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나다 기행

 

‘콜두에

멀고도 고적한 곳

검둥말 큰 달

주머니에 올리브를 넣고

가는 길은 알지라도

콜두에에 이르지는 못하네.’

 

이것은 그라나다(Granada) 출신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의 시 <기사의 노래>의 일부다. 콜두에가 어디 있는 곳인지는 모르지만 마드리드에서 출발한 그라나다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나는 이 시를 되뇌어 봤다. 그라나다는 콜두에처럼 멀고 아득한 곳으로 느껴졌다. 마드리드에서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벼룩시장에서 소매치기 형제를 만난 것이다. 다행히 잃은 것은 없지만 피카소와 카잘스의 나라에서 처음부터 이런 대접을 받았다는 게 몹시 언짢고 서글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라나다에서 나는 그 보상을 단단히 받았다.

 

그라나다는 시작부터 감동적이었다. 5월의 어느 날 오우 다섯 시쯤 해서 그라나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시내를 한번 달려보라. 천국이 그대를 맞을 것이다. 멀리 시야에 시에라네바다(Sierra Nevada) 산의 눈 덮인 정상이 바라다 보이는데 그것은 지상과 유리되어 하늘에 떠있는 천국처럼 아름답고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한다. 그 풍경을 보면서 나는 되이어 나타날 도시에 대해 가슴 설레 일 만큼 더욱 큰 기대를 갖게 되었다.

 

마침 축제가 시작된 그라나다 거리는 몰려나온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넘쳐흘렀다. 축제에 때 맞춰 찾아온 우리는 운이 좋은 셈이었다. 5월은 성모성월(聖母聖月)인데 그들은 이 시기에 성모의 음덕을 기리는 지방 특유의 풍속을 갖고 있었다. 상가나 식당마다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여러 형태의 인형이나 조각품으로 만든 마리아와 예수의 모자상을 세워놓았고 크게 만든 십자가나 성모상을 높이 치켜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열성파도 더러 있었다. 그들이 추는 춤은 플라멩코와 춤사위가 비슷한데, 그것과는 또 다른 자기네 민속춤이라고 했다. 사람들의 피부빛과 얼굴 골격에서 마드리드와 달리 아랍계 흔적을 많이 볼 수 있어서 더 친근감을 느꼈다. 알다시피 8세기에서 15세기까지 이 곳 안달루시아(Andalusia) 지방이 아랍 세력의 지배를 받아 혼혈이 많게 된 것이다. 축제의 거리에서 우리는 잠시 꿈꾸는 기분의 느꼈다. 석양을 배경으로 색다른 피부와 골격을 가진 사람들이 활기 넘친 표정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광경은 먼 나라 애기를 담은 동화의 세계를 연상시켰다. 인상주의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의 피아노곡집 《판화》에는 <그라나다의 저녁>이란 플라멩코풍의 즐거운 곡이 있다. 이 저녁, 거리 풍경을 보면서 드뷔시가 바로 지금 같은 거리 풍경에서 악상을 얻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다. 드뷔시는 파리에 유학온 그라나다 출신의 작곡가 마누엘 데파야(manuel de Falla)와 깊은 친교를 맺은 사이이기도 하다.

 

알람브라 궁전은 그라나다의 얼굴이며 상징이다. 그런데 중세 이슬람 건축의 압권으로 일컫는 이 건축물보다 타레가의 기타곡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 더욱 많이 알려진 감이 없지 않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왕조에 대한 애상을 기묘한 가락에 담은 이 곡으로 인해 사람들은 마음속에 실물과 관계없이 저마다 환상을 키운다. 이른 아침에 누에바 광장을 떠나 경사진 긴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서야 이윽고 궁전 매표구 앞에 서 보면 이것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꽤 이른 시간인데도 매표구 앞에는 중노년 관광객들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를 중엔 일생 동안 이 매표구 앞에 한 번 서 보기를 고대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문 입장권을 순에 얻기 위해 어떤 때는 한 시간 이상씩 기다리기도 한다. 입장권은 한 장으로는 안 되고 여러 곳의 입구에 들어갈 때마다 다른 입장권을 또 구입해야 한다. 스페인 사람들의 놀랄만한 상술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관광객이 구름처럼 몰려있는 알람브라 궁전 입구에 서서 나는 바로 얼마 전 거쳐 온 이라크의 바빌론 유적이나 이라크 북부 도시인 모술(Mosul)의 유적들을 생각했다. 그 곳들이 나무 억울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왕궁, 구약에 등장하는 모술의 니네베 성이나 닐로드 성 등. 그 곳들은 봉쇄 정책에 의해 지금 깊은 정적 속에 묻혀 있다. 하긴 봉쇄 정책이 있기 이전에는 그 곳에도 수많은 관광객이 몰렸다. 바그다드나 모술 지역에 있는 그 많은 일급 호텔 시설들이 이제의 번성을 말해 주는 증거물들이었다.

