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스승 이야기 전에 잠시 회현동 지하상가 LP 음반점 <크림트> 이야기를 하겠다. '크림트'는 가게 주인 말총머리가 좋아하는
이탈리아 화가 이름이라 한다. 이 가게는 LP 메니아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곳이고 얼마전까지 총각?이던 주인은 괴짜 음악전령사
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가끔 그 가게를 들르는데 그날 따라 여러 고객들이 가게를 찾아왔다. 교수,변호사, 직업불명의 청년 몇 사람, 중
견 기업의 간부직 인사 등.
 이렇게 사람이 모이면 가게 문을 닫을 때쯤 으례 자리를 옮겨 벙개파티를 하게 되는데 그날은 인사동 홍탁집으로 몰려가게 되었다.
가게 주인은 자기 가게에 자주 오는 고객들을 무슨 마피아 처럼 페밀리라고 호칭한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이라도 그러니까 일단
<크림트>의 고객이라면 가족처럼 금방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음반수집과 관련된 재미있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어떤 사
람은 귀가할 때마다 음반을 한아름씩 갖고 들어가는 바람에 집에 발디딜 틈도 없어서 그의 아내가 비명을 지르다 못해 앞으로는 절
대 추가구입은 하지 않는다고 아내 앞에서 맹세를 했다. 그러고는 또 음반을 한아름 안고 들어가다가 대문 쓰레기 통 뒤에 음반을
감춰놓고 문을 열어준 아내와 만났다. 물론 무사통과 했다. 그러고는 피곤해서 깜박 잊고 다음날 새벽에 나가보니 쓰레기차가 벌써
지나갔고 음반도 흔적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는 수만장을 소장하고 있다던가.

 인사동 지하 홍탁집에 자릴 잡고 앉았는데 그날 따라 화제 첫머리가 국내 교육환경에 대한 것이었다. 그무렵에 바로 모 방송에서
교육이 죽었다고 호들갑을 떨며 무슨 켐페인을 하던 때였던 것이다. 공교롭게 그 자리에 교수가 세사람이나 있었다. 잠시 설왕설
래 하다가 자연스럽게 마이크는 그중 년장자인 내 차지가 되었다. 아렇게 말하는 건 벌써 두어사발 마신 막걸리의 도움도 있고 해
서 평소 좀처럼 하지 않던 짓이지만 내가 일방적으로 장광설을 펼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지금부터 얘기가 바로 그때 홍탁집에
서 했던 얘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다.

 오피스텔 창가에 앉아 바깥 하늘을 바라보며 대학시절 선생님의 기억들을 이리저리 순례하던 나는 오직 '한사람의 스승' 을 어렵
지 않게 금방 찾아냈다. 그리고 그 교수님 기억 몇가지를 떠올려보다가 나는 너무도 놀라운 사실 한가지를 발견하고 스스로 망연
자실해서 창바깥 푸르른 하늘을 한참이나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랬었구나! 나는 그 교수님 뒤 꽁무니를 그야말로 밤낮을 잊고 열심히 쫓아왔구나. 그런데 왜 이십수년이나 지난 지금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 "
그 교수님을 닮고 싶은 열망이 그렇게 강했지만 그동안 그 열망은 나의 무의식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행동 하나, 말씨 하나, 걸음걸이까지 나는 그를 닮고 싶었다. 그의 취향과 사고의 방향도 고스란히 이어받고 싶었다. 옷차림, 머리
모습, 면도를 한 말끔한 턱, 이런 것까지 닮고 싶었다.  그러니까 대학 졸업후 이십수년간 결코 순탄하게 살아온 것도 아니고 어떻
게 보면 악전고투의 연속이었지만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의 발자욱을 따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 것이다. 그런데 이십수년이 지난 이제야 자기의 그런 행동궤적을 스스로 깨닫게 되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물론 내가 그를 닮을려고 했던 노력의 성패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오직 그 한 방향으로 꾸준히 걸어왔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평균치 이상의 게으름뱅이로 자처하는 나이지만 그를 닮으려는 노력만큼은 아주 예외적으
로 나는 엄청난 노력파로 살아왔었다. 그건 자기의 본성도 바꿀만큼 그만큼 그를 추종하는 집념이 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른 봄 오전, 대학 신입생의 첫 수업시간. 그야말로 교실에 앉아있는 까까머리 남아들에게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우리는
바로 과주임인 교수의 첫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대학교수라는 사람은 이마에 뿔이라도 난 것일까?
촌뜨기인 나는 그때까지 교수라는 사람을 직접 본 기억이 없었다. 교수님은 어떻게 말을 할까? 교수님은 얼마나 많은 지
식을 갖고 있을까?
 드디어 교수님이 대학독일어라는 교재를 손에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는 마흔을 갓 넘긴 나이인데 파란 양복에 역시
파란 줄무늬의 셔츠, 그리고 빨간 타이를 매고 있고 머리는 가즈런히 가르마로 정리되어 있었다. 턱에는 푸른 면도자욱이 선명
했다. 알맞은 키에 나이에 적합한 몸매, 그리고 무엇보다 이탈리아 배우 루돌프 바렌티노가 현신했나 의심될만큼 잘 생긴
얼굴이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나중에 나이 든 교수님 가운데는 막 잠자리에서 빠져나온 사람처럼 후줄근한 옷차림
과 헝클어진 머리칼로 우리 앞에 예사롭게 나타나는 분도 자주 봤지만 이 교수님은 첫시간 부터 학기가 끝날 때까지
언제나 단정하고 깔끔한 옷차림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는 조용하고 낮은 음성으로 천천히 또박 또박 강의를 이어나갔다. 한마디도 놓칠 수 없을만큼 불필요한 말이 섞이지
않았다. 그는 독일어 기초공부과정의 <대학독일어> 강의 외에 독일문학 강좌로 구스타프 야누크의 <프란츠 카프카와의
대화> 라는 강좌도 맡았는데 그의 간결한 화법은 바로 그 시간에 더욱 빛을 발했다. 나는 비록 촌뜨기였지만 그 시간이
유난히 재미있었고  그 시간이 오기를 늘 기다렸다.
 교수님이 복도를 걸어갈 때 보면 그는 마치 성당의 젊은 사제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절도있게 천천히 걷곤 했다. 우리가
입학당시에 C교수님은 아직 미혼이었는데 직접 확인한 바는 없지만 그가 본래 캐도릭 신부과정에 있다가 세속으로 나
온 사람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그는 우리가 이학년 때 늦은 결혼을 했고 학교 근처 주택을 빌려 신접살림을 차렸다.

 신입생환영회라는 게 있다. 개학이후 대개 한두 달 지난 뒤에 열기도 한다. 우리 독일어과 환영회가 명동의 음악감상실
<돌체>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 <돌체>로 말하면 서울에 있던 음악감상실의 효시격인 명소였는데 당시 국립극장과 명
동성당 사이에 있었지 않았나 기억된다. 내가 음악감상실이란 곳에 처음 입장해본 날이기도 하다. 지하에 자리잡은 그
곳은 실내가 꽤 넓고 아담하고 조용한 분위기여서 음악을 듣기에 제격이었다. 시골에서 청소년기 대부분을 보낸 나
는 그때까지 제대로 된 고전음악을 접해볼 기회조차 없었다. 물론 바흐, 베토벤 의 이름 정도는 알았으나 그들이 만든
음악은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 신입생환영회 자리에서 나는 예쁜 동급생 여학생들 면전에서 운나쁘게도 한바탕 망신
을 당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