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희의 Mr.베이스볼] 김응룡 회고록[1] ‘나는 대한민국 1호 연습생이었다.’

기사입력 2011-08-10 15:11 |최종수정 2011-08-17 15:16





해태 타이거즈 'V9'의 주인공 김응룡 전 해태 감독(사진=스포츠춘추)

‘야신’, ‘야왕’, ‘야통’. 이상은 프로야구 감독의 별명들이다. 하지만, 이런 별명 없이도 한국시리즈 우승 10회와 통산 1천476승을 거둔 감독이 있다. 김응룡 전 해태·삼성 감독이다.

1983년 해태 감독으로 지휘봉을 잡은 이후 김 전 감독은 2004년 삼성 유니폼을 입고 은퇴할 때까지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명장으로 꼽혔다.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부터 불렸던 ‘코끼리’란 별명에 만족할 뿐 그 이상의 찬사를 원하지 않았다.

지난해 삼성 사장에서 물러난 이후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는 김 전 감독은 자신의 60년 야구인생을 “바람”으로 비유했다. 인생의 단맛을 느끼게 하는 선선한 바람이 불다가도 어느 순간엔 살점을 뗄 만큼 강력한 폭풍이 불어 사는 게 그리 쉽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무엇보다 인생의 그 모든 영원할 것 같던 현장이 결국 바람처럼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아쉬움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감귤내음이 진하게 배인 제주에서 김 전 감독을 만났다. 현역시절 냉혹한 승부사로 명성을 떨쳤던 김 전 감독은 제주에선 웃음 많고, 해맑은 70살 야구소년이었다. 인터뷰는 장시간 진행됐다. 김 전 감독은 “고문을 받는 기분”이라면서도 60년 야구인생의 뒷이야기를 모두 털어놨다. [박동희의 Mr.베이스볼] 김응룡 회고록은 3회에 걸쳐 연재된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랜만에 봬서일까요. 삼성 사장으로 현직에 계실 때보다 얼굴이 좋아 보이십니다.

요즘 제주도에서 걱정 없이 살다 보니까 얼굴이 좋아졌나(웃음). 듣기에 나쁘진 않네(웃음).

그런데 몸은 좀 야위신 듯합니다.

(손을 가로 저으며) 말도 마라고. 얼마 전에 대상포진에 걸려서 진짜 죽다 살아났어. 난 말이야. 무슨 뇌졸중이 왔나 싶어서 사진들을 ‘막’ 찍었거든. 그런데 알고 보니까 대상포진이지 뭐야. (혀를 차며) 아, 무지 고생했어.

오늘은 제가 사장님께 옛날 야구 이야기를 들으려고 왔습니다. 사장님이야말로 프로야구 30년사를 비롯해 한국야구를 반추하는 데 있어 가장 적임자가 아니실까 싶습니다.

옛날이야기? 그건 늙은이들이나 하는 일이야. 보라고, 난 아직 안 늙었어(웃음). 그리고 사장은 무슨, 그냥 다른 걸로 불러.

알겠습니다. 그럼 감독님이라고 하겠습니다. 감독님 고향이 원래 평안남도 평원이시지요?

그렇지. 내 고향이 원래 이북이지. 호적엔 1941년생으로 돼 있는데, 원래는 1940년에 평원에서 태어났다고.

원래는 야구가 아니라 축구선수로 뛰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이북서 초등학교에 다닐 땐 축구선수였어. 삼촌 되시는 분이 축구선수였거든. 그 양반 보면서 축구선수가 되자고 다짐했지.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감독님을 둘러싼 그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내가 그때 초등학교 3학년생이었을 거야. 그때 이북에선 ‘남자들은 죄다 의용군으로 끌려간다’는 소문이 났었어. 온 가족이 이남으로 피난을 떠나기로 했지. 원래는 1·4 후퇴 때 아버지, 어머니, 형, 나, 누이들이 같이 떠나기로 했다고. 그런데 어찌하다 보니까 아버지와 나, 큰 누나가 먼저 피난길을 떠나게 됐어. (한숨을 내쉬며) 솔직히 난 그때 아버지 따라 평양 가서 전차를 한번 타보고 싶었거든. 어머니, 형제들과도 금방 재회할 줄 알았고. (다시 한숨을 내쉬며) 어디 그게 마지막이 될 줄 알았나.

피난길의 종착지가 부산이셨지요.

그랬지. 어찌어찌 가다 보니까 부산까지 가게 됐다고. 그래 부산 개성중학교에 입학했지.

개성중에 입학하면서 야구를 시작하신 건가요.

개성중에 입학해서도 처음엔 축구를 했다고. 그런데 교장선생님이 야구를 무척 좋아하시는 양반이었어. 교내 체육대회가 있으면 ‘꼭’ 반 대항 야구경기를 시키셨다고. 하루는 반 대항 야구경기를 하는데 그걸 야구부 주장이 봤나 봐. 날 보더니 다짜고짜 “넌 인마, 오늘부터 야구선수야”하는 거야. 뭐 그런가 보다 했지. 아, 그런데 그때 시작한 야구를 지금까지 할 줄 누가 알았겠어.

1950년대는 전쟁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을 때입니다. 장비가 이것저것 필요한 야구를 하기엔 사정이 좋지 않은 시절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야구부에 들어갔는데, 유니폼이 광목으로 만든 거였어. 슬라이딩 한번 하면 그냥 찢어지더라고. 그걸 누이가 밤이면 밤마다 꿰매주고, 다림질을 해줘서 입고 다녔다고. 그리고 그때 야구공이 어딨고, 빠따가 어딨어. 기껏 있어봤자 공 두 개, 빠따 한두 자루가 전부였지.

공이 없어지거나 배트가 부러지면 낭패였겠습니다.

다 공급원이 있었지.

공급원이요? 학교 근처에 체육사라도 있었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최고의 체육사가 있었지. 어딘지 알아? (모른다고 하자) 학교 근처에 미군부대가 있었다고. 미군부대에서 야구경기를 하면 야구부 오야붕이 ‘넌 인마 저기 글러브 갖고 뛰고, 넌 공 갖고 튀어’하고 시킨다고. 그때 미군 부대엔 지금처럼 철조망이 없었거든. 그럼 미군들 경기할 때 공수교대하잖아. 그때 몰래 들어가서 글러브 훔쳐서 나오고, 파울볼 되면 공 주워다 주는 척하면서 뒤돌아서서 갖고 튀고 그랬어(웃음). 우리 세대가 다 그렇게 하면서 야구를 했다고.