 

알람브라는 원래 광대한 지역이 요새로 지어졌으며 그 안에는 성채와 왕궁, 욕장과 이슬람 사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성채의 일부와 왕궁, 일부 욕장만이 남아 있었다. 파티오(Patio)라 부르는 스페인식 정원은 궁전에서 가장 큰 볼거리인데 정원과 연결된 다리를 건너가면 왕이 여름이면 와서 휴가를 보내곤 했던 헤네랄리페로 갈 수 있다. 그리고 사자 정원에는 돌로 만든 사자 분수와 대리석을 깔아 나무 형상으로 만든 둥근 기둥들을 볼 수 있고, 자매의 방에서는 섬세하고 정교한 아라베스크 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진 천장을 볼 수 있다. 둥근 원들을 섬세하게 짜 맞춘 무늬를 모가라베스라고 하는데 자매의 방 천장의 무늬는 가장 아름다운 모가라베스로 알려져 있다. 이 무늬는 어딘지 눈에 익었다. 생각해 보니 바그다드의 무스탄시리아대학 정문과 본관 건물에서 눈이 시리게 보았던 보로 그 무늬들이었다. 무스탄시라아대학 건물은 알람브라궁 건축과 비슷한 시기인 13세기에 건축된 아랍의 가장 오래된 대학 건물로 이라크인들이 자랑하는 건축물이다.

 

구역이 넓고 나무와 꽃들이 가득한 헤네랄리페에서 나는 비로소 땀을 닦고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헤네랄리페란 이름은 ‘건축가의 집’이란 뜻이다. 그런 만큼 아랍식 정원의 극치를 여기서 보게 된다. 이 정원에는 음악분수가 있고 양쪽 화원에는 사이프러스, 재스민, 미르테, 아카시아, 레몬 등 갖가지 나무와 꽃들이 저마다 맵시를 겨루고 있다. 옛날 왕들로 그라나다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이 정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여흥을 즐겼다고 한다. 문득 파야의 <스페인 정원의 밤>이란 음악이 떠올랐다. 이 작품의 첫 악장 이름이 바로 <헤네랄리페에서>다. 이 곡은 스페인 국민음악파의 거장인 파야가 파리 유학 시절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고 고향에 와서 이 정원의 조망과 아름다움을 인상주의 수법으로 작품에 담은 것이다. 타레가의 <아람브라 궁전의 추억>이 아람브라의 감상적인 묘사라면 파야의 <헤네랄리페에서>는 알람브라의 인상적 소묘라고 할 수 있다. 로르카 생존 시절에는 파야와 함께 이 정원에서 음악콘서트와 무용페스티발을 매년 열곤 했는데 그 전통이 이져 내려와 지금도 해마다 헤네랄리페에서는 세계의 음악인들과 무용가들이 모여 콘서트와 페스티발을 열고 있다고 한다.

 

플라멩코를 추며 투우를 즐기는 집시들

 

헤네랄리페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그리 멀지않은 곳에 회색의 작은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밀집해 있는 이색적인 풍경을 보게 된다. 강한 한낮 햇빛 속에 숨을 죽이고 있는 그 거리는 마치 역사 속에서 오래 잠자고 있는 유적처럼 보인다. 그 곳은 무어인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알바이신(Albaicin) 거리다. 아랍이 지배하던 시절 알바이신은 그라나다 상공업은 물론 종교와 행정의 중심지였다. 알바이신은 유네스코에 의해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13세기 이사벨 여왕의 입성으로 이곳에서 무어인들이 쫓겨날 때 그들이 항거했던 핏자국이 알바이신 거리 곳곳의 벽마다 얼룩져 있다고 그 후예들은 지금도 믿고 있다. 알바이신의 미로 같은 골목길을 헤매다가 우연히 마주친 여성 플라멩코 무용수 스텔라도 그 후예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녀는 골목길을 헤매는 우리에게 다가와 혹시 길을 잃었으면 출구를 가르켜 주겠다며 친절을 베풀었다. 검정색의 긴 통바지와 블라우스를 입는 서른 안쪽의 밉지 않은 여성이었다. 거리의 카페에서 잠시 그녀와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녀는 자기가 출연하는 플라멩코 전문 공연장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덕분에 그 날 저녁 시 외곽에 임시로 설치된 비슷한 공연장으로 가서 스텔라와 그녀 동료들의 전문적인 플라멩코 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가설무대지만 관광객을 상대로 만만치 않은 입장료를 받고 춤을 보여 주는 영업 장소였다. 맥주와 가벼운 음료가 관객에게 제공되었고 무용수와 공연 되에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특전으로 베풀어졌다. 플라멩코는 혼자 추는 것과 둘, 혹은 여럿이 추는 것으로 구분되는데 남녀가 짝이 되어 둘이 추는 형식이 아무래도 더욱 열정과 열기를 뿜어냈다. 스텔라는 간판급 무용수로 상대 남성과 함께 춤을 출 때 그녀를 보노라면 그 박력과 긴장감 때문에 숨도 쉴 수가 없을 정도다.

