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쉽게 쓰는 것이 정말로 쉽지 않네요. 글을 어렵게만 써온 저에게는 글을 쉽게 쓴다는 것이 정말로 어려운 일로 다가오네요. 이번 글은 쉽게 읽힐 수 있지 싶습니다.


제목은 <칸트의 미학>이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칸트의 비판철학에 대해, 그리고 칸트 전체에 대해 독자들이 흐름을 잡을 수 있지 싶습니다. 물론, 푸코에서 서둘러 멈춤으로써, 그 다음 글을 기약해야하긴 하지만요.

아래의 내용은 칸트에 대해 랑시에르, 발리바르, 푸코가 칸트를 읽어내는 바를 정리한 글입니다. (중요한 전거가 되는 글은, 랑시에르의  <Thinking between disciplines: an aesthetics of knowledge>,발리바르의 <What makes a people a people?: Rousseau and Kant>입니다.)

 

먼저 랑시에르의 칸트를 설명하면, 미학적, 혹은 반성적 판단은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의 결정하는 판단(determinate judgment)과는 다릅니다. 즉, "A is B"라는 순수 이성의 판단과 "A is good"이라는 실천이성의 판단이 대상에 대해 결정하는(determinate) 것과는 다르게, "A is beautiful"이라고 말하는 미학적 판단은 대상이 어떠한지를 들어내기 보다는, 오히려 주체가 어떠한지를 들어냅니다. 그래서, 미학적 판단은 주체적이고(subjective)이고, 반성적이죠(reflective, 즉 주체의 시선이 대상으로부터 주체로 되돌아오는...). 그래서, 이러한 미학적 판단은 형용할 수 없는 어떤 대상과 마주치면서, 자연(nature)을 대상으로 하여 "A is B"라고 판단하는 오성(understanding)의 영역, 그리고 자유, 도덕을 대상으로 하여 "A is good"이라고 판단하는 이성(reason)의 영역이 법접할 수 없는 대상의 (그리고, 그 대상으로부터 반성적으로, 주체의) 어떤 측면을 판단하는 판단이 될 것입니다. (랑시에르는 이에 대해, "미학적 인식(apprehension)의 대상은 지식[순수 이성]의 대상으로도, 욕망[실천 이성]의 대상으로도 특징지워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이 미학적 판단은 어떠한 개념도 없이(without concept), 기존에 존재하던 규범들로부터 독립하여서, 기존에 확립된 “사회적 경험의 규범적 조건들을 유예시키면서”(랑시에르), 주체의 대상에 대한 “경험”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놓는 것이죠.


칸트에 있어서 이 새로운 차원은, 앞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인간성(humanity), 혹은 sensus communis(common feeling), 보편적 소통가능성(universal communicability)의 차원입니다. 즉, 주체가 형용할 수 없는 대상의 아름다움, 숭고함과 마주치면서, 주체는 “이 꽃은 아름다워”라는 탄성을 자아내면서, 이 주체는 자신의 이러한 느낌(feeling)이, 이렇듯 개념도 없는 느낌이, 규범도 없는 느낌이 다른 주체와 이러 저러한 방식으로 교환될 수, 소통될 수 있는지를 느끼는 것이죠. 그래서 이 미학적 판단은 이와 같이, 자연의, 우주의, 인간성의 위대함을 느끼는 것에 다름아닙니다.


하지만, 칸트에 있어서 아름다움에 대한 미학적 판단의 네 가지 설명 방식, 즉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 기존의 이해관계와는 거리가 먼…),목적 없는 목적성(finality or purposiveness without a purpose), 보편성(universality), 필연성에서, 랑시에르는 위에 소개한 글에서, 앞의 두 가지를, 즉 무관심성과 목적성을 끄집어내 설명합니다.


그래서, 랑시에르가 말하는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미학적 판단, 혹은 미학적 지식, 혹은 미학적 경험이 어떤 공통성(commonality)을 지닐 지언정, 보편성과는, 혹은 보편적인 인간성, 보편적인 소통가능성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제시하죠 (랑시에르는 이러한 미학적 경험은 철학자, 사회학자가 상정하는 무관심한 보편성(disinterested universality)과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즉, 랑시에르는 칸트가 제시하는 미학적 판단의 보편성, 초험성(경험을 넘어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적 소통가능성)이 아닌, 미학적 판단의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을 부각시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전에 존재하던 세계와는 다르게 세계를 새롭게 구축하는 노동자의 미학적 시선에 대해서 얘기를 합니다. 랑시에르는 이 미학적 판단, 노동자의 미학적 시선이, “살어진 상황(lived situation)”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과 가시성의 형식들과 사유의 능력들 사이의 관계를 재고 안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푸코가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에서 주체의 “살어진 경험(lived experience)”을 특권화하는 (칸트로부터 유래하여, 훗설, 하이데거로 연결되는) 현상학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살어질 수 없는(unlivable)” 경험들의 차원인, 죽음, 범죄성, 광기, 성을 다루는 방식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발리바르의 칸트는 간단하게 정리하면, 칸트에 있어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 사이의 대립과 모순이, (순수 이성의 대상인) 자연과 (실천 이성의 대상인) 자유 사이의 대립, 정서적 성향(affective inclination)과 선의지(good will) 사이의 대립이 어떻게 인간성, 세계 시민적 공동체, 정언 명령, 내 안에 있지만 나를 넘어서 있으며, 나의 의지와는 동일시할 수 없는 대타자(초자아, 법), 혹은 대타자의 목소리, 양심의 목소리, 보편적 주체성, 보편적 소통가능성에 의해 해소 될 수 있는지를 발리바르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 각각의 한계와 그 둘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으로서의 미학적, 반성적 판단을 제시합니다 (그 책의 서문에서 여러 차례 강조하는 사실이며, 서문의 마지막에서, 칸트가 그려 보이는 “도표”에서, 미학적 판단을 실제로, 순수 이성과 실천 이상의 중간에 위치시키기도 합니다). 여기서, 랑시에르가, 미학적 경험의 대상은 순수 이성의 대상도, 실천 이성의 대상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연결 시킬 수 있겠네요. 이와 같이, 자연과 자유의 모순을 해소하는 것으로서의 미학적 판단은 발리바르가 (그리고 칸트가) 언급하는 양심의 목소리, 인간성, 총체성, 보편적 소통가능성이 되겠죠. 여기서, <<판단력 비판>> 서문에서 제시하는 미래에 도래할 철학의 문제가, 칸트의 세 비판서가 제시하는 초험 철학의 문제 설정이 미래에 도래할 철학을 통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칸트에 있어서 어떻게 인간학(anthropology), 세계 시민적 공동체, 역사, 국가를 통해 구현될 수 있는지를 (혹은, 그것의 실패를) 묻는 것이 발리바르의 문제 설정이 되겠죠.

 

그리하여, 푸코는 칸트의 세 비판서가 제시하는 초험 철학의 질문들, 즉,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순수 이성)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실천 이성)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판단력 비판) 라는 질문들이, 인간학의 질문,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이면서, 근대에 어떻게 철학적-인간학적 사유가 탄생하는지를, 초험적-경험적 이중체(doublet)로서의 인간이 탄생하는 지를, 인간의 유한성(생명, 노동, 언어)이 무한정한 해석을 통해, 인간에게 무한성이 부여되는 지를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