야구부원이 되면서 허기진 배는 채우셨을 것 같습니다.

(고개를 저으며) 아니야. 아니야. 하도 못 먹어서 그때 내 별명이 뭐였는지 알아? 학다리였어, 학다리. 빼빼 말랐다고 말이지. 부산상고(현 개성고)로 진학해서 누가 뭐 맛있는 거 사준다고 하면 내가 뭐 사달라고 했는지 알아? 내가 이북 출신이니까 얼마나 냉면이 먹고 싶었겠어. 그래도 난 무조건 돼지국밥을 사달라고 했어. 어떻게 해서든 살을 찌우고 싶었거든.

1960년 부산상고 시절의 김응룡(사진 왼쪽에서 두번째). 사진 맨 오른쪽이 어우홍 부산상고 감독이다. 김응룡은 1977년 슈퍼월드컵 우승 때 한국 대표팀 감독이었고, 어우홍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당시 한국 대표팀을 이끌었다(사진=김응룡 제공)

부산상고 시절 고교무대에서 이름을 날리신 걸로 압니다.

중학교 때는 전국대회 우승도 하고 했는데, 고교 땐 그 흔한 우승 한 번 못해봤어. 부산상고도 부산에서만 잘했지, 서울만 올라가면 죽을 쒔어. 정작 부산상고가 우승한 건 나 졸업하고 강병철(전 롯데 감독)이 뛸 때였지.

고교 때 포지션은 주로 어디였습니까.

투수, 포수, 1루수 다 조금씩 했어. 물론 빠따 칠 때는 4번 타자였지.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난 말이야. 중학교 때부터 한일은행에서 은퇴할 때까지 평생 한 번도 번트를 대본 역사가 없어. 정말이야. 야구인들 잡고 물어보라고.

그만큼 강타자였다는 뜻인데요. 1960년 부산상고 졸업 후, 대학 진학을 뒤로하고 실업 행을 택하셨습니다. 당시 실업이 지금의 프로라고 친다면, 고교 강타자가 바로 실업에 가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습니다.

허허. 그거 몰라?

네? 뭘?

내가 대한민국 야구계에서 최초의 연습생 신화를 쓴 사람 아니야(웃음).

연습생이요? 아니 왜….

왜는 무슨 왜야. 갈 데가 없고 실력이 떨어지니까 연습생으로 들어간 거지.

부산상고의 강타자가요?

그러게 말이야. 내 딴엔 부산상고 다닐 때 타율왕도 했고, 잘한다고 생각했거든. 졸업할 때도 친구들한테 그랬어. “이놈들아, 난 대학 안 간다. 곧장 실업 간다”고 말이지. 그래 부산에서 보따리 싸들고 서울 올라와서 농업은행을 찾아갔다고. 그때 농업은행이 제일 야구를 잘했거든. 대표팀을 뽑으면 열서너 명이 거기 출신이었다고. 감독도 김영조 씨인데, 그 양반이 대표팀 감독을 겸하고 계셨어.

네.

농업은행 사무실에 들어가니까 김정한 씨라고 주장되신 양반이 날 보더니 “뭐하러 왔어?” 묻더라고. “여기서 야구하려고 왔습니다. 감독님 좀 뵙게 해주십시오”라고 했지. 아, 그런데 다짜고짜 “야, 인마. TO(Table of Organization, 정원) 다 찼어. 가봐”하는 거라.

이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야, 이거 오갈 데가 없으니까 사람 미치겠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예전 개성중 때 감독님이 서울 성동중 감독을 하고 계셨어. 찾아갔지. 사정 설명을 하니까. “아, 그래”하시더만 한국운수에 있는 장덕환 감독한테 연락하시는 거야. “덩치 큰 놈 하나 있는데 야구 한번 시켜보라”고 하셨던 것 같아. 그래 한국운수에 찾아갔지. 이렇게 보니까 부탁받고 할 수 없이 날 받아준 것 같더라고(웃음). 별말 없이 유니폼 쪼가리랑 던져주더니 “내일부터 연습해”하더라고.

그럼 정식 입단을 하신 겁니까.

내가 앞에서 이야기했잖아. 내가 연습생 1호라고. 월급도 없고, 그냥 점심 한 그릇 얻어먹고 연습만 했어. 그런데 그것도 나중엔 먹지를 못했다고.

이유가 있었습니까.

그때 한국운수 후생계장이 명 유격수 출신의 강대중 씨였어. 원래 또래 행원들은 다 과장이고, 지점장으로 나가는데 그 양반만 계장이었다고. 왜 만년 계장이었는지 알아?

글쎄요.

술 한 잔 드시면 사장 보고도 “네가 인마 사장이야”할 정도로 성격이 괄괄하셨거든(웃음). 어쨌거나 점심이 되면 말이야. 구내식당에서 야구부원들이 다 줄 서서 배식을 받는다고. 사실 난 정식사원도 아닌 주제에 밥 얻어먹는 게 창피해서 늘 고갤 숙인 채로 서 있었거든. 아, 그런데 난데없이 강대중 씨가 날 보면서 “야! 너 몇 번째야!. 도대체 몇 번이나 배식을 받는 거야!”하고 소릴 지르지 뭐야. (얼굴이 붉어지며) 아따, 창피해서 혼났다고. 딴 선수들은 점심 되면 서너 번은 배식을 받아먹거든. 점심이래 봤자 조밥이랑 꽁치 하나가 전부고. 난 그것도 미안해서 고갤 숙이고 받아먹는데, 전체 사원들 앞에서 ‘막’ 그러시니까 다음부턴 구내식당 밥을 못 먹겠더라고. 다음날부턴 아예 집에서 점심 먹고 훈련하러 갔어.

1962년 타이완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한국 대표팀이 개막식에서 태극기를 앞장세워 입장하는 장면. 앞에서 4번째가 김응룡이다(사진=김응룡 제공)

야구사를 뒤져보니까 1960년 실업 무대를 밟자마자 그해 국가대표팀에 뽑히셨던데요. 그렇게 괄시받던 연습생이 1년도 채 안 돼 두각을 나타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서울에 친구가 있나 직장이 확실하나.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어. 그때만 해도 동계훈련이고 뭐고 그런 게 없었거든. 5월에 대회가 있으면 한 달 정도 모여서 훈련하는 게 고작이었다고. 그러니까 나 같은 연습생은 훈련 때만 가면 되는 거야. 그래 훈련 없는 날엔 남산 꼭대기에 헌 타이어 하나 달아놓고 거기까지 매일 올라가서 방망이로 헌 타이어를 때렸다고. 그렇게 훈련하고 나니까 이상하게 경기 때도 잘 맞는 거야. 얼마 안 있어 한국운수에서 주전 1루수가 되고, 대표팀에도 선발됐지.

