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갖고 있던 장 자크 아노 감독의 "불을 찾아서(Quest for fire)" 비디오를 무슨 일로 다시 틀어보게 되었다. 다시 봐도 역시 재미있다. 대사라고 할 수 있는 소리는 한 마디도 없는데 (이보다 대사가 더 적은 영화는 세상에 오직 '갈매기 조나단' 뿐이라는데 아직 본 적은 없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다 알아들을 수 있다. 내용이야 다들 아시는 대로... 불을 이용할 줄은 아는데 만들어내지는 못하는 어떤 원시인 부족이 다른 종족의 습격으로 인해 그 소중한 불을 꺼트리게 된다. 결국 원정대 3명을 구성해서 밖에 가서 불을 구해오라는 특명을 내리는데 이들이 외부세계에서 이런저런 모험을 겪다가 어떤 선진국에 가서 아예 불을 만들어내는 방법까지 습득해 온다는 것 (덤으로 여자까지 ^^) 뭐 문화적으로 다른 세계의 원시인들이 부딪칠 때 얻는 충격들을 꽤 상세하게 그렸다. 무기, 웃음, 사랑, 일부일처제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 문화인류학적으로도 꽤 긴 토론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수효과만 보더라도 당시 CG도 없는 상태에서 검치 호랑이며 매머드등을 별로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 놨다. (그보다 한참 후에 나온 10,000 BC 따위보다 백배 낫다. 참 아류작을 만들어도 어떻게 그렇게 만들어 놓나...) 그래서 찍는데 6년이나 걸린 거겠지...

아무튼 대부분 저 당시에는 정말 저랬겠다 싶은 내용이긴 한데... 그 중에 전혀 현실감이 없는 장면이 딱 한군데 있다. 주인공들이 어떻게 불을 훔쳐내긴 했는데 하필이면 그 주인들이 식인종이었다. 처음엔 달아났지만 결국 이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됐다. 주인공도 만만찮게 싸울 채비를 하지만 워낙 숫자에서 밀리는지라 승산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이때 갑자기 어디서 매머드 무리가 나타났다. 그 원시인 주인공, 갑자기 풀 한줌을 뜯어(당연히 뭐 대단한 풀도 아니고 사방천지에 깔려 있는 평범한 풀이었다) 뭐라뭐라 기도인지 주문인지를 외우면서 매머드 대장 한 마리에게 바쳤다. 그 매머드, 가만히 보다가 그 풀을 받아먹더니 모든 무리들이 갑자기 그 식인종들에게 덤벼드는 것이었다.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는 건 당연지사...

뭐 이것이 인류에게 종교적인 행위가 생겨난 경위를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매머드의 입장에서 보자. 무엇 때문에 원숭이 종족 두 무리가 싸우는데 한쪽의 편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풀 한줌 얻어먹었다고? 다급한 상황에서 고개 숙이며 한번 애걸했다고? 여기서 현실성의 문제보다도 더욱 황당하게 생각되는 건 그 도덕적인 문제이다. 매머드들의 멸종에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한가지 중요한 요소가 인류에 의한 대량학살이란 점은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매머드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종족만 먹이로 삼는 종족 보다 식인종들이 이기는 편이 당연히 더 유리하다. 이 주인공들이 매머드들에게 신세 졌다고 해서 나중에 은혜를 갚았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불을 자유롭게 다루어 세력이 커지고 난 다음엔 당연히 이들을 잡아먹어 멸종을 시켰을 것이 너무 뻔하다.

매머드들의 명예를 위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일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영화적 상상일 뿐 실제로 이들이 자신을 멸종시키려는 자들을 위해 봉사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오랜 시일이 흘러 21세기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의 '인류' 가운데 일부는 급할 때만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에 넘어가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에게 노력봉사를 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들리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