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만부 넘게 팔렸다는 얘기를 들은게 지난주 초니 지금쯤은 5만부를 넘겼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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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파가 다수인 상태로서의 자연상태와 신분제 계급사회의 우향적 성격

 

  1) ‘자연상태라는 말은 사회계약론에서 가설적으로 상정되는 상태이고 실제로 인간의 역사에서 자연상태라는게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원시상태나 정착 생활 이전 상태나 문명 이전 상태라고 말하는 게 더 좋을 지도 모른다. 농경, 목축, 행정을 통해 인간 자신의 자연적 측면을 포함해 자연을 적극적으로 변형/관리하는 활동에 의해 물질적 삶이 영위되지 않던 시대라는 의미에서.

 

  2) 그런데 원시상태에서는 [개개의 부족 사회 내부만 보자면] ‘일단 나부터 살고보자라는 식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다수이지 않았다. 오히려 원시상태는 소위 원시공산주의사회 또는 평등주의 사회, 즉 성원들 모두가 계급적 차이가 없는 수준의 엇비슷한 물질적 생활을 누리는 사회였다. 협업을 통해 얻은 것이라 하더라도 내 기여가 더 크니 내가 더 가져가겠다는 태도는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 태도는 사회 자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범죄행위로 여겨졌다. 이 점은 동시대의 수렵 부족들의 생활상에 대한 인류학적 필드 워크를 통해 충분히 밝혀졌다.

 

  3) 다른 한편 원시공산주의 사회도 개개의 사회 내에서만 공산주의적 원리가 관철되었을 뿐 사회들 사이의 관계는 일단 우리 사회(부족)부터 살고 보자라는 논리가 작동했다는 의미에서는, 그래서 사회들(부족들) 사이에 살육과 약탈과 강간이 당연시 되었던 전쟁이 빈발했다는 의미에서는 쎈 놈이 더 가져가야 한다는 우파적 논리가 지배했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지속적으로 더 가져가는 개인들의 존재를 뒷받침할 수 없었던, 누가 오늘 더 가져가면 당장 다른 누군가 굶거나 영양실조에 걸려서 내일의 협업이 불가능해지고 따라서 더 가져갔던 이들의 내일이나 내일 모래의 생존도 위태로워지는 수준의, 기본적으로 기술이나 개개인들의 특별난 창의력보다는 운과 일사불란한 협업 자체가 획득되는 것의 양을 결정했던 수준의 미미한 생산력이 그 논리가 개개의 사회 내에서도 관철되는 것을 제한했을 뿐이다.

 

  4) 그러면, 그 직후의 계급사회, 즉 농경, 목축, 행정을 통해 인간 자신의 자연적 측면을 포함해 자연을 적극적으로 변형/관리하는 활동에 의해 물질적 삶이 영위되기 시작하자마자 생겼던 사회는 우가 다수인 사회였느냐 하면 그것도 꼭 그렇다고 잘라 말하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엄청 불평등한 사회, 경제적/군사적/정치적 강자가 많은 것을 독식하는 신분제 사회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공동체 사회였다. 하층민이 먹을 게 없어서 굶어죽거나 하는 것을 방치하지 않을 의무가 귀족/양반들에게 주어져 있는 사회라는 의미에서, 사회 성원 모두에게 최소한의 물질적 삶을 보장해주어야만 한다는 룰이 작동하기로 되어 있는 사회라는 의미에서, 소유자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사유재산이라는 게 매우 제한되어 있는 사회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5) 그러나 지배계급 성원들이 자신들이 우발적으로 얻은 그 지배계급이라는 지위 - 그들이 더 세서, 즉 그들이 더 잘나고 더 강해서 얻은 게 아니다. 처음 그 지위를 얻은 이들은 더 잘나고 더 강해서 그 지위를 얻었을 수도 있지만 일단 계급사회가 자리 잡으면 지배계급 성원들은 신분세습과 그 신분세습을 보장하는 국가 권력 덕분에 그 지위를 얻는다 - 및 그 지위에 의해 제한적 수준에서나마 자기의 소유물이 된 것들을 자기의식적으로 당연시했고 더 나아가서는 그 룰을 그다지 잘 지키지 않았다는 면에서는 우파적 논리가 지배했던 사회이기는 하고 피지배계급 성원 다수조차도 그 논리를 당연시했다는 의미에서 우가 다수였던 사회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 좌파의 출현..

