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주의적 공산주의는 가능한가?
 

나는 언제부터인가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대신 다윈주의적 공산주의자(Darwinian Communist)라고 부르고 있다. 이 말은 Peter Singer의 『다윈의 대답 1 –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A Darwinian Left: Politics, Evolution and Cooperation)』에서 따온 것이다. Singer가 개혁주의적 좌파(어떤 사람은 Singer가 좌파라고 보기에도 민망하다고 할 것이다)인 반면 나는 혁명주의적 좌파다.

 

다윈주의적 공산주의란 말을 본 사람들 중에는 이 말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나는 스스로를 철저한 다윈주의자이자 철저한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철저한 다윈주의자는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다윈주의적 공산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 중에는 다윈주의를 바탕으로 한 진화 심리학적 명제들이 복지 제도와 충돌한다는 생각도 깔려 있는 것 같다. 공산주의를 복지 제도의 극단이라고 본다면 진화 심리학에 대한 지지와 공산주의적 신념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공산주의는 첫째, 민주주의의 확장(예컨대 기업의 사장을 투표로 뽑는 것), 둘째, 가난한 사람을 위한 불로소득(복지 제도)의 확장, 셋째, 부자를 위한 불로소득(이윤, 이자, 상속)의 축소나 폐지 등을 포함한다. 즉 나는 복지 제도의 확장이 공산주의의 한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복지 제도는 진화 심리학의 여러 명제들과 충돌하는 것일까? 만약 진화 심리학을 받아들인다면 인간 본성의 암울한 측면을 인정하고 복지 축소나 폐지를 주장하게 될 수밖에 없을까?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진화 심리학을 싫어하는 이유 중에는 복지 제도와 진화 심리학이 모순된다는 믿음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진보주의자들은 대체로 복지 제도의 확장을 지지하기 때문에 진화 심리학을 싫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그런 믿음에 대한 반박이다. 복지 제도에 대한 신념과 진화 심리학의 여러 명제가 반드시 양립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진화 심리학을 싫어하며 복지 제도를 옹호하는 진보주의자들이나 복지 제도를 싫어하며 진화 심리학을 옹호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다.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사실에 대한 과학적 명제에서 당위에 대한 도덕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명제를 끌어내는 것 자체가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볼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 심리학의 명제는 과학적 명제(과학적으로 잘 입증된 명제라는 뜻이 아니라 과학 영역의 명제라는 뜻이다)이고 복지 제도에 대한 신념은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둘이 양립가능한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어떤 연구소에서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하자. 사형수 100명을 제비 뽑기를 해서 무작위로 50명으로 이루어진 두 집단으로 나눈다. 한 집단에는 농약 1리터를 주고 다른 집단에는 가짜 농약을 1리터 준다. 가짜 농약은 농약과 색과 맛은 비슷하지만 농약의 핵심 성분은 전혀 없다. 1리터를 모두 마시게 한 후 50시간 동안 관찰한다. 이 때 누가 진짜 농약을 마시고 누가 가짜 농약을 마셨는지는 피험자도 실험자도 모르게 한다. 실험 결과 농약을 마신 집단은 모두 사망했고 가짜 농약을 마신 집단 중에는 사망자가 한 명도 없었다. 연구소에서는 농약이 인체에 매우 해롭다는 결론을 내린다.

 

아마 사형 제도를 옹호하며 과학적 정신에 충만한 사람은 이중맹검법, 가짜 약(placebo) 효과 등을 고려해서 엄격히 시행된 이 실험 과정을 보면서, 그리고 농약을 먹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형수를 보면서 매우 므흣해 할 것이다. 물론 나같이 사형 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리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이 글은 사형 제도를 다루는 글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연구소의 결론인 “농약은 인체에 매우 해롭다”라는 명제가 과학적 명제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 명제를 접한 후에 “농약을 아이들의 손이 닿는 곳에 보관하면 안 된다”라는 규범을 제안했다고 하자. 이 명제는 윤리적 명제다. 이 사람은 과학적 명제에서 윤리적 명제를 도출했기 때문에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한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이 명제를 도출한 과정을 좀 더 추적해 보자.

 

전제 1: 아이들이 다치거나 죽도록 하면 안 된다(윤리적 명제).

전제 2: 농약은 인체에 매우 해롭다(과학적 명제).

결론: 농약을 아이들의 손이 닿는 곳에 보관하면 안 된다(윤리적 명제).

 

결론이 도출되는 데에는 전제 1과 전제 2가 모두 필요했다. 윤리적 명제를 도출하는 데에 과학적 명제가 전제로 쓰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윤리적 명제가 전제로 쓰인 것도 사실이다. 나는 어떤 윤리적 명제가 전제로 깔려 있지 않은 이상 과학적 명제가 아무리 많아도 윤리적 명제를 도출할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전제로 깔려 있는 그 윤리적 명제 중에 매우 근본적인 것들 예컨대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와 같은 것들은 과학적 명제에서 도출될 수 없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 명제는 어떤 명제에서도 도출될 수 없다. 즉 정당화가 불가능하다.