한국운수에서 정식발령을 내주던가요.

정식은 아니고 촉탁발령을 내주더라고.

제 발로 찾아온 복덩어리를 발로 찬 농업은행의 심경이 복잡했겠습니다.

내가 대표팀에 뽑히니까 하루는 농업은행 김영조 감독이 사무실로 오라고 하더라고. 갔지. 가니까 농업은행 입행 서류를 ‘딱’ 내주더라고. “입행시켜줄 테니까 적어 갖고 와”하는 거야. 앞에선 “네, 알겠습니다”했지.

농업은행에 입사할 뜻이 있으셨나 봅니다.

얼어 죽을 입사는 무슨. 차마 앞에선 찢어버릴 순 없고, 밖에 나와서 입행 서류를 ‘쫙’ 찢어버렸지. 만나달라고 매달릴 땐 만나주지도 않고 말이야(웃음).

"홈런왕? 난 교타자"

제3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한국 대표팀의 기념 촬영. 사진 뒷줄에서 맨 오른쪽에 있는 이가 김응룡이다(사진=김응룡 제공)

1956년 재일교포 학생 야구단이 방한했다. ‘아버지의 나라를 배우자’란 구호를 내걸고 모국을 찾은 재일교포 학생 야구단은 한국 고교야구팀과 12경기를 치러 9승3패를 거뒀다. 실력 차도 컸지만, 야구 장비 차이도 그만큼 컸다. 당시 한국 고교선수들은 변변한 글러브 하나 없이 강습타구를 몸으로 받았다. 재일교포 선수들은 그게 안타까웠는지 경기가 끝나면 자신들이 쓰던 글러브를 내줬고, 공도 몇 타스씩 놓고 갔다.

이후 재일교포 학생 야구단도 똑같이 행동했다. 그들은 아무 사심 없이 야구 장비들을 주고 떠났다. 그 장비가 한국야구 발전에 큰 도움이 됐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 어려운 시절, 김응룡은 한국야구계의 최고의 강타자로 조금씩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1960년 9월에 열린 ‘제6회 NBC(국제야구연맹)배 전국야구대회’에서 11타수 6안타로 타율왕에 오릅니다. 당시 홈런왕은 ‘아시아의 홈런왕’ 농업은행의 박현식(작고) 씨였는데요. 몇 년 지나지 않아 홈런왕 타이틀 역시 감독님의 차지가 됩니다.

박현식 선배가 나보다 ‘딱’ 10살이 많았다고. 부산상고 다닐 땐 박현식 씨가 내 우상이었어. (소파에 몸을 기대며) 난 지금도 첫 홈런을 쳤을 때가 눈에 선해. 육군과의 경기 때 곽상렬 선배 공을 쳐서 담장을 넘겼거든. 그때 박현식 선배가 육군 소속이었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래 우상 앞에서 홈런을 친 셈이었지. 그땐 홈런이 사실 1년에 3, 4개만 나올 때거든.

서울운동장에서 박현식 씨가 홈런을 치면 다음날 ‘박현식 올 시즌 1호 홈런’이라고 적힌 대형 종이가 펜스에 붙여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홈런이 귀했던 시대라고 하던데요.

요즘 야구공은 반발력이 좋잖아. 그땐 아니야. 아무리 세게 쳐도 공이 안 나가. 거기다 미제 방망이가 좀 무거워. (양손을 펴며) 체구가 이런 놈들이 쓰는 빠따를 우리가 썼으니 어디 스윙 스피드가 나왔겠느냐고. 또 그땐 요즘처럼 웨이트트레이닝이니 뭐니 하는 운동이 없었어. 홈런이 나올 리 만무했지. 그래서 난 내가 봐도 홈런타자는 아니었던 것 같아.

1971년 은퇴하실 때까지 개인통산 23홈런으로 역대 실업야구 홈런 1위(주 : 1964년 이후 기록 집계)를 달렸습니다. 여기다 1965년 8홈런, 1967년 7홈런, 1968년 4홈런으로 3년 동안 실업리그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했는데요. 그런데도 홈런 타자가 아니었다고 하신다면.

정말이야. 난 원래 교타자야. 홈런왕보다 타율왕에 더 많이 올랐어. 아마도 당시 실업야구 타자 중에서 내가 통산 타율이 가장 높을 거야. (주: 실업에 입단한 1960년부터 은퇴하던 1972년까지 타율 3할 이상 10번, 데뷔 후 6년 연속 타율 3할 이상 기록) 5, 6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리딩히터가 됐고 말이지. 지금도 나보고 홈런 타자라고 하면 난 “교타자였다”고 말해.

박현식(사진 왼쪽)의 별명은 '아시아의 철인'이었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빠짐없이 참가했다고 붙여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아시아의 홈런왕'으로 유명했다. 김응룡(사진 오른쪽)은 박현식의 대를 잇는 강타자로 언론에 소개됐다.

한국운수 야구단의 주인이 1962년엔 대한미창, 1963년엔 대한통운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1964년부터는 맥주회사 크라운으로 또다시 주인이 바뀌는데요.

(입맛을 다시며) 크라운 맥주 시절이 정말 대단했어. 매일 저녁만 되면 야구선수들은 영업사원으로 변신이야. 술집들을 찾아다니면서 매일 크라운 맥주를 마셨어. 사람들 많은 술집에서 괜히 말이지. “야, 이 회사 맥주는 마시면 설사가 나서 안 되겠다. 역시 맥주는 크라운이 최고다. 캬-”한다고(웃음). 나중에 술 깨면 술집 영수증 전부 챙겨서 회사 영업과로 낸다고. 입 소문 마케팅이란 게 그때부터 있던 거야(웃음).

맥주를 그렇게 마시면 건강에 좋지 않을 텐데요.

건강은 둘째치고, 하루는 체중계에 올랐는데 처음엔 눈금이 고장 난 줄 알았어. 체중이 말도 못하게 올라간 거야. 이전까진 나도 날씬했는데 말이지. 따지고 보면 그때 맛이 간 거야(웃음).

1966년 당시 아마야구 최강팀이었던 한일은행에 입단하셨습니다.

