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배경이 궁금한 분은 <번역 소비자 연대(http://cafe.naver.com/bunsoyun)>에서 벌어지는 논쟁과 아래 글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번역 소비자 연대>에 있는 글은 카페에 가입해야 볼 수 있다.

 

<나는 번역가다: 노승영 vs. 이덕하 --- 세상의 종말에서 살아남는 법>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9&articleId=672523

 

 

 

도덕적 상대주의(moral relativism)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의미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보겠다.

 

첫째, 도덕적 상대주의에 따르면 객관적인 도덕적 진리는 없다. 따라서 서로 다른 도덕 규범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아무리 성실하게 논쟁에 임한다 해도 결론이 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수학이나 과학에서는 충분히 똑똑한 사람들이 성실하게 논쟁을 하면 진리 또는 진리에 근접하는 지점에서 동의에 이를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있는데 도덕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도덕적 상대주의자다. 나는 과학의 교권과는 달리 도덕 철학의 교권에는 근본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논쟁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도덕적 상대주의는 도덕적 불간섭주의를 뜻하기도 한다. 서로 규범이 다를 때 상대방의 규범을 존중해 주자는 이야기다.

 

나는 이런 의미의 도덕적 상대주의자는 아니다. 즉 나는 도덕적 불간섭주의자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여성 할례(생식기 손상), 명예 살인(바람을 피웠다는 혐의가 있는 여자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죽이는 것),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나는 첫 번째 의미의 도덕적 상대주의자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그 사람의 주장을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두 번째 의미의 도덕적 상대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여성 할례, 명예 살인, 노예제가 옳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며 그런 것들의 폐지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물론 나의 용기와 시간이 허락하는 정도까지만).

 

 

 

노승영 씨와 번역가의 재량에 대해 논쟁을 벌이면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비슷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가의 재량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한편으로 상대주의자다. 따라서 나는 나의 입장이 옳고 노승영 씨의 입장이 틀렸다고 입증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번역가의 재량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다른 한편으로 상대주의자가 아니다. 따라서 나는 나의 입장이 옳다고 이야기할 것이며, 노승영 씨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용기와 시간이 허락하는 한 나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번역, 편역(편집 번역), 축역(축약 번역), 번안 등을 포괄하여 “넓은 의미의 번역”이라고 부르자. 그리고 편역, 축역, 번안 등과 구분되는 것을 “좁은 의미의 번역”이라고 부르자. 이 글에서 그냥 번역이라고 하면 좁은 의미의 번역을 뜻한다.

 

 

 

유치한 수치화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번역을 할 때 원문의 정보 중 몇 %를 옮겨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내가 알기로는 원문의 정보 중 100%를 옮길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번역가는 없다. 번역을 어느 정도 해 보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번역가는 원문에 있는 정보의 99%는 옮기려고 노력해야 번역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편역, 축역, 번안 등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99%를 옮기려고 노력했으나 번역가의 실력이 너무나 부족하여 오역을 많이 해서 90%도 못 옮길 수도 있다. 논의의 편의상 오역의 문제는 제쳐 두기로 하자.

 

어떤 번역가는 95%는 옮기려고 노력해야 번역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어떤 번역가는 90%는 옮기려고 노력해야 번역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어떤 번역가는 80%는 옮기려고 노력해야 번역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

 

어떤 번역가는 50%만 옮기려고 노력해도 번역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이런 주장이 존재할 수 있다).

 

....

 

어떤 번역가는 10%만 옮기려고 노력해도 번역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의 입장은 “95%”인 것 같고, 노승영 씨의 입장은 “80%”인 것 같다(다시 한 번 말하자면 이것은 논의의 편의를 위한 유치한 수치화다. 그리고 노승영 씨의 입장이 “90%”라 하더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나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노승영 씨의 입장대로 작업한 것은 번역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노승영 씨가 틀렸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 다만 나의 생각대로 번역할 때와 노승영의 생각대로 번역할 때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서로 비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번 번역 비교를 통해 두 방식의 장단점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나의 서툰 문장력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나의 단점이지 나의 방식의 단점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입증하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 추측으로는 노승영 씨도 원문의 정보 중 50%만 옮긴 작업은 번역이 아니라 축역, 편역, 번안 등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할 것 같다. 그런데 이 때에도 노승영 씨는 왜 50%만 옮긴 것이 번역이 아닌지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 95%파인 이덕하가 80%파인 노승영 씨의 작업을 보고 “그것은 번역이라고 부를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불관용이라면, 80%파인 노승영 씨가 50%파의 작업을 보고 “그것은 번역이라고 부를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불관용이다.

 

만약 노승영 씨가 번역에 대한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50%파나 10%파가 “우리의 작업도 축역이 아닌 번역이다”라고 이야기할 때에도 그들의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 과연 노승영 씨가 그럴 수 있을까?

 

 

 

세상에는 다수결로도, 논리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내가 보기에는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다. 또한 다수가 노예제를 옹호할 때 소수가 노예제에 반대하는 상황에서 단지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다수가 옳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번역가의 재량 문제도 이런 면에서는 비슷한 것 같다. 이것은 논리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그리고 이것은 다수결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즉 다수가 “좁은 의미의 번역”을 어떤 식으로 정의하느냐를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이덕하

2011-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