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은 기쁘고 아무런 불상사없이 마무리된 것이 다행입니다.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 없이 함부로 정리해고하지 말라는, 어쩌면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과도 같은 최소한의 요구를 위해서 그렇게 목숨을 거는 투쟁을 해야만 하는 사회는 결코 정상이 아니죠. 이익은 자본이 취하고 손해는 노동자들과 국민들이 감수해야하는 지금의 모습은 자본주의의 논리로도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굴의 의지로 자본의 범죄를 폭로하고 승리하신 김진숙씨에게 열렬한 축하를 보냅니다. 더불어 연대의 정신으로 투쟁에 동참한 많은 시민들과 노동자들도 수고하셨구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그래도 김진숙씨는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 없이는 해고할 수 없는 정규직이기 때문에 크레인 위에라도 올라가서 저항할 수 있었고 승리도 할 수 있었겠지만, 아무 때나 해고가 가능하고 그래서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소모품 인생인 비정규직들은 어떻게 할거냐라는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김진숙씨가 겪었던 해고의 고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비정규직들이 600만 혹은 1000만을 넘어가고 있는 시대에, 진보의 모든 역량이 그 분에게 집중되고 있는 모습도 저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김진숙씨는 특혜를 누린 것이죠. 정말 저 분이 우리 시대 노동의 문제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 과연 맞는가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문제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경기 변동은 점점 극심해지는 가운데 이윤 창출의 기회는 점점 줄어드는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리해고 문제는 자본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과거와 같은 자본주의 성장기에는 기업들이 호경기때 비축해놓은 체력으로 불황기에도 해고를 하지않고 견뎌내는게 가능했지만, 지금은 아니라는거죠. 그래서 구 노동법에는 경영상의 이유로도 해고하는 것이 불법이었지만,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있으면 가능하게끔 법률이 바뀌었죠. 분명 진보의 후퇴가 맞지만, 아직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자본의 생존 문제는 국가 존망의 문제와도 같은 거라서 노동자들도 어쩔수 없이 양보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본은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니죠. 정규직만으로는 일시적으로 생산이 증가할 때 대응할 수 없다는 논리로 비정규직을 만들어냈고, 역시 그러한 논리로 하청 생산도 활성화시켰습니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과 하청 생산을 '자본의 생존'이라는 핑계로 확보해놓고, 그것을 본래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윤의 확대'를 위해 사용하는 편법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자 기업의 이윤을 기술 축적이나 R&D 공정의 효율성등으로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노무 비용의 절감을 통해 확보하려는 '최악의 무능 경영'이 '최상의 경영'인 것으로 뒤바뀌는 상황이 되었고, 자본은 더 이상 생산력의 발전으로 인류 사회에 기여하는게 아니라 고통과 불안 혼란을 가중시키는 악당이 되었습니다. 김진숙씨의 크레인 농성은 그런 자본의 막장화라는 배경위에서 벌어진 사건인거죠. 

결국 해법의 대강은 이렇습니다.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의 증빙 요건을 보다 현실성있게 마련하고, 그야말로 임시적으로만 필요한 일자리가 아니라면 비정규직 채용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하청으로 생산하는 비용이 직영으로 생산하는 비용보다 더 높도록 해야만 하리라고 봅니다. 열거한 3가지가 그야말로 '자본의 생존'을 위해서만 사용될 수 있고, 초과 이윤의 증가를 위해서는 사용할 수 없도록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것이죠.  이것은 결국 정치적 헤게모니의 문제이고, 시민들과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정치적 연대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김진숙씨 승리가 전해주는 중대한 교훈이기도 하구요.

뱀발) 글을 쓰기 위해서 김대호 소장의 한진중공업 관련 글 몇개를 읽어봤는데 기가 막히더군요.  '정리해고가 자유로워야 비정규직들도 살만한 세상이 된다'는 기상천외한 주장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비정규직들이 겪는 모든 고통의 근원이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어서인데, 이 무슨 해괴한 순환 논리도 아니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