 

그라나다에는 무어인의 거리인 알바이신과는 성격이 다른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알바이신에서 조금 걸어가면 말지 않은 곳에 산미구엘 언덕이 있고 그 곳의 부드러운 바위에는 수많은 동굴들이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먼거리에서 보면 그 것은 바위에 새겨진 그림 같다. 그러나 그 곳은 집시들이 수백 년 동안 살아온 사크로몬테(Sacromonte) 구역이다. 집시들은 플라멩코에 대해 자신들 만의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서 집시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이 언덕의 동굴에 직접 찾아가서 집시의 춤과 음식을 감상한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직접 이 언덕의 동굴로 찾아가서 그들의 춤과 음식을 대접받기도 했는데 이 동료는 그 동굴의 벽에서 스페인 출신의 영화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의 사진을 위시해 많은 저명인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사진들인 그 곳을 방문했던 인사들이 남긴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영화 《무기여, 잘있거라》에서 버그만이 집시 소녀로 등장해서 멋진 연기를 보여줬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라나다는 구경하지 말고 직접 그라나다를 경험하십시오.’ 이 것은 그라나다 관광안내서에 친절하게 써 있는 한 구절이다. 그라나다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과 잠시 스쳐가는 우정을 나눴다. 그 중에서도 가정 기억에 남는 인물은 우리가 묵은 카르멘 호텔의 지하 카페 악사인 하비에르 로페즈다. 전자 오르간을 능숙하게 다루는 그는 코밑에 짧은 수염을 기른 쉰 살 안팎의 미남자였다. 오르간을 연주하다 신이나면 그는 마이크를 붙잡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저녁 때면 지하 카페는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중노년의 서구인들로 만원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부부 동반 이었다. 로페즈의 연주가 시작되고 흥이 무르익으면 서구인들은 부부가 함께 무대에 나와서 《마이 웨이》나 《러브스토리》의 주제가에 맞춰 멋지게 부르스를 추어댔다. 춤을 못 추는 우리는 한쭉 구석에서 부러운 눈으로 그 멋진 춤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손님들이 노래하는 차례가 되어서는 내가 나가서 노래를 불렀다. <어는 사람의 역사>, <멋진 마리키타여 안녕>등 라틴 계열의 노래는 평소 내가 자주 부르던 곡들이다. 노래를 끝내자, 청중들로부터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로페즈는 내게 여러 곡을 요청했고, 그는 신바람이 나서 멋진 반주로 응답해줬다. 그는 아마 나 같은 이방인이 자기네 노래를 비교적 발음도 틀리지 않고 그럴듯하게 불러대는 것이 기픅하고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그 노래 덕에 로페즈와 친구가 되었고 우리는 매일 저녁 지하 카페를 찾았다. 로페즈는 내게 자신의 연주 늑음 테이프를 선물했고 카페에서 노래를 들은 이웃 술가게 주인은 자기 가게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 고급 포도주 한 병씩을 선물로 안겨주기도 했다. 그 가게에 로페즈도 동행했음은 물론이다. 로페즈의 오르간 연주는 내가 일찍이 들어본 연주 가운데 가장 감각적이고 호소력이 강했다. 비록 술의 힘이 작용한 일탈이었지만 카르맨 호텔 카페에서 보낸 저녁 시간을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라나다의 모른 경험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어렵게 투우장 표를 구해 투우장에 갔다가 우리 일행들은 모두 잠시 우울한 기분에 빠지고 말았다. 그림으로, 영화로 투우장의 장면을 부면 투우사는 용기의 상징이고 생과 사의 기로에 선 투우의 몸부림은 다만 운명과 싸우는 생명체의 비장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을 때는 또 달랐다. 투우를 전통 놀이나 열정의 상징으로 지나치게 미화시킨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잔인했다. 피 흘리고 쓰러지는 수는 그 놀이의 희생물에 불과했다. 물론 스페인 사람들의 정서가 우리와 다르고 그들이 소의 희생에 바치는 헌사의 의마가 따로 있다는 걸 인정해야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소의 첫 희생을 보고 바로 하나둘씩 도망치듯 투우장을 빠져 나가고 말았다. 그 날 하루 내내 우리들의 기분이 울적했다.