 

어쨌든 과학적 명제에서 윤리적 명제를 도출하는 것이 항상 자연주의적 오류인 것은 아니다. 만약 어떤 더 근본적인 윤리적 명제가 전제로서 깔려 있다면 윤리적 논증 과정에서 과학적 명제가 쓰인 것 자체는 문제가 안 된다. 따라서 복지 제도와 관련한 윤리적, 정치적 논증 과정에서 진화 심리학자들이 주창하는 과학적 명제들이 끼어든다고 해서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인구 증가에 대한 걱정
 

Thomas Robert Malthus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 반면 식량과 같은 것은 산술급수적으로만 증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만약 복지 제도를 통해 태어난 모든 인간을 다 부양한다면 인구 폭발 때문에 재앙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진보적이었던 Darwin과 사회주의자였던 Wallace는 Malthus의 복지 폐지 주장에는 동감하지 않았지만 그의 책에서 생존 경쟁이라는 아이디어를 얻어서 자연 선택 이론에 이르렀다. 이런 면에서 Malthus의 걱정은 진화 생물학과 어느 정도 연결된다.

 

이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는 아주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콘돔이 바로 그 해결책이다. 이제는 성교를 마음껏 즐기면서도 출산을 통제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어느 정도 출산을 스스로 억제한다면 인구 폭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인류 타락에 대한 걱정
 

Herbert Spencer는 인류가 진화하면서 점점 똑똑해지고 도덕적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인류가 점점 똑똑해졌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인간이 더 도덕적으로 진화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동물들이 더 선하게 산다고 믿는 것 같다.

 

어쨌든 Spencer는 하층민들이 선천적으로 더 멍청하고, 사악하고, 게으르다고 생각했다. 멍청하고, 사악하고, 게으르기 때문에 하층민이 되었다고 본 것이다. 만약 복지 제도로 하층민들이 생존하고 번식할 수 있도록 한다면 인류가 더 멍청하고, 사악하고, 게으르게 되는 방향으로 진화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 Spencer의 걱정이었다. 만약 복지 제도를 폐지한다면 인류가 더 똑똑해지고, 착해지고, 부지런해지는 방향으로 더 빨리 진화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Spencer에 따르면 인류 타락 자체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게다가 만약 인류가 타락하게 되면 사회는 더욱 엉망이 될 것이다. 더 멍청하고, 사악하고, 게으른 미래 인류가 별로 잘 살 것 같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Spencer는 인류의 타락을 막기 위해, 그리고 미래 인류의 행복을 위해 복지 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Spencer의 생각은 온갖 방면에서 반박할 수 있다. 두 가지만 들어보자.

 

첫째, 더 나은 인류로 진화하도록 하는 것이 도덕적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무시할 수 있다. 이것은 과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의 문제다. 인류의 이상을 설정하고 그 이상에 가깝도록 인류가 진화하도록 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현재와 가까운 미래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도록 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을 것인가? 나는 후자를 중요시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에 토론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둘째, 상류층이 하류층에 비해 더 똑똑하다는 점은 여러 증거로 상당히 입증되었다. 하지만 더 도덕적이라는 점이 입증된 것 같지는 않다. 사장, 장성, 정치인들 중에 평범한 사람은 생각지도 못하는 매우 사악한 짓을 하는 자들이 많은 걸로 봐서는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체제는 정신병질자가 성공하기 쉬운 체제인 것 같다. 상류층이 하류층에 비해 더 열심히 일하는지도 의문이다. 상류층을 유한 계급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리고 실제로 상류층 중에는 불로소득으로 얻은 엄청난 돈을 사치로 낭비하는 경우도 많다.

 

 

 

 

 

무임 승차에 대한 걱정 – 정신병질자
 

일부 진화 심리학자들은 정신병질이 적응으로서 적응했다고 본다. 즉 남을 등쳐먹는 전략으로서 진화했다는 것이다. 이런 적응 가설에 동의하지 않는 심리학자들도 대부분은 정신병질 중에 특히 악질적인 일부는 선천적으로 양심, 죄책감 등이 없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복지 제도는 정신병질자에게 악용될 수 있다. 즉 일할 능력이 있음에도 일하지 않고 노는 게으른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정신병질자처럼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인간의 게으른 정도에는 사람마다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복지 제도는 정당한 이유 없이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사람들이 심각한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

 

 

 

 

 

무임 승차에 대한 걱정 – 노동 의욕 저하
 

일부 진화 심리학자들은 공동 노동을 할 때 인간의 노동 의욕이 다른 사람이 열심히 일하는 정도에 따라 조절되도록 설계되었다고 믿는다. 남들이 열심히 일할 때에는 자신도 열심히 일하고 남들이 땡땡이 칠 때에는 자신도 땡땡이 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공동 노동의 경우 노동으로 얻은 자원이 노동량과 상관 없이 분배될 수 있다. 따라서 만약 남들이 땡땡이 칠 때 자신만 열심히 일한다면 비용만 많이 치르고 얻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이 다른 사람이 일하는 정도에 맞추어 자신도 일하도록 진화했다는 것이다.

