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이 선거운동 초반에 급속히 지지세를 넓혀가던 기세를 살리지 못하고 조금 주춤하는 느낌입니다. 상대적으로 박원순은 뭔가 한숨을 돌리고 반격의 계기를 모색하는 분위기군요.

제가 보기에는 나경원이 좀 헛발질을 한 것 같습니다. 초반에 박원순의 병역 문제, 학력 문제로 재미를 보니까 너무 이 주제로 올인한 느낌이 있어요. 이런 주제는 박원순 진영을 좀 흔들 수 있을 뿐이고 결정적인 타격을 못 줍니다. 타격을 줘야 할 때 못 주면 상대방은 정신을 차리고 반격해옵니다.

똑같이 네거티브 전술을 구사할 경우 나경원에 대해서는 '도덕성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에 별로 타격을 못 주고, 박원순의 경우 도덕성을 무기로 내세워왔기 때문에 더 큰 타격을 입게 된다고 말합니다. 맞는 얘기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 추론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도덕성에 대한 의혹이나 신뢰성 상실은 이미지에 타격을 주는 소재들입니다. 이미지는 판세에 영향을 주기는 해도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결국 선거란 것은 거대한 집단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무대이거든요. 이런 점에서 어찌 보면 사소한(아버지에 1차 책임 소재가 있는 병역 문제, 학력 문제 등이 사실 박원순을 직접 타격하는 요소는 아닙니다) 신뢰성 문제로 박원순을 흔들기는 어려운 거죠. 처음에 이 문제로 박원순이 흔들릴 때 또 다른 결정타를 날렸어야 했는데 너무 이 문제에 매달린 느낌이에요.

게다가 박원순은 어쨌든 참여연대니 아름다운 재단이니 하는 것으로 나름 '손해보는 삶, 공공의 이익을 고려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 내용이야 어떻든 그 경력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거든요. 그렇다면 나경원 측의 박원순 공격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정도는 대충 알았으니 됐고..." 이렇게 됩니다. 나경원 쪽은 이 문제에서 손 털어야 할 시기를 놓친 겁니다.

사실 박원순의 진짜 약점은 그 '무능'에 있습니다. 결국 박원순이 내세우는 경력이란 게 시민단체 운동이란 건데, 이게 과연 거대한 서울시 행정을 맡아 수행할만한 경력인가 하는 의문이 남거든요. 게다가 몇 번의 토론에서도 그런 우려가 결코 기우가 아니라는 것을 박원순 스스로 충분히 입증했구요. 그렇다면 한나라당은 초기에 박원순의 신뢰도를 흔든 뒤, 박원순의 시민운동 경력 자체가 갖는 취약점,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지는 것으로 결정타를 먹였어야 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는 별로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초반에 박원순에 대한 네거티브가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두면서 오히려 나경원 쪽에 악영향을 준 경우입니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조중동이 별로 박원순 폭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조국이나 오마이뉴스 등 박원순 진영의 '이빨'들이 사생 결단하고 나경원과 각을 세우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조중동의 박원순 공격은 그냥 '체면치레' 정도로 느껴집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지금 조중동은 "박원순이 당선되도 상관없다" 또는 "차라리 박원순이 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요? 그냥 가정이지만, 제가 보기에 박근혜와 조중동 사이에 일종의 밀약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박근혜 입장에서는 이번 서울시장 보선은 결코 그냥 팔짱 끼고 볼 수 없는 판입니다. 만일 그랬다가는 보수진영 전체의 거대한 반발로 내년에 한나라당 대선후보 또는 보수진영의 대표주자 위상조차 흔들릴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경원의 당선을 그냥 수수방관할 것이냐? 그러기에는 또 찜찜한 구석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여성 서울시장, 여성 대통령... 이 구도는 위험하죠. 특히 박근혜의 핵심 지지기반인 TK 보수층의 정서를 너무 건드리는 점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박근혜로서는 열심히 나경원 선거운동 지원하되(하는 것처럼 보이되), 실제로는 나경원이 떨어지는 그림이 최상일 수 있습니다. '선거의 여왕' 박근혜의 위력에 의문이 생기는 것은 타격이지만, 이것은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일단 유리한 점으로는, 박근혜 대세론을 위협하는 요소가 한나라당 등 범보수 진영에서 나오지 않고, 범야권이 옹립할 가능성이 높은 안철수로 나타났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적어도 박근혜가 범보수진영의 대표선수로 나가는 것에는 별로 큰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박근혜의 위력이 떨어지는 듯한 기미가 보이면 범보수진영의 위기감을 고조시켜 일사불란하게 단결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2012년 대선의 구도가 일찌감치 박근혜 vs 안철수의 구도로 굳어지는 것, 박근혜 입장에선 별로 나쁘지 않습니다.

박원순이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하는 경우에 박근혜에게 불리한 점이라면 야권 통합이 촉진되어 매우 강력한 반한나라당, 반박근혜 전선이 형성된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겉으로 보는 것과는 매우 다른 그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바로 전통 민주당 지지층 특히 호남 출신 유권자들의 저항감입니다.