1963년 제5회 아시아야구대회에서 한국이 우승한 다음 실업야구팀이 많이 생겼어. 이전까지 은행팀은 농협밖엔 없었는데, 한일은행·상업은행 이런 팀들이 다 창단한 거야. 신생팀이 생기면 선수들이 필요하지 않겠어. 선후배들이 몽땅 신생팀으로 가더라고. 난 그래도 끝까지 남았지. 남자가 의리란 게 있어야 하잖아. 아, 그런데 2년 정도 지나니까 크라운마저 해체하지 뭐야. 그래 어쩔 수 없지 나도 한일은행으로 갔지.

실업야구의 톱스타셨습니다. 한일은행 입단 시 대우가 좋았겠습니다.

옛날이야기 재밌는데 계속 할까. 난 요즘 시간 많거든. 그럼 ‘쭉’ 이야기할게(웃음). 원래 말이야. 한일은행이 창단하고 몇 년 있다가 야구부를 해체했어. 그때 행장이 누구였느냐 하면 김진흥 씨였다고. ‘역사는 흐른다’를 썼던 소설가 한무숙 씨의 남편이야. 김진흥 씨가 한일은행 창단해서 잘 이끌어오시다가 거 걔 있잖아.

(잠시 생각하다가) 거 누구더라. 그래 김충. 김충 알지? (고개를 끄덕이자) 김충이 고교 시절 한일은행에서 촉탁행원으로 있으면서 3년간 월급을 받았거든. 김충이 김진흥 씨의 선린상고 제자였다고. 아, 그런데 김충이 졸업하자마자 한일은행이 아니라 상업은행으로 입행한 거야. 잘하는 선수였으니까 어디 다른 팀들이 가만 놔뒀겠어. 하지만, 김진흥 씨 입장에선 얼마나 괘씸했겠어. 거기다 한일은행 내부에선 코칭스태프끼리 매일 투닥거리지. 그래 1964년에 야구단을 아예 해체해버렸다고.

해체된 팀에 입단하신 겁니까.

아니 내 말 더 들어보라고. 그런데 1966년 서동준 씨라고 유명한 투수였던 양반이 날 보재. (입가에 미소가 생기며) 참, 서동준 씨 생각하면 지금도 대단했던 사람이란 생각밖엔 안 들어. 왠지 알아? 그 양반이 월급을 7곳에서 받았다고. 얼마나 머리가 좋으냐면 한국운수에서 같이 뛰었는데, 거기서 월급 받고, 한양대 감독 겸직하면서 또 월급을 받았다고. 그리고 체신부에서도 무슨 일 하면서 받고, 한전 일도 하면서 월급 받고, 정말 서동준 씨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걸물이야 걸물. 어쨌거나 그분이 보자는 거야.

무슨 일 때문에 보자고 하던가요.

“응룡아, 한일은행장님이 널 좋아하는데 한번 봤으면 좋겠단다”하시는 거야. 그래 내가 “아니 거긴 야구팀도 없는데 뭐하자고 보잡니까”했지. 그랬더니 “야, 야구 말고 인간적으로 좋아하니까 보자는 거지. 잔말 말고 따라와”하지 뭐야.

따라가셨습니까.

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몰랐어. 그런데 알고 보니까 서동준 씨가 김진흥 은행장한테는 “은행장님, 응룡이가 한번 찾아오겠다는데요”라고 했던 거야(웃음). 난 그것도 모르고 은행장실에 갔지. 날 보자마자 김진흥 씨가 “어이 응룡이. 네가 온다고 하니 야구단 다시 만들어볼까?”하시는 거야.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는 시늉을 하며) 헉! 깜짝 놀랐지. 난 온단 이야기도 안 하고, 선배가 가재서 따라온 건데 말이지. 그때 김진흥 씨가 “그동안 운동선수들 보고 실망을 많이 했는데, 응룡이 너처럼 의리있는 친구가 있는 줄은 몰랐다. 다시 야구단을 창단해야겠다”하는 거야.

은행장이 호감을 표시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단하는 게 순리일 텐데요.

사실 제일은행에서 A급 선수들 영입하면서 집 한 채씩 준다고 했을 때거든. 그런데 한일은행장님이 그렇게 나오시니까 이거 참 곤란하더라고. 그래 어쩔 수 없이 한일은행에 가겠다고 했지. 그때 한일은행 야구단이 다시 부활한 거야.

해체 후 2년 만의 재창단이었습니다. 전력 공백이 상당했을 듯싶은데요.

그것도 내 이야기를 들어봐. 막상 한일은행에 갔는데 잘하는 놈들은 다른 팀으로 옮겼고, 실력이 고만고만한 친구들만 행원으로 남아있더라고. 그런데 그때 한일은행 상무가 김종락 씨라고, 김종필 씨 형이었어. 그 양반이 힘이 있으니까 감독이 “좋은 선수 좀 뽑아달라”고 하면 다 뽑아줬어. 재일교포 선수들도 신용균, 김영덕 씨 등 한창 많을 때는 팀에서 재일교포 선수만 7명이나 뛴 적이 있다고. 그래서 한일은행이 단기간에 강해진 거야.

해방 이후 첫 일본전 승리를 이끈 김응룡의 한방

1958년 10월 21일 미 메이저리그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한국 대표팀의 친선경기에 앞서 이승만 대통령이 관중석에서 찢어진 그물망을 통해 시구하는 장면. 이 시구가 한국 대통령으론 첫 시구였다

1958년 10월 21일 메이저리그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내한해 서울운동장에서 한국대표팀인 서울군과 친선경기를 펼쳤다. 카디널스는 해방 뒤 처음으로 내한한 메이저리그팀이었다. 그것도 야구의 본고장 미국, 프로야구의 진미를 맛볼 기회라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당시 서울운동장엔 2만 명의 관중이 운집했고, 이승만 대통령도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직접 시구를 했는데 그때까지 대통령이 시구한 경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한국의 선발투수는 배용섭이었다. 대표팀의 오윤환 감독은 ‘슬로우볼 투수인 배영섭의 공을 메이저리거들이 상대해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배용섭은 커브와 커브만큼이나 느린 속구가 주무기였다. 후배들이 “용섭이 형, 형은 왜 그렇게 연습을 안 해?”하고 물으면 배용섭은 “야, 나 연습하면 스피드 나와서 안 돼”하고 넉살을 부리곤 했다. 그만큼 느린 속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러나 시속 150km의 강속구를 치던 메이저리거들이 시속 100km대의 느린 공을 못 칠 리 만무했다. 배용섭은 1회 시작과 함께 연속 3안타를 허용하며 1실점 하고서 강판당했다.