 

만약 복지 제도가 확장된다면 사람들은 조금씩 덜 열심히 일할 것이며, 옆 사람이 조금씩 덜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게을러질 것이며, 더 게을러진 옆 사람을 본 사람은 더 게을러질 것이며, 결국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어 아무도 일하지 않아서 사회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위에서 언급한 진화 심리학적 명제를 응용하려는 어떤 사람들의 걱정이다.

 

 

 

 

 

지위와 평판에 대한 욕망 – 노동 의욕을 강화하는 힘
 

여자는 어떤 남자를 남편으로 삼고 싶어하는가? 다른 여러 요인들도 있지만 부지런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을 게으르고, 지위가 낮은 사람보다 선호할 것이다. 많은 진화 심리학자들이 여자가 그런 남자들 선호하도록 설계되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게으르고 지위가 낮은 남자와 결혼한 여자는 번식 경쟁에서 밀려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자가 어느 정도 부지런하도록, 지위를 탐하도록 설계되었다고 기대할 수 있으며 많은 진화 심리학자들이 그렇게 믿는다. 그 이유는 인류의 경우에는 결혼을 하지 못하면 십중팔구 번식 경쟁에서 밀려나기 때문이다.

 

많은 사냥-채집 사회에서 남자가 사냥해온 고기를 부족 구성원들이 공평하게 나누어 먹는다. 사냥해온 남자와 그 가족이 다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이 차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냥-채집 사회의 남자들은 사냥에 열중한다. 사냥 기술을 뽐내면 지위가 높아지는 것에 도움이 된다. 또한 열심히 사냥하는 모습을 여자들이 좋아한다. 아마 부분적으로는 이런 이유 때문에 사냥으로 잡은 고기가 공공재임에도 불구하고 사냥-채집 사회의 남자들이 열심히 사냥을 하는 것 같다.

 

인간은 돈이나 자원만 추구하지 않는다. 사실 돈은 인간 진화의 척도로 보면 최근에 발명되었기 때문에 돈에 대한 욕망이 진화했을 것 같지 않다. 인간에게는 지위가 평판에 대한 근원적 욕망이 있다는 것이 많은 진화 심리학자들의 믿음이다. 물론 여자에게도 부지런하다는 평판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남자들은 지극히 게을러서 자식을 잘 돌볼 것 같지 않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타고난 본성 때문에 복지 제도가 확장되더라도 모두가 일을 하지 않고 땡땡이 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빈부격차에 대한 걱정
 

일부 진화 심리학자들은 결혼할 가망성이 극히 적어도 번식의 관점에서는 꽝이 될 수 있는 남자들이 강간을 비롯한 온갖 범죄를 저지르도록 설계되었다고 믿는다. 어차피 정상적인 경로로 결혼을 해서 번식을 할 수 없다면 강간이라도 해서 유전자를 퍼뜨리겠다는 심보가 진화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적응 가설을 믿지 않더라도 많은 심리학자들이 하층민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좌절을 느끼고 그 좌절감이 분노와 범죄로 이어지기 쉽다는 점을 인정한다.

 

만약 빈부격차가 심하다면 하층민의 좌절감은 더 클 것이며 그로 인해 범죄도 많이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복지 제도를 통해 빈부격차를 줄일 수 있다면 범죄와 같은 사회악도 줄일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맺음말
 

나는 여기에서 소개한 여러 진화 심리학 가설들이 얼마나 잘 입증되었는지에 대해서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진화 심리학의 가설들을 비롯하여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을 다루는 가설들은 검증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내가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은 진화 심리학의 여러 명제들이 복지 제도 축소를 가리키지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어떤 가설들은 복지 제도 축소를 정당화하기 위해 쓰일 수 있고 어떤 가설들은 복지 제도 확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쓰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미국의 많은 진화 심리학자들이 복지 제도 확장을 주장하고 있다. 진화 심리학자들 중에 나처럼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또는 전혀 없다. 하지만 미국 공화당을 지지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다. 대체로 미국 민주당을 지지하거나 그보다 더 좌파적인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지지한다.

 

이렇게 상황이 복잡한데도 진보주의자들이 진화 심리학이 복지 제도 축소를 위한 논거로만 쓰인다고 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과학의 영역인 진화 심리학의 명제가 틀렸다고 무턱대고 주장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2009-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