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의 상식과는 달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상극과 같은 체제이죠. 어차피 자본가는 소수일 수 밖에 없는데, 1인 1표제의 평등 선거가 원칙인 민주주의는 매우 위험한 체제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근대화 시기의 자본가들이 보통선거와 평등선거 제도의 도입을 받아들일 때, 어찌보면 그것은 목숨을 건 모험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시장자유주의의 거두 하이에크가 민주주의를 시장경제를 위협하는 위험한 괴물쯤으로 묘사하고, 민주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시장경제를 지켜내는 것이 올바른 정치가의 임무라고 설파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때문인거죠.

사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가장 잘 어울리는 민주주의는, 보유하고 있는 지분만큼 투표권을 행사하는 '주주총회 민주주의'라 할 것입니다. 백만주를 가진 대주주는 백만표를, 10주를 갖고 있는 소액 주주는 10표의 투표권을 갖는 형태이죠. 따라서 수십만을 먹여살리신다는 이건희씨와 편의점 알바생이 똑같이 한표만의 의결권을 가진다는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자본가 입장에서 매우 불평등하고 기형적인 제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자본가들은 민주주의 아래서 살아남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적응할 수 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본가들의 기본 전략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득권정당이 50%의 지지와 득표율을 얻거나, 최소한 제1당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 기준에 미달하면 권력을 쉽사리 내줄것이기 때문에 안되고, 기준을 초과하면 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에 안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피드백하며 균형에 도달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의 선거에서 거대 양당의 대결이 이루어지고, 아슬아슬한 박빙의 차로 여야의 승패가 갈리는 것은 바로 그래서입니다. 

자본가들은 때로는 양보하고, 위험하다 싶으면 자신들의 소득을 줄여 퍼주기를 하고, 반기득권 정치세력을 분열시키고, 그마저도 여의치않으면 지역주의나 세대간 갈등을 불러 일으키고, 외부의 적을 과장하여 위협하고, 언론을 통해 기만하고 회유하고, 성장이냐 분배냐를 놓고 이념투쟁을 유도하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죠. 이명박 정부가 대놓고 친자본 반서민 정책을 수행했던 이유는, 2007년 대선 당시 균형을 초과하는 득표율을 올려 자본가들에게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박근혜가 전향적인 복지 정책을 들고 나온 이유도 균형에 미달하리라는 위험을 느껴 그것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일테고요.

때문에 어떤 나라의 개혁과 진보가 어떤 추세로 발전해 왔는지 살펴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반기득권정당의 변천사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득권정당이 어떻게 변신해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나라의 기득권정당이 수십년째 아무런 변화도 없이 같은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다면, 그 나라는 그 기간동안 조금도 진보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때문에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 민자당 한나라당으로 변신하는 우리나라 기득권정당의 변천사는 한국이 얼마나 역동적으로 진보해왔는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현재의 한나라당과 과거 민주정의당과의 비교 차이는, 딱 그만큼 한국 사회가 진보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기득권정당의 변화를 강제해왔던 호남인들, 자본가들의 선거 전략이 쉽사리 먹히지 않는 호남 민중들의 존재는 그들에게 매우 위협적이고 발톱의 가시와도 같을 것입니다. 어떤 강압이나 회유에도 아랑곳없이 일사분란하게 반기득권정당에 몰표를 던져주는 호남의 유권자들은 한국의 지배적인 자본가들에게는 악몽 그 자체일 거라는 말씀이죠.

어찌보면 그들이 80년 광주에서 벌인 피의 학살은 아직까지도 매우 비싼 댓가를 치르고 있는 셈입니다. 말귀를 도통 못알아먹는, 특별하게 훈련된 유권자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본가입장에서 더 많은 양보와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남때문에 결국 군사독재가 무너지며 끔찍하게 싫어하던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급기야는 권력을 내주는 사태까지 빚어졌습니다. 호남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진보를 추동하는 중요한 동력이자 전위부대인 이유이고, 따라서 호남의 몰표현상을 지역주의라 폄훼하는 민주진보진영 일각의 시각은 그래서 철없고 반진보적인 것이 되는겁니다. 

요즘 범야권의 이합집산이 한창이고, 안철수 바람이 뜨겁습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한나라당은 또 다시 변신하며 무언가 양보를  하겠지요. 우리 사회는 딱 그만큼 진보할테구요. 호남에서 안철수의 지지율이 70%가 넘는다죠? 참 무던히도 집요하고 꿋꿋하신 분들입니다. 안철수를 떠받드는 '깨어있는 시민'들이 일상다반사로 호남의 정치 행위를 지역주의라 폄훼하는데도 개의치 않으신 모양입니다.

안철수 진영은 명심해야 할겁니다. 정치 의식이 칼날같이 예리한 호남인들에게 조금이라도 흐리멍텅한 모습을 보이면 그날로 끝장입니다. 그가 높은 지지율에 취해 호남과 민주당을 대수롭게 대했다가는 순식간에 절벽에서 추락하는 아픔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2002년 그 광풍과도 같던 노무현 바람이 김영삼앞에서 시계 흔들며 아부를 하던 순간 어떻게 꺼져버렸는지 상기를 하시라는 말씀입니다. 진보와 개혁의 주력군을 홀대하고서는 절대로 무사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호남은 범야권의 이합집산 과정과 안철수 바람을 조용히, 그러나 무서운 눈으로 응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