배용섭에 이어 등판한 김양중은 한국야구계의 에이스였다. 김양중은 4, 5번 타자를 잘 막았지만, 6번 그린의 타구에 머릴 맞고 쓰러졌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유년시절 나무꾼을 하며 강철보다 탄탄한 몸을 만들었던 김양중은 기적처럼 일어나 다시 투구를 계속했다. 결국, 김양중은 7회까지 1점만 내주는 호투를 펼쳤고, 당대의 대타자 스탠 뮤지얼을 삼진으로 돌려세우기까지 했다. 한국이 0대 3으로 지긴 했지만, 한국야구의 실력이 절대 녹록지 않음을 보여준 일전이었다. 어쩌면 이 경기가 1963년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는지 몰랐다.


1962년 타이완 타이베이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셨습니다. 한국은 그 대회에서 3승3패로 타이완과 공동 2위를 차지했습니다. 당시 고무적이었던 건 일본과의 실력 차를 상당히 좁혔다는 것인데요. 하지만, 팀 타율이 고작 1할8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김성근, 김수윤 등 재일교포 투수들과 에이스 김양중이 버틴 강력한 투수진이 없었다면 최하위가 됐을 수도 있었는데요. 당시 감독님도 21타수 4안타 타율 1할9푼의 빈타에 허덕였습니다.

3회 대회 때는 뭐, 경험 부족이었지. 마음만 앞서고 말이야. 야구는 말이야. 뭘 보여주겠다고 서두르면 결과가 더 안 좋아져. 그때 그걸 배웠지.

당시 투수였던 SK 김성근 감독도 대표팀의 막내였던 것으로 압니다.

그랬지. (김)성근이가 일본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왔다고. 동아대에 입학했다가 교통부에 취직했지. 나랑 고교를 같은 해에 졸업해서 친구로 지냈는데, 지나 내나 호적이랑 실제 나이는 다르니까 정확히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는 잘 몰라. 성근이는 그때 참 잘 던졌어. 그래 나랑 성근이 한해 밑에 백인천이가 있었으니까, 그 친구가 제일 막내였을 거야.

김성근 감독의 별명인 ‘야신’을 처음 지은 이도 다름 아닌 감독님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야신을 이겼던 감독님은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뭐긴 뭐야. 해병이지.

해병이요?

야신 잡는 해병(웃음).

제3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한국야구대표팀을 타이완야구협회장이 환영하고 있다. 백인천, 김정환, 김성근, 김응룡, 박현식, 김영조(오른쪽부터)가 나란히 서 있다

하지만, 이듬해 서울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선 전혀 다른 활약을 보였습니다.

4회 대회 땐 경험이 있으니까 상대 투수들에게 잘 말려들지 않았어. 돌아보면 신용균이 참 잘 던졌어. 예선 일본전 때도 신용균이 완투해서 우리가 5대 2로 이겼거든. 해방되고서 일본에 처음으로 이긴 경기였어. 그것도 서울에서 말이지. 일본과의 최종전 때는 내가 좀 했지(웃음).

좀 하신 정도가 아니라 승리의 수훈선수였습니다.

내가 4번을 쳤는데, 1회 초 1사 3루일 때 주자를 희생플라이로 불러들였다고. 8회 초에는 박현식 선배가 볼넷으로 나갔을 때 내가 투런 홈런을 쳤고 말이지. 나 혼자 3타점 내고, 신용균이가 무실점으로 완투해서 우리가 일본에 3대 0으로 이겼어. 4년 전만 해도 우리가 일본에 1대 20으로 졌었거든.

쾌거도 그런 쾌거가 없었겠습니다.

암, 쾌거였지. 그때 정말 서울 시내가 난리도 아니었어. 나도 타율왕에 올랐고(주 : 23타수 9안타 타율 3할9푼1리).

청와대에도 불려가셨겠습니다.

그땐 청와대가 없었지. 장충단에 최고회의 의장공관이 있었어. 거기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만났지. 그때만 해도 박 의장은 대통령 후보였어. 나하고 ‘딱’ 악수를 하면서 “이거 선거법 위반 아니지?”하면서 웃으시는 거야. 그때 내가 육군 소속이었는데 “부대로 황소 한 마리 보내주겠다”고 하시더라고.

황소요? 부대로 황소가 왔습니까.

보내주긴 뭘 보내줘. 거기서 끝이지(웃음).

1963년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한국 대표팀이 장충단 최고회의 의장관실에서 박정희 의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실업야구 시절 타율왕으로 이름을 날리셨는데요. 자신만의 타격 철학이 있으셨을 듯합니다.

타격 철학? 에이, 그런 거 없었어. 그땐 술 마시다가 나가서 훈련하는 거야(웃음). 그래도 할 건 다했다고. 대한야구협회가 말이야. 기록지를 우습게 알아서 옛날 기록지를 다 태워 먹어 없애서 그렇지. 내가 은퇴할 때 통산 타율이 3할5푼을 넘었다고. 야구는 다른 거 없어. 할 때 하고, 쉴 때 쉬면서 선수가 알아서 하는 거야.

"자율야구? 난 그저 야구를 한 것뿐"

국가대표 시절의 김응룡(사진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김응룡의 오른쪽으로 김영덕, 김인식이 서 있다. 명 유격수였던 고 강대중(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은 김응룡의 한일은행 은사였다(사진=강대중 제공)

1922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난 강대중은 아버지를 따라 일본 교토로 넘어갔다. 배가 고팠던 시절이었다. 일본에서 대학까지 나온 강대중은 해방되자마자 귀국해 국내 실업무대에서 뛰었다. 일본 교토상고 시절부터 유격수로 이름을 날렸던 강대중은 전경성군과 조선운수에서 현역으로 뛰고서 1962년부터 한국미창(한국운수의 후신)에서 감독생활을 했다.

강대중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한일은행 감독을 맡으며 김응룡이 한국 제일의 강타자로 성장하는데 일조했다. 강대중과 김응룡의 관계는 그러나 1970년 겨울 금이 갔다. 당시 강대중은 한일은행 감독을 그만두려고 했다. 후임 감독으론 김영덕, 김응룡이 거론됐다. 그즈음 강대중의 집에 김응룡이 찾아왔다. 김응룡은 한참 동안 강대중과 대화를 나누다 ‘씩씩’거리며 방문을 열고 나왔다.

당시만 해도 두 이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알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일은행 감독은 김영덕으로 낙점됐다. 그 일이 있을 후, 강대중과 김응룡은 사석에서도 불편한 사이가 됐다.

