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확실히 안철수는 현실 정치와 시사의 구체적인 이슈에 대해 자신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명확하게 밝힌 적이 없다. 안철수가 천안함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믿고 있는지, 아니면 조작된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지금 시점에서 한미 FTA 를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 것인지 아닌 것인지,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이며, 현 정권의 통일 정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혹은 해묵은 이슈인 국가 보안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등등에 대하여 - 내가 과문해서 그런건지 몰라도 - 나는 들어본 바가 거의 없다. 안철수가 현실 정치인 - 적어도 행정가가 되어 보고 싶다는 가능성을 내비치며 스스로 커밍 아웃하기 전까지, 안철수는 대중들에게 - 그리고 아마도 그 자신에게도 - 현실 정치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여지고 사유되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아마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철수의 커밍 아웃은 다른 어떤 경우보다도 대중들에게 신선한 사건으로,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졌으며, 적어도 현 시점에는 안철수는  현실 정치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유의미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현실 정치에 전혀 발을 담가 본 적이 없고 또 앞으로도 그럴것 같지 않던 사람이, 정치를 해보겠다고 하고, 또 거기에 대중들이 열광적으로 호응하는 현실, 이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정치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가끔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현상과 메카니즘을 가지고 나타나는가? 도대체 정치란 무엇인가? 현 시점에서 한 번 던져볼  만한 질문이다. 이 질문이 제기하는 물음에 나름 만족스러운 답변을 내어 놓을 수 있을때, 우리는 정치의 본질에 아마도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2. 

정치란 무엇일까? '정치 권력 획득을 목적으로 정당 구조 속에서 정책과 세력을 매개로 서로 대립하고 투쟁하는 정파들의 행위의 장', 현실 정치를 규정하는 말로서 이 정도면 그럴 듯 하게 들린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이것은 정치의 내용적 정의라기 보다는 정치가 구현되는 형식과 틀을 규정하는 형식적 정의에 더 가깝다. 그런데 이런 형식적인 정의는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행위를 다 포괄하지 못한다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정당에 몸담고 있는 정치인의 말과 행동만이 정치적인 것인가?  <나는 좌파가 뭔지 모르지만, 길거리에서 유기된 동물들을 마음대로 패고 죽여도 벌금 50만원으로 끝나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팠다>는 이효리의 언급은 정치적인 것이 아닌가? 정당 정치의 틀에서 포착되는 현상들만 '정치적인  것' 이고 그것이 아닌 나머지는 저절로 비정치적인 것으로 규정되는 것인가?  

세상의 모든 단순하지만 큰 질문들이 그렇듯이,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이 질문을 이론적, 추상적인 관점에서 바라 보았을 때, 특히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고려해야 하는 사태들의 다양성, 국면의 다층성을 고려해 보았을 때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가 더 덧붙여 져야 한다. 이 질문은 쉽게 답할 수 없는 어려운 질문이지만, 그것은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 때 느끼는 난해함과는 다른 차원의 난해함이다. 왜냐하면 정치란 무엇인가에 관해 누구나 어느 정도는 그 질문에 대한 입장과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뭐다라고 말할 수 없지만, 자신의 삶을 규정해 왔고 규정하고 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희미하고 어렴풋한 인식, 정치를 추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각자의 삶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넓은 의미의 정치는 거칠게 말해 결국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관한 자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효리의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삶의 정치성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물과 사태, 그리고 그것들을 둘러싼 환경의 어떤 모순성에 대한 자각으로 부터 나타난다. 그러한 모순성이 현실 정치적인 제도와 담론에서 연결되고 표현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자신이 세계에 던지는 물음이 아니라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 세계가 자신에게 오래 전부터 던져왔던 질문을 그 사람이 뒤늦게 자각하게 되는 형태로 각자에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현실 정치에 무관심한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신이 완전하게 비정치적인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내 삶의 비정치적인 면은 타인의 삶의 정치적인 면과 완벽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아끼고 사랑하는 동물들이 느끼는 고통은 그 고통이 50만원정도의 벌금의 값어치 밖에 안된다고 생각하는 입법자 -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대중 - 의 무시무시한 냉담함과 결합되어 있다. 

이렇게 자신의 삶이 타인들의 삶과의 집단적인 상호작용에 의해서 구성되는 한  인간은 그 누구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좁은 의미의 정치의 영역은 각자의 삶의 다양성, 상대성, 그리고 어느 정도의 이해 불가능성을 감안하고 나서 추출되는, 상호적으로 명확하게 인식되는 갈등과 이익 충돌의 영역을 좁히고 좁혀서 나온 결과물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 정치, 혹은 기존의 현실 정치가 담아내지 못하는 의제라고 해서 그것이 비정치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인식은 그러한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것 , 즉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의 어두움과 무지 속에서 미쳐 인식되지 못한 채 놓여져 있었던 모순들을 새롭게 자각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3. 
 