 

그라나다의 자유 영혼, 로르카 시인

 

그라나다 사람들은 그라나다 출신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를 누구나 알고 있고 그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 호텔 안내대에서 로르카 생가가 있는 푸엔테바케로스로 가는 길을 묻는 동안에도 그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생가가 있는 마을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호텔의 남자 종업원은 내가 깜박 착오를 일으켜서 ‘페르난도 가르시아’라고 했을 때 ‘페데리코 가르시아’라고 정확하게 정정해 줬다. 푸엔테바케로스는 그라나다에서 자동차로 한시간 정도 걸리는 조그만 시골이었다. 택시를 빌려서 그 곳까지 갔는데 길가에 있는 구멍가게 주인에게 로르카의 생가를 물었더니 그 남자는 마치 자기 친척을 찾아온 손님을 대하듯 가게 밖으로 부리나케 튀어나와 신바람이 난 표정으로 기념관이 있는 곳까지 우리를 안내해줬다. 그의 얼굴에는 로르카에 관한 일이라면 뭐든 도와 줄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로르카는 러시아의 세르게이 에세닌처럼 농민 시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는 스페인 농민들과 서민들의 정서를 잘 이해하고 그들에게 깊은 애정을 가졌던 시인이었다. <집시노래>란 시를 보면 그것을 금방 알 수가 있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연극 공연에도 많은 정성을 기울였고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다. 로르카가 프랑코의 반대파라는 이유로 1936년 겨우 서른일곱 살의 나이에 극우타인 팔랑헤 당원들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 그는 고향 그라나다의 또 하나의 상징이자, 얼굴로 떠올랐다.

푸엔테바케로스에 있는 그의 생가이자 기념관은 조그맣고 아담한 2층 건물로 로르카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잘 보관하고 있었다. 2층에 중요한 것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수많은 시집들과 육필 원고들, 그가 주재했던 연극의 포스터와 악보들이 질서 있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는 피아노를 즐겨 쳤으며 때로는 피아노 앞에서 어린 딸을 안고 피아노를 치기도 했는데, 그 때의 사진들도 피아노 주위에 걸려 있었다. 그의 잘 생긴 용모, 유난히 맑고 광채가 나오는 눈빛, 총과 살육 같은 말과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선량한 얼굴 앞에서 우리는 잠시 엄숙하고 부끄러운 기분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카타로니아의 파블로 카잘스가 그러했듯이 로르카 역시 불굴의 용기와 투명한 감성으로 불의에 맞섬으로써 단순한 시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완성된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그 방에 머무는 동안 그의 체온이 느껴지고 그의 육성이 어디서 금방 들릴 것만 같았다.

‘창에 기대어

머리를 기울이려고 하니

칼날 같은 바람이

머리를 끊으려 하네.‘

로르카의 짧은 시 <창>의 일부분이다. 그 창에 기대어 나도 바깥 거리를 잠시 바라본다. 거리에는 이제 싸움도 갈등도 없어지고 몹시 평화로운 시골 거리 풍경만에 보일 뿐이다. 그 집 정원에는 담쟁이 넝쿨이 무성하게 뻗어 올라 담장을 덮고 있고 하얀 장미꽃 몇 송이가 한구석에 수줍게 피어 있었다. 푸엔테바케로스에서 돌아온 날 저녁 우니는 다시 호텔 지하 카페로 내려가서 하비에르 로페즈가 연주하는 <아나바를 떠날 때>를 들었다. 그것은 슬픈 작별의 노래였다. 이 날따라 평소 덤덤하게 듣던 노래가 유난히 슬프게 들렸다. 그라나다 거리나 골목에 너무 많은 아쉬움을 남겼기 때문일까?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짐을 꾸려 그라나다를 떠났다.(재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