시간이 흐르고. 강대중은 아들에게 “그때 응룡이가 큰 오해를 한 것 같다”며 진심으로 가슴 아파했다. 내용인즉슨, 강대중은 내심 김응룡을 차기 감독으로 내정했으나 김응룡의 선배인 김영덕을 먼저 감독으로 시키고, 후년에 김응룡을 감독으로 올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김응룡이 이를 알지 못하고 자신을 오해했다는 것이었다.

강대중은 1991년 눈을 감을 때까지 김응룡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꼭’ 한번은 오해를 풀고 싶었다. 하지만,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김응룡은 강대중의 계획대로 김영덕의 후임으로 한일은행 감독이 됐다.


1972년 은퇴를 발표하셨습니다. 당시 31살이셨는데요. 요즘 같으면 한창 현역에서 뛸 시기였습니다.

그땐 선수생명이 다 짧았어. 27, 28살이면 다 그만둘 때야. 31살이면 노장 중에서도 노장이었지.

1973년 한일은행 감독이 되셨습니다.

난 코치는 해본 적이 없어. 대표팀 코치도 맡아본 적이 없고. 김영덕 선배가 한일은행 감독하다가 그만두고 나서 내가 후임 감독이 됐지.

강대중 선생이 감독 선임 문제로 평생 감독님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숨을 거두실 때도 오해를 풀지 못해 가슴 아파했다고 하더군요.

강대중 씨가 그랬다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글쎄. 난 그 부분은 잘 모르겠어. 김영덕 씨가 내 선배니까 나보다 먼저 감독이 되는 게 맞았겠지.

슈퍼월드컵 당시 코칭스태프였던 유백만(사진 왼쪽부터) 코치, 김응룡 감독, 이재환 코치

원로 야구인들의 말씀을 들어보니 “김응룡은 한일은행 감독 시절부터 자율야구를 했다”고 하시더군요. 해태 때도 감독님의 자율야구는 유명했습니다.

자율야구? 로이스터가 나한테 다 배운 거 아니야(웃음). 내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자율야구란 말은 어디에도 없어. 1982년 일본 프로야구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이 히로오카 다쓰로였다고. 그 양반이 선수들 외출 시간부터 음식 섭취까지 일일이 관리를 많이 했어. 그때 일본에서 히로오카 감독의 야구를 ‘관리야구’로 불렀다고.

그런데 미 메이저리그는 관리야구니 자율야구니 이런 게 없다고. OB에 있던 이광환이 국외 연수를 갔다 오고 감독이 됐을 때 고 이종남 기자가 ‘이광환은 자율야구다’하면서 그때부터 ‘자율야구’란 말이 생겨난 거야. 솔직히 누가 봐도 자율야구 하면 김응룡이었지. 하지만, 난 자율야구 같은 건 하지도 않았어.

그럼 어떤 야구를 지향하셨습니까.

난 그저 야구를 한 거야. 야구에 무슨 관리가 있고, 자율이 있어. 보라고. 성인 야구선수들이 훈련 끝마치고 나면 다 사생활인데 내가 관여할 게 뭐가 있어. 술 처먹은 놈은 다음날 경기 못 나가는 거고, 출전하고 싶으면 몸 관리 잘하면 되는 거야. 안 그래? 해태 있을 때 만날 김성근이한테 그랬다고. “이봐 성근이. 난 야구를 30년 이상 했는데도 하루 3시간 이상 훈련할 필요가 뭐 있나 싶어. 난 뭘 더 훈련시켜야 할지 모르겠어.” 해태 땐 스프링캠프를 가도 하루 2, 3시간밖에 단체훈련을 하지 않았어.

1973년부터 한일은행 감독을 맡으시면서 실업야구에서 많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이전까진 대표팀 코칭스태프로는 한 번도 발탁되지 못하셨습니다.

김성근이나 김영덕 선배나 다 대표팀 코치, 감독을 맡았는데 난 한 번도 시키지를 않더라고. 속으로 ‘와 나는 코치 한번 안 시키노’했지. 그러다 1977년 감독 선임문제로 자기들끼리 싸웠는지 나보고 감독을 하라고 하더라고.

첫 대표팀 사령탑이었던 만큼 각오도 대단하셨겠습니다.

감독되고 기자들 앞에서 인터뷰했지. “목표가 뭐냐”고 묻는 거야. “우승”이라고 했지. 아, 그런데 신문에서 자기들이 알아서 ‘목표는 5위’라고 썼지 뭐야. 우리가 우승할 줄은 전혀 예상을 못 했던 거지. ‘딱’ 한군데, 코리아헤럴드만 내 말을 그대로 받아써서 ‘목표는 우승’이라고 했지. 결국엔 나랑 코리아헤럴드만 맞았다는 거 아니야(웃음).

당시 슈퍼월드컵엔 한국을 비롯 미국, 일본, 타이완, 캐나다, 베네수엘라, 도미니카, 콜롬비아, 푸에토리코 등 모두 9개국이 참가했습니다. 야구 실력만 놓고 보면 우리는 4위권 밖으로 예상됐는데요.

이선희가 정말 잘 던졌어. 최동원, 김시진, 임호균도 호투했고. 요즘 말이야. 프로야구판에서 ‘기동력 야구’니 ‘발야구’니 하잖아. 사실 원조 발야구는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에서 나왔어. 그때 김일권, 이해창, 김재박 이런 친구들이 루상에 나가면 ‘죽자사자’ 뛰어서 상대 내야진을 흔들었거든. 결과적으로 그게 통했다고 봐.

예선에서 두 번이나 졌던 미국과 우승 결정전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예선과 결승리그에서 두 번이나 미국한테 목덜미가 잡혔었어. 내일 미국전을 치러야 하는데 협회 어르신이 그러는 거야. “응룡아, 결승까지 오른 것만도 할 일 다한 거다. 우리 시원하게 한잔하자.”

뭐라고 화답하셨습니까.

“선배님. 오늘 마시나 내일 마시나 마찬가지 아니오. 야구는 모르지 않소. 내일 마십시다”했지. 조용히 자고 일어난 덕분에 다음날 우리가 미국에 이겼잖아. 그래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 한 거 아니야(웃음).

60년 한국야구 사상 첫 세계대회 우승이었습니다. 환영 인파가 엄청나게 몰렸을 듯합니다.

환영 인파? 조금 나왔지. 그래도 많이 나왔다고 해야지. 그걸 본 사람이 지금 많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웃음). 슈퍼월드컵 우승하고 훈장도 탔어.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내가 훈장을 몇 개나 탄 지 알아?