  나는 거의 8년째 안철수 바이러스 백신을 이용하고 있는 유저이긴 하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는 내가 가진 정치인 안철수에 대한 호감을 설명할 수 없다. 예컨대 성공한 컴퓨터 백신 사업가라는 이미지만을 가지고서는 정치인 안철수가  지금 나에게 끼치는 정치인으로서의 영향력을 설명할 수 없다. 가만 생각해 보니 안철수에 대한 호감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몇 년 전에 읽은 안철수의 어머니 이야기가 담긴 어떤 기사 때문이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안철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에게 처음부터 존대말을 썼다고 한다. 지금보다 한 두 세대 전의,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던 한국 사회에 살던 사람이 자신의 남편이 아닌 자신의 아들에게 존대말을 쓴다는 것..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학교 마치고 돌아오는 여덞 아홉살 배기 자기 아들에게 <오늘은 학교에서 어떤 것 배우셨어요?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했어요?> 라고 미소를 띄며 물어보는 엄마를 상상할 수 있는가? 안철수가 어머니의 그런 교육의 영향 때문에 자기 회사 직원들에게 - 아무리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사람이더라도 - 말을 결코 놓지 않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안철수가 어머니의 교육으로부터 나중에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말의 형식 속에 녹아 들어 있는, 타인에 대한 존중 -이런 것들이 아닐까? 주변에 나이 좀 많이 먹었다고, 선배라는 이유만으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놓는 못 되쳐 먹은 몇몇 찌질이들의 행동 거지와는 너무도 격이 다른 이런 행동들..그리고 그 행동에 담긴 사고 방식들. 나는 설사 안철수의 어머니가 어떤 정치적 어젠다에 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삶이 그 누구보다도 정치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식들을 미국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어떻게 길렀는지에 대한 수 많은 성공한 어머니들의 스토리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 - 자신과 타인의 삶에 대한 공정한 존중심이 그녀의 교육 방식 속에 녹아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공적 가치의 근본적인 기초로서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 이 체화된 교육 방식이 안철수의 다른 인생 이력들과 잘 맞물려서 '별다른 정치적인 행위를 한 적은 없지만, 삶 속에 공적인 가치를 이미 체현하고 있는, 신뢰할 만한 사람' 이라는 이미지 - 안철수의 가장 큰 정치적인 자산 - 를 준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책보다는 신뢰이며, 이런 신뢰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의 이력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는 것, 박근혜가 보수의 아이콘이 된 것이나 안철수가 몇 마디 언행들 만으로도 태풍을 몰고 오는 유력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이유는 어떻게 보면 본질적으로 동일한 메카니즘을 통해 생성된 것이다. 우리 나라 사회에서, 특히 주류 사회에서는 신뢰를 자산으로 가지고 성공하기가 무척 어렵다. 꼼수의 상징으로 현직 대통령이 공개적인 조롱의 대상이 되는 이 정치 현실. 바닥난 공적인 신뢰 속에서 신뢰를 자산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정치인들을 대중들은 찾고 있었고, 대중의 이러한 갈망이 안철수라는 인물을 통해 온전히 채워지게 된 것. 안철수 현상을 설명하는 여러 키워드들이 있지만 나는 안철수 신드롬의 본질이 무엇보다 여기에 있다고 본다. 소셜 커뮤니케이션이나 네트워크는 단지 안철수 현상을 가속화한 하나의 촉매적인 형식일 뿐이고, 그것이 본질은 아니다.  현정권이 실패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공적인 가치를 집행하는 사람들 - 정부, 정당, 각료, 언론, 그리고 검찰 -이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과의 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정당과 세력들 간에 공적인 신뢰를 구축하는데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철수나 박근혜나 결국 이런 정치현실을 배경으로 -시차를 두고 -등장한 것이다. 

 4. 

그러므로 안철수를 우리 나라에서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지도 않은, 자수 성가한 혁신적 기업가의 한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안철수 현상을  현실의 정당 정치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안철수 현상, -그리고 3, 4년 전부터 고착된 박근혜 현상 - 에 대한 실마리를 모두 놓칠 수 있다. 사람들 각자가 가진 정치적인 의제는 모두 다를 수 있다. 김어준이 잘 지적했듯이, 사람의 마음은 모두 어느 정도는 한정된 자산이다. 이효리처럼 유기되는 동물들을 더 강력하게 보호하는 법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인 의제가 될 수 있고, 영남 패권주의 - 그것이 무늬만 개혁적인 색채를 띄는 것이든 아니면 노골적으로 보수적인 패권성을 드러내는 것이든- 를 박살내는 것이 정치적인 의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동물 보호 운동론자들이 지역패권주의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다고 해서 그 자체로 동물 보호 운동론자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전자가 현실 정치적인 담론에 후자만큼  결합되지 않았다고 해서, 덜 정치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건은 정당 구조 안이든 아니면 정당 구조 밖에서 발생되는 정치적인 의제이든 간에 서로 다른 여러 정치적인 가치들이 공론장 속에서 온전히 상호 소통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인 가치들이 교류되고 이해되는 폭이 우리 나라 정당 내부에서는 매우 미약한 것 같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큰 이유는 서로 다른 정치적 이해관심을 가진 사람들 간에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정치적인 문제라고 생각되는 의제들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이 서로 중첩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호 인정하고, 그런 인정을 토대로 발전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현실에 기반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자질 중의 하나는 이런 정치적인 가치들이 잘 소통되기 위해 필요한 합리적인 의사소통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상호 신뢰이다. 유권자들은 정치인들의 말과 정책, 그리고 그가 몸담고 있는 정치 세력만 보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신뢰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누가 가장 적합한지도 본능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맑은 물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물을 실어 나를 수 있는 관이 부패되어 있다면 그 관을 통해 전달된 물 역시 안심하고 마실 수 없는 것처럼, 정책보다는 그 행위의 본바탕에 놓인 정치인에 대한 신뢰가  정치인에 대한 지지의 토대를 만들어 낸다. 역설적인 것은 그런 신뢰에 대한 대중의 욕구가 가장 강하게 소환되는 토대는 바로 공적인 신뢰가 바닥을 친 상황일 때라는 것이다. 안철수 현상은 바로 이러한 시국의 상황이 낳은 아들이다. 우리의 가카가 아니었다면 어찌 안철수 신드롬이 만들어 질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