자와 여자, 그들의 (즉흥적인)관계, 그리고 특정한 공간이(만) 강조되고, 또 그것들이 기본 골격이고, 홍상수가 저것들 가지고만 떠들어대는 이유는 바로 그것들이(만) 이 우연적인 세계에서 그나마 고정된 무언가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어째서 저 공간에 저 남자와 저 여자가 등장하는지 홍상수는 알려주지 않죠. 고정된 무언가 상호간의 관계는 역시 우연적일 뿐이라는 홍상수의 생각이겠죠.

어쟀든 '북촌방향'은 노골적으로 '북촌'이라는 공간에서 발생한 남자와 여자 사이에 관한 영화죠. 영화 사이 사이에, 저 장면이 환상인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드는 장면도 나오는데, 특히 유준상이 김보경(술집에서의 김보경 말고)을 만나러 북촌이라는 공간을 떠날때가 그렇죠. 더 재미있는 것은, 유준상이 김보경을 만나러 가기 전, 영화학도 3명을 데리고 "도대체 북촌인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공간에 위치한 술집에서 술을 마신 후, 그들과 "좋은 데"를 가자며 북촌을 떠나고, "좋은 데"라면서 간 곳에서 갑자기 '또라이'같이 행동하며 자기가 데려온 영화학도 3명에게 욕을 퍼붇고 김보경에게로 도망가죠. 북촌이라는 특정의, 정해진 공간에서 영화감독, 영화과 교수라는 특정의, 정해진 사회적 지위로서 (서울 아닌 어딘가에서) 등장한 유준상은 그러한 특정의, 정해진 북촌이라는 공간에서 벗어나자 자신의 감독,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를 찌질하면서 통쾌(?)하게 벗어버리고 순수한 내밀한 욕망을 따라 김보경에게로 가죠. 감독이 뭘 말하고자 하는지 솔직히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특정 공간과 다른 공간에서 동일한 한 남자가 한 공간에서는 감독, 교수로 다른 공간에서는 찌질이, 욕정에 사로잡힌 남자로 각각 보여지죠. 한 사람이 (상호간 관계는 우연적이지만) 고정된 공간에서 순수하게 임의적인 공간으로 갔을 때에 그나마 '고정'된, 어찌보면 사회화되어있던 허물을 모두 벗어버리고, 순전한 욕망(뭐 성욕이죠)의 덩어리가 되어서 (서사적 세계관의 입장에 따르면)좌충우돌, 마음대로, 찌질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북촌방향'에서 유준상이 보여준 것이죠. 하지만 앞서 말했듯, 유준상이 북촌을 떠나 다른 공간으로 간 그 씬은 저것이 실제인지 아니면 유준상의 환상일 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 흥미로운지도 모르죠.

'옥희의 영화'를 봐도,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대학교수인 문성근과 이선균, 그리고 옥희(정유미) 사이의 썸씽이 영화의 전부죠. 이선균, 문성근, 옥희의 시선에서 각각 다른 시간에서의 그들의 관계를 그려냈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문성근의 과거가 이선균의 현재이고, 이선균의 미래가 문성근의 현재이며, 옥희는 문성근, 이선균 모두와 썸씽이 있고, 영화 한 복판에 존재하며, 에피소드 마지막은 옥희가 같은 공간(도봉산으로 기억)에서 나이든 남자(문성근)와 젊은 남자(이선균)와 데이트했던 그 기억, 느낌을 표현한 영화로 되어있죠. 그래서 옥희의 영화인지도 모릅니다만, 아무튼 대학, 도봉산이라는 공간에서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는 아무런 필연을 가지지 않은 채 그저 상황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이선균과 문성근이 각각 다른 사람으로 출연했지만, 처음 에피소드의 이선균은 두번째 에피소드의 문성근과 같아 보이고, 또 마지막 에피소드의 이선균과 문성근은 그저 옥희가 만난 젊은 남자와 나이든 남자로서 20대 여대생 옥희가 경험한 고정된 세상(대학교수 문성근)과 가변적, 우연적인 세상(4년 대학 다니고 다른 곳으로 떠날 이선균)의 비교 대상이기도 하죠.


저는 홍상수 영화를 유쾌하다고 했습니다. 먼저 남자들의 찌질함을 '낯술'(2009, 감독 노영석, 독립영화임)보다 훨씬 노련하게 표현해서 유쾌합니다. 그리고 홍상수의 영화세계, 그의 세계관인 즉흥성, 임의성, 우연성의 상호작용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순간적인, 예상치 못한 재치가 유쾌합니다. 사람들은 홍상수가 변했다고, 혹은 타성에 젖은 것은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지금의 홍상수가 좋습니다. 진화하는 홍상수의 영화가 유쾌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 그리고 앞으로 수십년은 더 살아갈 이 세상에서 지혜롭게 세상을 즐기는 법을, 지금의 시대에서 풍류를 즐기는 법을, 아니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는 법, 인생을 읽어내는 방식, 세상과 친하게 지내는 법을 엿볼 수 있어서 더 좋은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