1977년 슈퍼월드컵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한국 대표팀

196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우승하고 하나, 1977년 슈퍼월드컵 우승하고 하나. 모두 2개 정도 받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세 손가락을 접으며) 3개 탔어. 석류장은 제9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해서 받았고, 백마장은 슈퍼월드컵 우승했을 때 탔고, 국민훈장 동백장은 나중에 받았어. 이 정도면 야구인 중에선 출세한 거 아니야(웃음).

슈퍼월드컵 때 일화가 많았던 걸로 압니다. 악어를 공수해오셨다는 말도 들었는데요.

(한참 웃으며) 아, 악어? 내 말 들어봐. 슈퍼월드컵 끝나고 애들 보니까 (손을 30cm 정도 벌리더니) 악어 요만한 걸 죄다 샀더라고.

진짜 악어요?

아니 박제. 내가 그걸 보고 “야, 고만한 악어를 사면 뭐하냐”하고 면박을 줬다고. 그래놓고 선수들한테 “야, 니카라과에서 제일 큰 악어로 하나 사와”하고 시켰어. 진짜 사왔더라고. 보니까 (대형 소파의 양쪽 길이를 가리키며) 이만해. 무지 크더라고. 비행기 갈아탈 때마다 당번을 정해서 악어 박제를 잘 공수하도록 했지. 그래 김포공항까지 무사히 왔어. 협회 총무하고 사람들이 “감독, 짐은 걱정하지마. 협회 사무실에 다 갖다 놓을게”하는 거야. 협회 사무실에 갔지. 그런데 웬걸. 내 가방도 없고, 악어도 없는 거야.

분실하신 건가요.

가방이야 그렇다손 치지만, 악어 박제가 사라지니까 미치겠더라고. 그땐 그런 악어 박제를 대형 양복점이나 가게 같은 데서 전시했거든. 상당히 귀했으니까. 그래 속으로 ‘이놈들. 내 악어는 큰 놈이니까 분명히 진열해놨겠지’하고 명동이고 어디를 며칠을 돌아다녔어.

찾으셨나요.

찾긴 개뿔이나 찾아. 없지 뭐(웃음).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때 아무도 날 찾지 않았다."

제주 서귀포 야구인마을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김응룡 전 감독(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1977년 한국야구는 슈퍼월드컵에서 우승하며 세계무대서 승전고를 울렸다. 하지만, 국내 야구는 기업들의 긴축 재정으로 실업야구 은행팀들이 잇달아 해체하고, 다른 기업에 인수되는 등 수난이 계속됐다. 대표적인 게 국영기업체인 포철에 인수된 기업은행 야구단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당시 실업야구의 위기는 또 다른 발전을 위한 태동기였다. 대기업 현대건설이 한일은행과 제일은행을 한꺼번에 인수, 팀을 창단하기 위해 바쁘게 뛴 것이었다. 실제로 현대건설은 감독에 한일은행의 김응룡, 코치에 김차열을 영입하고, 임신근, 우용득, 허구연 등 11명의 한일은행 선수에 이종도, 김우열 등 4명의 제일은행 선수를 합친 15명의 선수로 구성된 실업야구팀 창단을 눈앞에 뒀다.

야구계는 현대건설 야구단을 ‘프로야구의 맹아(萌芽, 싹)’로 받아들였다. 현대건설 역시 일반 실업야구팀이 아닌 세미프로팀을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김응룡은 한일은행과의 의리를 지키고 싶었지만, 주변 야구인들이 “네가 아니면 프로야구의 싹을 누가 틔우겠느냐”고 권유하는 통에 초대 현대건설의 감독을 맡기로 했다.

만약 현대건설 야구단이 창단했다면 한국 프로야구는 1982년이 아닌 그전에 출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일은행에 비해 제일은행 선수들의 영입 폭이 작으면서 제일은행 측의 반발을 사게 됐다. 결국, 제일은행 선수들은 현대건설 야구단에 참여하지 않고, 원상복귀하고 말았다. 한일은행 역시 팀을 해체하려던 계획을 백지화하고 두 달 후 정상화했다.

프로야구의 싹을 틔우려던 현대건설은 결국, 선수수급에 문제가 생기면서 창단을 포기했다. 김응룡은 깊은 실의에 빠졌다.


1981년 미국 조지아 서던대로 야구 유학을 떠나셨습니다. 국내 야구지도자로는 첫 국외 연수였는데요. 특별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배경이 있으십니까.

유학은 무슨, 미국에서 나보고 야구 좀 가르쳐달라고 통사정해서 가르쳐주러 간 거지(웃음). 안 그래?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감독이 뭐가 아쉽다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겠느냐고(웃음). 솔직히 말이 유학이지 그냥 견문 좀 넓히려고 갔다 온 거야. 한일은행에서 감독을 한 10년 정도 하니까 후배한테 물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아이들 교육문제도 있고. 때마침 대한야구협회에서 미국 연수를 보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거든. 원래는 1979년에 갔어야 했는데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 감독을 맡아달라는 바람에 1981년에야 (미국으로) 갔다고.

한국야구 사상 첫 연습생 신화를 쓰시고, 한국야구 감독으로 첫 세계대회 우승을 이끄시고서 역시 한국야구 사상 처음으로 국외 지도자 연수를 떠나셨습니다. 참 대단하시단 생각이 듭니다.

현대건설 창단할 때 감독으로 가겠다고 했다가 한일은행으로 다시 돌아온 거 아니야. 그런데 또 미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했으니 은행이 가만있겠어. 그런데 참 내가 봐도 낯짝도 두껍지. 은행장님 만났을 때 “유학 좀 갔다 오겠습니다”하고 당당하게 말했지 뭐야.

은행장의 반응은 어떻던가요.

“김 감독, 당신 머리에 뭐가 들었다고 유학을 가?” 그러는 거야.

어떻게 대답하셨을지 궁금한데요.

뭐 어떻게 대답해. “그러니까 이 돌대가리에 뭐 좀 채워보려고 가려는 거 아닙니까‘했지. ’허허‘ 웃으시더라고. 덕분에 미국 가서도 한일은행에서 월급을 보내줬어.

미국 야구는 우리와 많이 다르던가요.

미국에서 느낀 게 많아. 조지아 서든대에서 정말 야구를 제대로 보고 왔어. 훈련법은 다 비슷한데, 거긴 처음부터 끝까지 선수들이 다 알아서 훈련하고 움직여. 우리처럼 누가 시켜서 하는 야구가 아니었어.