최근 손학규 등 민주당 지도부는 거의 공개적으로 '박원순 후보에 대한 민주당 지지층의 정서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박원순이 후보 단일화의 컨벤션 효과를 거의 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지지세가 상향 경직성을 보인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이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지세 하락의 계기는 이런저런 의혹 제기였지만, 그러한 요인들이 실제 지지세 하락으로 이어지는 동력은 바로 전통 민주당 지지층의 비토 심리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비토 심리가 향후 어떠한 방향으로 갈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고 결국 범야권, 범진보, 범개혁 진영의 단일대오 형성을 적극 지지하게 될까요? 그렇게 될 가능성은 적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민주당 전통 지지층, 호남 출신 유권자들의 '범노빠 진영'에 대한 거부감은 본격적인 폭발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봅니다.

민주당 전통 지지층(그냥 '난닝구'라고 부르겠습니다)은 명분에 매우 민감합니다. 아마 대한민국의 현재 정치지형에서 유일하게 실리보다는 명분에 근거한 투표를 하는 집단일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정치적인 유불리 계산이 매우 정확하지만, 실은 그 정치적 계산이란 것 자체가 바로 명분을 위한 싸움의 성격이 강합니다.

이런 성향은 누구든 자신들의 명분 요구를 채워주는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별 거부감이 없이 지지해주는 선택으로 나타납니다. 노무현 지지 그리고 열우당 지지 등이 이러한 성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열우당 실험이 실패했을 때에도 별로 고민하지 않고 통합민주당과 정동영을 지지합니다.

실은 PK노빠들이 가장 결정적으로 믿고 있는 것도 호남 난닝구들의 이런 성향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강간범의 행동방식'입니다. 자빠뜨려서 한번 관계하고 나면 지가 어쩔 거야? 울고불고 하다가도 결국 내게 매달려서 섹스 노예가 되는 거지... 이런 심리죠. 아마 이런 분석은 상당히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근거를 가질 겁니다.

하지만, 이런 분석은 인간 집단의 행동에는 '임계치'라는 게 있다는 걸 간과하고 있습니다. 지금 범호남 유권자층은 박원순 나아가 범노빠 PK 진영에 대해서 점차 불신을 현실화하고 있습니다. 사실 노무현 이래로 이들 PK노빠들이 호남을 대해온 태도를 생각하면 이런 변화는 지나치게 늦고, 미지근한 것입니다. 하지만, 늦고 미지근하다는 것은 그만큼 한번 폭발할 경우 그 반발력이 엄청날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합니다.

지금 범호남 유권자들이 망설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명분 때문이라고 이미 얘기했죠? 바로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보이는 어마어마한 개삽질을 외면하고 박원순이나 노빠부터 응징할 수는 없다는 마인드입니다. 하지만 노빠들이 이 카드로 계속 옭아맬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 게다가 문재인이나 박원순 진영이 계속해서 전통 민주당 지지층을 모욕하는 언사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해찬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던데, 이것도 그다지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할 겁니다. 범노빠 진영의 의도와 그들이 추구하는 그림이 분명해지고 있거든요.

박원순의 당선은 그런 점에서 박근혜에게 별로 나쁘지 않은 결과일 수 있습니다. 박원순의 당선 그리고 범야권 통합이라는 승리는 곧바로 범호남 진영 및 전통 민주당 지지층의 이탈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명분에 약한 우리 난닝구들이 급속하고 전면적으로 이탈하지는 않을 겁니다. 바로 노빠들이 기대하는 것이 이 지점이죠.

하지만, 과거와 같은 80~90% 지지가 아니라, 20~30% 정도의 지지표만 이탈해도 PK노빠들 입장에서는 상당한 타격일 겁니다. 그래서 이 친구들이 더욱더 "부산 경남이 변하고 있다"며 설레발을 치는 것이겠죠. 난닝구 니깟 것들이 20~30% 빠져나가 봐야 아쉽지 않다. 얼마든지 메꿀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어찌 됐건 박근혜로서는 나쁘지 않은 그림입니다. 호남에서 박근혜에 대한 거부감도 과거 전두환 노태우 이회창 이명박에 비하면 비교적 약한 편입니다. 충청도는 더욱 그렇구요.

박원순의 서울시장 당선은 거대한 정계 개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변화를 기획하고 불러일으킨 당사자들이 과연 이러한 변화를 감당할만한 준비가 되어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80년대 운동권들이 자주 인용했던 모택동의 어록 가운데 이런 게 있죠.
 
"작은 불씨 하나가 거대한 들판을 다 태운다."

맞습니다. 하지만 저 거대한 들불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한 상태로 불을 지르면 방화범 자신이 타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걸 흔히 불장난이라고 부르죠. 그 행위의 다른 측면을 묘사하는 표현들로 자업자득, 사필귀정,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재미난 골에 범 나온다 등이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