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본성(nature)/양육(nurture), 유전자/환경, 선천성/후천성을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한편으로 진화 심리학자들과 행동 유전학자들이 본성, 유전자, 선천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했고, 다른 한편으로 온갖 부류의 학자들이 양육, 환경, 후천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했다. 선천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양육, 환경, 후천성을 무시하는 유전자 결정론, 생물학 결정론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후천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본성, 유전자, 선천성을 무시하는 백지론, 환경 결정론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다가 이런 식의 이분법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가 유행처럼 퍼져나갔다. 선천성/후천성 이분법을 둘러싼 논쟁 중 많은 부분이 혼란스러운 개념들과 명제들 때문에 생산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선천성/후천성 논쟁은 이미 죽은 논쟁이 아니다. 선천성/후천성 이분법은 여전히 유효한 의미 있는 논점이며 실증적으로 연구해야 하며 얼마나 실증되었는지를 학자들과 대중에게 알려야 한다.

 

 

 

적어도 네 가지 측면에서 선천성/후천성 이분법은 의미가 있다.

 

첫째, 개인 간 차이 중 어느 정도가 유전자의 차이 때문인지를 따지는 유전율(heritability) 개념은 의미가 있으며 이것은 주로 행동 유전학자들이 연구한다.

 

행동 유전학자들이 유전자만 강조하고 환경의 중요성을 무시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터무니 없는 모함이다. 유전율 개념 자체가 환경의 영향을 고려하고 있다. 만약 어떤 형질의 유전율이 70%라면 개인 간 차이 중 70%가 유전자의 차이로 설명되고 30%가 환경의 차이로 설명된다는 이야기다. 유전율이 100%일 때만 환경의 영향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다. ABO 식 혈액형처럼 환경의 영향이 전혀 또는 거의 없어서 유전율이 100% 또는 그에 근접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IQ, 정신병, 범죄성 등과 같이 논쟁의 초점이 되었던 형질의 경우 행동 유전학자들이 유전율이 100%라고 주장한 경우가 없었다.

 

유전율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볼 때 환경의 영향을 깡그리 무시하는 행동 유전학은 존재할 수 없다. 반면 이 논쟁과 관련하여 유전자의 영향을 완전히 무시하려는 사람들은 꽤 있어 보인다. 그들은 유전율 연구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심리적 개인차와 관련된 유전율 논쟁에서는 순수한 백지론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둘째, 개체군 간 또는 인종 간 차이 중 어느 정도가 유전자의 차이 때문인지를 따질 수 있다.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주제는 “인종과 IQ”이었던 것 같다. 여러 행동 유전학자들이 “흑인이 백인보다 IQ가 상당히 낮은 이유가 부분적으로는 유전자의 차이로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이 논쟁에서도 행동 유전학자들은 환경의 영향을 무시하지 않는다. 개체군 또는 인종 간 IQ 차이가 순전히 유전자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행동 유전학자는 없는 것 같다. 반면 인종 간 IQ 차이가 순전히 환경의 차이 때문이라고 명시적으로, 암묵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아 보인다. 이 논쟁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순수한 백지론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셋째, 남녀의 차이 중 무엇이 선천적 차이이고 무엇이 후천적 차이인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있다. 생식기의 경우에는 선천적 차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사실상 없는 것 같다. 즉 남자의 경우 음경, 고환이 발생(development)하고 여자의 경우 난소, 자궁, 질이 발생하는 식의 차이가 선천적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한다. 평균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키가 크고, 근력이 센데 이런 차이가 선천적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신적인 측면의 남녀 차이가 선천적이라는 진화 심리학자들과 행동 유전학자들의 주장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꽤 있다. “남자가 여자에 비해 선천적으로 공격이다”, “여자가 남자에 비해 선천적으로 자식을 더 사랑한다”, “움직이는 물체와 관련된 공간 지각력이 선천적으로 남자가 여자에 비해 우월하다”, “아기 표정 읽기 능력이 선천적으로 여자가 남자에 비해 우월하다”를 비롯한 온갖 명제들이 있는데 그런 차이가 순전히 후천적인 요인들 때문에 생긴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순수한 백지론에 가까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넷째, 어떤 형질이 선천적 인간 본성인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가리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인간의 뇌 속에 있는 시각 처리 기제의 여러 측면들은 선천적 인간 본성임이 명백하다. 예컨대 인간은 색을 3차원으로 보는데 이것은 인간 본성이다. 많은 사람들이 운전을 할 줄 아는데 이것은 인간 본성이 아니라 후천적인 형질이다. 선천적 인간 본성은 주로 진화 심리학자들이 연구한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질투 기제가 시각 기제처럼 선천적 인간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많은 사람들이 운전 능력처럼 후천적 형질이라고 주장한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죄책감이 선천적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학습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어떤 진화 심리학자들은 도덕 규범의 상당 부분이 선천적 인간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어떤 진화 심리학자들은 죄책감은 선천적이지만 규범은 몽땅 후천적이라고 주장한다.

 

일부 진화 심리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인간 본성과 관련된 선천성/후천성 이분법과 유전자/환경 이분법을 거의 동일시한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선천적 인간 본성을 만드는 데에는 유전자도 개입되고 환경도 개입된다. 아직 과학자들은 인간 본성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정보 중 어느 정도가 유전자에서 나오고 어느 정도가 환경에서 나오는지 밝히지 못했다.

 

이 논쟁에서 후천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백지론자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인간 본성과 관련하여 순수한 백지론자는 없다. 아래 글을 참조하라.

 

진화 심리학 첫걸음마 --- 003. 대량 모듈성 테제가 논점인가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3fZ/251

 

이 논쟁에서 선천성을 강조하는 진화 심리학자들이 후천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진화 심리학자들 중에 후천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

 

 

 

이덕하

2011-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