 

원래 연수기간이 2년 아니었습니까. 예정대로라면 1983년에 귀국하셔야 했는데요. 1982년 미국에 계신 사이 프로야구가 출범했습니다. 혹시 그 때문에 6개 구단으로부터 감독 제의를 못 받으신 게 아닌가 싶은데요.

친구들이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해봤자 나만 손해라고 말이야. 그냥 넘어가.

감독님이 살아오신 날들이 모두 한국야구의 역사입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제목의 프로그램도 있지 않았습니까.

(한참 생각하고서) 어떤 놈들은 나보고 “김응룡은 선견지명이 있어 한국에서 프로야구를 출범할 줄 알고, 미국으로 야구 유학을 갔다”고 했는데, 그거 다 헛소리야(웃음). 사실 말이야. 내가 미국에 있어서 영입 제의를 받지 못했다는 건 건 말이 안 돼. 미국이 무슨 달나라야. 오는데 1, 2년 걸리게. 내 딴엔 현역시절에 이름도 날리고, 대표팀 감독도 5년 정도 했으니까 폼 좀 잡고 있었지. 하지만, 6개 구단이면 감독, 코치를 합쳐도 수십 명이잖아. 내가 거길 못 끼었으니 어찌 됐든 간에 내가 덕이 없던 거지 뭐겠어. 내가 잘못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슈퍼월드컵 우승 감독을 코치로 모시기엔 조금 부담스럽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애매하긴 했어. 어떤 감독이 날 코치로 쓰겠어. 그래도 말이야. 누구도 부르질 않으니까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더라고. 솔직히 말이지. 미국에 있으면서 내가 짐을 세 번이나 쌌다고. 한국에 들어오려고 말이야. 그때마다 우리 마누라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글쎄요.

“여보. 창피하지도 않아요. 부르지도 않는데 왜 그리 보따리를 싸요”하는 거야. (물 한 모금을 마시고서) 내가 어디서 프로야구 출범식을 봤을 것 같아?

미국에서 비디오테이프를 구해 보셨을 것 같은데요.

아니야. 프로야구 출범식을 서울운동장에서 직접 봤어.

서울운동장이요?

응. 애틀랜타에서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타서 한국에 왔다고. 그래 개막전을 몰래 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니까. 이야, 개막전을 보는데 정말 미치겠더라고.

미국에서의 생활을 어떠셨습니까.

그때 협회에서 받은 지원금이 매달 500달러야. 미국에서 월급 500달러는 극빈층이야. 교육이고 뭐가 다 무료더라고(웃음).

연수기간을 모두 채우지 못하고 1982년 10월에 귀국하셨습니다. 해태에서 연락을 받았기 때문인가요.

그건 아니야. 매일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기다렸지. 그런데 전화가 안 오더라고. 보따리를 싸고 푸르기를 반복했다고. 그러다 ‘영’ 안 되겠다 싶어서 1982년 10월에 한국으로 돌아왔어. 그러니까 여기저기 방송사랑 신문사에서 부르는 거야.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얼마 있다가 해태에서 부르더라고. 자리에 갔더니 박건배 구단주가 있는 거야. 날 보자마자 “우리팀 좀 맡아주십시오”하더라고.

슈퍼월드컵 우승 감독에, 국내 최초 미국 유학파 지도자였으니 몇 번 고사하는 척을 했을 법도 합니다.

고사는 무슨 고사야. 계약금이고 연봉이고 그런 게 뭐가 중요해. 넙죽 “고맙습니다. 맡겠습니다” 그랬지(웃음). 속으론 ‘그래 야구계 이놈들 어디 한번 두고 보자’하고 칼을 갈았지.

원래 감독을 맡고 싶던 구단은 어디였습니까.

그런 게 어딨어. 어디든 불러만 주면 탱큐였지. 자존심이 상한 상태였는데 찬밥, 더운밥 가리게 생겼어.

1982년 해태 타이거즈의 마스코트(사진=스포츠춘추)

1982년 10월 19일 해태 타이거즈의 2대 감독에 등극했습니다. 전임 김동엽 감독이 시즌 중 경질되며 팀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했는데요. 해태의 첫 느낌은 어떠셨습니까.

내가 한일은행 감독으로 있을 때도 선수 제한을 받질 않았다고. 실업야구가 1년에 기껏 해봐야 20경기 정도를 치르는데도 선수들을 30, 40명씩 데리고 있었거든. 아, 그런데 해태에 오니까 선수가 ‘딱’ 15명이야.

프로팀 선수단 규모가 15명이었다고요?

그랬다니까. 내가 정기주 해태 이사한테 “프로야구팀을 운영하려면 선수들이 최소한 35명은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어. 그런데 정 이사 반응이 참 재밌어.

어떤 반응을 보이셨기에.

정 이사가 혼잣말로 “이상하네, 이상하네”하는 거야. “뭐가 그렇게 이상합니까”하고 물었지.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알아? “전임 김동엽 감독님은 15명으로도 충분하다고 하던데요”이러는 거야. 아,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 사실 해태그룹은 다른 기업들과는 달리 한 번도 운동부를 운영한 적이 없었거든. 아니 그래도 그렇지. 김동엽 씨 말만 철석같이 믿었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허허.

코치도 2명밖에 되지 않았지요?

조창수 타격코치, 임신근 투수코치가 전부였어. 둘 다 김동엽 감독이 데리고 온 친구들이었어. 당신도 알겠지만, 난 ‘김응룡 사단’이니 뭐니 이런 게 없잖아. 두 코치를 그대로 받아 썼지. 사실 임 코치는 장인 영향도 컸어. 임 코치 장인이 헌병 대령 출신인데, 바로 내 옆집에 살았거든. 하루는 “우리 사위 좀 많이 아껴달라”고 하시더라고. 그래 줄곧 임신근을 쓴 거야. 참, 지금 돌아보면 코치 2명에 선수 15명이면 완전 사회인야구팀이었어. 안 그래? (계속)

2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응룡 회고록[2] ‘숨은 세력은 해태의 패배를 원했다’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issue&mod=read&issue_id=438&issue_item_id=9119&office_id=295&article_id=0000000645

김응룡 회고록[3] “웃어라, 웃어. 불난 집이 재수도 좋다.”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issue&issue_id=438&mod=read&issue_item_id=9143&office_id=295&article_id=000000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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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렬 이순철 기아 타이거즈로의 영입.
현기차 정의선 부회장님이 결단을 내렸다는데.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