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홍상수의 열 두 번째, 혹은  열 세 번째 영화. 
 
  2. 언제부터인지 그는 주구장창 영화감독이자 영화과 교수인 주인공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들을 1인칭 시점으로만 담아 내고 있다.  홍상수의 최근 모든 영화의 주인공이자 내러이터는 영화감독이자 영화과 교수이며, 서울과 좀 거리를 둔 지방에 살고, 권태와 자의식, 그리고 B급 엘리트 의식이 클리쉐처럼 깔려진 인물이다. 보통 플롯과 스토리를 통해서 인물이 캐릭터가 점진적으로 만들어 지게 되는 것과는 달리,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스토리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타입들이다. 즉, 각 영화들에 삽입된 에피소드들에서 각기 사건들을 제거해 버린다고 하더라도 그 인물들에는 변함없이 매우 전형적인 태도 - 즉 전형적인 권태와 변칙적 행동성, 변칙적인 화술의 기교적인 결합 - 가 남아 있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홍상수 영화의 캐릭터는 각 영화의 사건과 플롯에 무차별적이다. - A 영화에 벌어지는 사건에 A 영화의 주인공 a 가 아니라 B 영화의 주인공 b 를 집어넣는다고 하더라도, b는 완전히 A 영화의 에피소드들과 결합될 수 있는 구조이다.  
 
  3. 영화 감독이 직접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영화 속에서 자신을 해부하고 분석하게 되면서 영화는 감정을 매개하고 전달하고 고양하고 확장시키는 극적인 소재를 포기하는 대신, 영화 관객의 시선을 에피소드  자체의 표면, 인물의 행동 자체에만 묶어 두게 만든다. 여기서 인물이 어떠한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어떤 '계기를 통하여'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보통 대화를 통해 인물과 인물들간의 정서적인 거리는 좁혀지지만, 여기서는 정반대로 작용한다: 즉 대화를 통해 인물들은 서로를 더욱 더 버거워하게 되며, 서로에게 도망가려고 한다. 그러면 이러한 대화의 감정적 완충제가 소독되어 사라진 곳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동성들- 특히 남성들간-의 관계에서는 현실적인 힘의 구조적인 역학 관계 - 즉 영화 감독과 영화 제작자, 잘 나가는 영화 감독과 한물 간 영화 감독, 영화과 교수와 학생들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바과 같이 - 에서 나타나는 은근한 언어 폭력이며, 그리고 이성들과의 관계에서는 기억 속에서 당장 증발되어도 전혀 거리낄 것이 없는 순간적인 사랑의 유희, 즉  말이 아닌 '혀와 혀' 로만 연결된 사랑이다. 극중 '영화 감독'인 유준상이 1인 2역이었던 김보경 - 즉 마담 A 역인 김보경, 혹은 자신과 교제했던 과거 제자였던 학생 B 역의 김보경- 과 나누는 에피소드는 바로 이런 감정적인 휘발성이 가장 극대화된 순간이다. 결코 이면을 허용하지 않는 - 그것이 감정의 이면이든, 사건의 이면이든, 혹은 캐릭터가 보여주는 행동의 이면이든 - 홍상수 영화 문법의 대전제 속에서 열정의 아우라를 휘감은 이성간의 진지한 사랑과 존경의 감정은 도무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날카로운 현실은 이미 나레이터인 영화 감독의 자의식 속에서 표면적으로 극대화 된 채 시작되어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홍상수 영화의 문법에 적응하기 사작하면 그것을 별다른 거부감과 불편함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마담 A 역인 김보경이 까페 앞 거리에서 유준상에게 당하는 우발적인 돌발 키스를 1) 영화 관객들 스스로가, 2) 극중 캐릭터인 김보경이 거부감 잆이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한 에피소드적인 전개가 왜 불편하지 않은가? 심지어 그러한 폭력적인 키스가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이면을 허용하지 않는 홍상수의 영화 문법에 관객과 배우들이 이미 사전 공모한 듯이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홍상수의 영화적인 전략이 들어맞을 수 있는 이유는 인간 관계의 현대적인 측면 - 즉 모든 사적이고 공적인 인간 관계의 사물화 경향과 휘발성, 즉 어떻게 시작되어도 좋고 어떻게 끝내도 좋은- 이 이러한 내면성의 상실로 특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근대 소설은 19세기에 저자가 작품의 주인공을 자신이 아닌 다른 허구적인 캐릭터를 선택함으로서, 그리하여 그 인물 속에 자신의 이상화된 기념비를 세움으로서 시작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소설이 만들어 낸 성과는 곧 픞롯을 통한 '인간 내면성의 발견'이라는 화려한 예찬으로 이어진다. 소설이 플롯과 회고적인 서술 기법을 통해 벌여놓은 성찬을 영화가 폐쇄시키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비상업 영화의 21세기적인 운명에 속한다. 영화 작가가 이렇게 타인이 아닌 자신을 주인공으로 전시하고 노골적으로 자신을 분석하고 까뒤집는 이야기 속에서, 인간들의 관계는 철저하게 외부화된 채,즉 플롯이라는 인과적인 연결 고리 없이 우연적인 에피소드들의 꼴라주들로만 나타나게 된다. 플롯이 없고 그 대신에 에피소드들의 꼴라주들만이 있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는 인간적인 향기가 없다: 그렇게 때문에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나면 남는 것은 감정의 전환도 아니고 허무함도 아니다. 그것은 영화 독자인 내가, 그의 영화에서 제시된 에피소드의 현장에서 느끼는 일종의 공모감. 기묘한 비현실적 현실감이다.   
 
발터 벤야민이 사진 작가의 주요 목적이 화가와 달리 인물이 담긴 배경을 담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사라진 그 현장을 포착하는 것에 있다고 말했을 때 그가 머리 속에 담고 있던 생각이 영화 작가의 자의식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