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지인 중에는 나이 지긋한 민주노총 소속의 활동가 한 분이 계십니다.  민주노총에서 그 분이 담당하시는 일은 청소노동자들의 처우개선 활동인데, 지난번에 큰 이슈가 되었던 홍익대 청소노동자 파업 투쟁의 실질적인 배후(?) 인물이시죠. 당시 배우 김여진씨 같은 분은 적극적인 지원으로 '소셜테이너'의 모범이라며 세간의 주목이라도 받았지만, 그 분은 그야말로 고생은 직싸게 하면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한 셈인거죠. 

그 분과 제가 인연을 맺은지도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군요. 그 분과 저는 이른바 '파업 동지'였습니다. 그 분은 노조위원장이었고 저는 그 분의 참모였습니다. 그 분은 생짜 노동자였고, 저는 좌경용공 빨갱이 불순세력(?) 이었죠. 물론 제가 그 분을 의식화했다거나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그저 용기를 북돋아주고 파업투쟁의 정당성을 가볍게 이야기했을 뿐이죠.

어쨌든 당시의 파업 투쟁이 승리하면서, 그 분의 인생이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40% 임금 인상이라는 놀라운 성과앞에서 그 분은 어린애처럼 기뻐하셨죠. 얼마후 그 분과 저는 헤어졌지만, 그 분의 소식은 간간히 바람따라 들려오곤 했습니다. 민주노총의 상근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지도 벌써 오래전이네요.

몇달전 우연찮게 연락이 닿아서 그 분과 정말 오랜만에 가벼운 술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당시 삼십대의 혈기넘치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반백의 머리와 상처같은 주름살만이 가득한 초로의 중년으로 변하셨더군요. 그런 자리에서 흔히 오가기 마련인 거대 담론과 정치이야기는 전혀 없이, 그저 서로의 일상과 안부를 묻기에 바빴습니다. 그 분의 끝도 없는 '효자 아들' 자랑을 들어야만 했으니까요.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제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형수님도 참석을 하셨습니다. 당시는 어린 아이를 등에 업은 풋풋한 새댁이셨는데, 이제는 며느리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웃으시더군요. 검버섯이 핀 형수님의 얼굴에 호구지책에는 전혀 관심 없는 남편과 살면서 겪었을 삶의 고단함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그 분들의 삶에 어쩌면 저 역시 책임이 있다면 있을테지요. 만약 그 분들의 인생에 제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술자리를 파하고 집에 오면서, 여러가지 상념이 흐르더군요. 그 분은 자본주의가 낫느니 사회주의가 낫느니 NL이니 PD니 그런거 전혀 모릅니다. 그저 그 분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최저 임금도 못 받는 나이 든 청소 아줌마들의  몇푼 임금 인상에 당장 회사가 망할 것처럼 죽는 소리하고, 청소로 더러워진 작업복때문에 마땅히 쉴 곳도 없는 분들에게 허름한 휴게실 하나도 안해주면서, 지들 똥 오줌 치우는 일까지 오만가지 더러운 일은 다 부려먹는 그 새끼들은 정말 양심 없는 나쁜 새끼들 아니냐?" 는 짧은 한탄이었습니다. 온갖 유명짜한 이론가들과 활동가들이, 온갖 정치인들과 폴리페서와 소셜테이너들이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현장에서, 그 분은 몇줄도 안되는 그 신념 하나로 삶의 절반을 버텨오신거죠. 

솔직히 저는 그 분께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그만하시고, 아주 아주 이기적으로 남들 어찌 사는지 신경도 끄시고 그저 두분 즐겁고 행복하게만 사시라고. 그렇게 살아도 무슨 죄 짓는거 아니라고 말이죠. 그런데 차마 못하겠더군요. 어쩌면 저는 그 분을 10년쯤 뒤에나 다시 뵐 날이 오겠지요. 그 때도 여전히 그 분은 지금처럼 살고 계실테고요. 




뱀발) 그 분에게 들은 이야기 한 토막. 대부분 용역업체 소속인 청소노동자들의 단체교섭을 위해 그 분은 사용자 회사의 계약 담당 직원들과 실랑이를 자주 해야 한다네요. 어느날도 그렇게 사용자 회사의 직원들과 '시급 몇푼 인상'을 놓고 실랑이하고 있는데,  마침 그 사용자 회사의 노동쟁의 기간이었답니다.

용역업체 청소노동자들의 시급 인상을 놓고 사용자의 논리로 피도 눈물도 없는 협상을 벌이던 그들이, 정작 자신들의 노동 쟁의를 위해 주머니에서 빨간 머리띠를 주섬 주섬 꺼대더랍니다. 우리 시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뉜 씁쓸한 현장을 전해듣는거 같아서 기분이 참 묘하더군요. 그러나 그들 또한 무슨 죄이겠습니까. 그들도 역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헉헉대며 살아가는 힘없는 노동자에 불과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