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신의 전말은 이렇다. 환영회 프로가 아직 오픈하기 전인데 실내에는 트럼핏의 잔잔한 음향이 흐르고 있었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한, 참 미묘하고 아름다운 곡이었다. 나는 물론 그게 어떤 곡인지 알턱이 없다. 그런데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안경 쓴
남학생이 갑자기 불쑥 내게 묻는 것이다.
"실례지만 이 음악 어떤 곡이죠?"   앞 뒤 좌우에는 이쁜 신입생 여학생들도 그득 앉아 있다.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힘껏
흔들며 말했다.
'모르겠는데요." ...아 , 기분좋은 첫 모임에서 이 무슨 망신인가?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 안경잽이는
춘천의 명문인 춘천고를 나온 학생이었다. 나야 뭐 중. 고 과정을 대충 건너 뛰었고 게다가 전라도 남쪽 저 시골구석에서만 처박혀
지내다 왔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 치고 이름있는 고교까지 나온 이 친구는 뭔가? 그리고  주위에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명문 출신들이 수두룩 앉아있는데 하필이면 가엾은 나를 골라 질문을 던질 게 뭐람.
 그때 들리던 그 곡은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 가운데 포함된 잘 알려진 소품,<트로이메라이>였다. 이 곡은 중학교 음악교재에도
가사 붙은 노래로 흔히 소개되기 때문에 중학교만 제대로 다녔어도 알 수 있는 곡이었다.
 
 음악에 대한 자기의 무지와 도시의 문명사회에 대한 선망을 다시 절감하는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 초반에 C교수님은 친히
연단에 올라와서 자기가 잠시동안 신입생을 위해 하이든의 실내악곡을 해설로 들려주겠다고 말하고 곧 해설을 시작했다. 
하이든 실내악곡이 들리고 교수님이 중간중간에 간략한 해설을 했는데 나는 그게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도 쉽지 않았다. 다만 교수
님의 해설이 매우 간명하고 그가 음악에 대해 많은 지식과 애착심을 갖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때 교수님에 대한 질투
심에 불타올랐다. 교수님은 세련된 도시의 문명인이고 나는 들판에서 멋대로 딩굴다가 갑자기 도시 복판으로 뛰어든 야만이라는 자
괴감이 나를 엄습했다. 대체 얼마나 노력하면 저 교수님처럼 멋진 인생이 될 수 있을까? 아니, 나처럼 가난뱅이에게 그런 흉내가 가능
하기나 할까?  그 <트로이메라이> 건도 있고 해서 나는 환영회가 끝날 때까지 내내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다.

 내가 졸업할 때까지 C교수님은 학교에 봉직하다가 졸업직전엔가 당시 자유베르린대학 초빙을 받아 가족을 이끌고 독일로 건너갔
다. 그 이전 아직 2학년 쯤 되던 해, 내가 난생 처음으로 무슨 글을 혼자 끄적였는데 누구에게 보여주고 평가를 받아보고 싶었다.
먼저 떠오른게 C교수님이었다. 교수실로 원고를 들고 찾아갔더니 이런 걸 전문 문인에게 보여야지, 자기에게 가져오면 어떡하냐
고 했다. 그때 나는 사실 자기가 좋아하는 교수님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 아니, 어떻게든 교수님에게 다가갈 구실을 만들고 싶어서
그런 글을 밤새워 끄적였던 것이다. 어거지로 원고를 떠맡은 교수님은 할 수 없다는듯 웃으며 며칠 뒤 자기 사저로 와달라고 내게
말했다. 

 교수님 사저 방문을 기다리는 며칠 동안 나는 흡사 연모하는 연인에게 장문의 연서를 보내놓고 그 해답을 기다리는 대책없는 사
내처럼 혼자 가슴을 태우고 열에 들떠 있었다. 교수님은 내가 끄적인 글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는 나라는 인간을 바보, 멍텅구리,
혼자 턱도 없는 망상에 빠져있는 알짜 촌놈으로 간단히 치부해버린 건 아닐까? 그런가 하면 한가닥의 기대감, 그가 나를 인정하
고 가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희미하게나마 마음 속에 감돌았다.
 
 드디어 어느 화창한 날 늦은 오후에 나는 교수님 댁으로 찾아갔다. 에프론을 두르고 아직 새댁 티가 가시지 않은 부인이 나를
앞마루로 안내했다. 마루에서 커피 잔을 놓고 교수님과 나는 마주 앉았다. 결론적으로 나는 거기서 칭찬을 들었다. 내가 기대치
도 못했던 칭찬이었다. 교수님과 헤어져 나와서 길을 걷는데 발길이 너무 가벼워서 마치 공중을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때는
이문동에서 내가 살던 금호동 산동네까지 아주 먼 길을 걸어서 왕래했었다. 그렇지만 그날은 지루한 그 통학길이 전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세상을 모두 얻은 것 같은 기분에 한동안 젖어 있었다.

 대학을 나온 이후 내가 서울의 음악감상실을 순례하던 얘기를 여기 다 옮기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다만 짤막하게
그 이름들만 열거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아마 60년대 초에서 70년대 후반까지 서울에서 존재했던 감상실에는 내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것이다. 오디오기기의 범람으로 지금은 추억꺼리로만 남은 감상실이지만 그 무렵에는 자칭 타칭
각종 문화인들의 집합소였다. 삼각동에 있던 <아폴로>는 고급스런 시설과 분위기로 인기를 끌었고 종로2가에 있던 <르네
쌍스>는 LP음반을 많이 소장했다 해서 유명했다. 아폴로는 내가 한 십년 거의 출근하다시피 했던 곳이다. 명동 성당 맞은편
에 있던 조그만 감상실 <크로이첼>에서는 바흐의 <무반주첼로모음곡>을 처음 들었던 곳으로 특히 기억에 남는다. 뒤에
충무로로 자리를 옮기고 이름도 <티롤>로 바꿨는데 그곳에서도 한시절을 살다시피 했다. 종로에 있던 <뉴월드>, 화신백
화점에서 잠시 문을 열었던 <메트로>, 그리고  <필하모니아>, <SS>,<돌체> 등이 있다.

 흠, 남들은 직장에서 한창 일 할 시간에 팔자 좋게 감상실에서 소일하다니! 이렇게 핀잔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행인지
불행인지 60년대 초에서 70년대 입구까지 나는 타의에 의해 떠돌이생활을 하는 시간부자였다. 그리고 내가 쉽게 갈 곳이
라곤 감상실 밖에 달리 없었다. 어찌 되었건 중학생이면 다 아는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조차 깜깜소식이던 촌뜨기가
연주평과 음반리뷰를 쓸 정도까지 발전하였다. 그것도 한참 지난 옛 이야기들이다. 오래 전 감상관련 책도 두어권 출간한
바가 있다. 나는 처음 냈던 책을 베를린에서 은퇴생활을 하고 계시는 교수님에게 보낸바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C교수님으로부터 받은 충격과 영향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내 장광설이 끝나자, 앞에 있던 교수 세사람이 갑자기 옷깃을 여미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얘길 듣고 보니 앞으로는 학생들 앞에 함부로 나서지 못하겠는데요."
갑자기 교단에 선다는 것이 두려워졌다는 것이다. 언론학 전공인 어느 교수는 나더러
"학교 대강당에 시간을 마련해드릴 터이니 학생들에게 지금 하신 얘길 그대로 들려주시면 어떨까요? '아무개의 스승론'
이란 타이틀로요."
 이런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다만 호구책의 일환으로 교단에 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교사가 되는 것은 남 다른 각오와 자세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사범학교와 사범대학이 따로
필요했던 것 아닌가. 학생들은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교사의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그 맑은 눈동자로 죄
다 놓치지 않고 뇌리속에 비디오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재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