 

  1) 좌파의 출현은 근대 사회와 더불어서이다. 역설적인 것은 근대사회는 기본적으로 우향화된 사회라는 것이다. 전근대적 공동체적 신분제 사회가 아무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우향화된 사회였고 그러한 사회성격을 논리적으로 정교하게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체계가, 거의 필요가 없어서, 거의 없었다면, 자본주의적 근대사회의 헤게모니적 세력으로서의 우파는 전근대 사회의 불합리하게 불평등한 성격을 공격하고 자신들이 획득하고 향유하는 모든 것은 과거 귀족들/양반들이 획득하고 향유하던 것들과는 달리 자신들이 사회에 한 생산적 기여의 정당한 대가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은 국가가 시장친화적인 간섭만 하고 그 외의 간섭은 일체하지 않는다면 모든 이들이 각자가 사회에 생산적으로 기여한 만큼 획득하고 향유하게끔 되어 있고 더 나아가서는 시장이 커지면, 즉 경제가 성장하면 모든 이들의 처지가 개선되는 시장경제 - ‘자본주의라는 말은 별로 즐기지 않는다 - 사회의 일원이라는 것이고 단지 더 기여해서 더 획득하고 향유할 뿐이라는 것이다.

 

  2) 이런 근대적 우향 사회에서 좌파는 어떻게 출현할 수 있었나? 그것은 우선 유일한 시장경제 사회로서의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이 우발적으로 민주주의의 발전을 동반했고 따라서 일정하게 반체제적 생각을 표현할 자유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우파의 자기 정당화 논리가 현실에 비추어볼 때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발전 초기의 하층민들의 생활은 봉건제 말기의 하층민들의 생활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삶의 안정감을 박탈당하기까지 했다. 그 이후의 발전 동안에도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을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주어야 하는 같은 동료인간으로서보다는 가능한 최대한 쥐어짜야 하는, 그리고 그렇게 하기위해 그들의 무산자이자 과잉공급됨이라는 불리한 위치를 최대한 이용해야 하는 생산의 한 요소로만 대했다. 서구 선진국들 기준으로 대략 20세기 중반부터 그들이 인간다운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는 대우를 받게 된 것은 시장경제의 작동이 그것을 보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조직화된 투쟁을 했기 때문이고 현실사회주의 나라들의 위협이 닥쳐있었기 때문이다. 20세기 말부터는 경제가 성장하면 모든 이들의 처지가 개선된다는, 가장 중요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도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거의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상대적 빈부격차가 커졌고 절대적으로 더 빈곤해진 이들이 생겼다. 물론 19세기 중반부터 과연 자본가들이 사회에 생산적 기여를 하며 그들이 그 기여의 대가로서 가져가는 엄청난 이윤이 과연 그 기여의 정당한 대가인지를 의심하는 좌파 정치경제학도 성립했다. 금융 투기꾼들이 지구상의 어느 사회에도 거의 아무런 생산적 기여를 하지 않은 채 천문학적 수익을 챙기는 현실에서 이 정치경제학의 수명이 다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3) 좌파는 현재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사회가 기본적으로 나쁜 의미에서 불평등한, 즉 정당화될 수 없는 불평등이 구조적으로 뿌리박은 사회라고 평가하고 국가가 적극적인 시장교정적 개입을 하지 않거나 본질적으로 다른 사회, 즉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하지 않으면 이 불평등은 평화로운 사회 자체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지경으로 커질 것이라고 판단한다. 일부 좌파는 생태계와 환경의 치명적 파괴와 오염이 불가피할 것이라고도 판단한다. 총수는 이런 좌파적 판단과 그에 따른 행동을 본능적인 공포심에 뿌리박혀 있는 우파적 논리 - 세계를 약육강식의 공포스러운 정글로 보고 내가 먼저 포식자가 되고 그 포식자로서의 지위를, 남들은 어떤 나락에 빠지든, 어떻게든 유지해야 겠다는 태도 - 아니, 그 공포심으로부터 곧바로 나오기 때문에 논리라기보다는 기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비해 더 이성적인 논리, 즉 논리적 추론을 통해 시스템을 문제삼는 태도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본능적 공포심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좌파인 사람들 역시 그 공포심을 제거한 사람들은 아니고 다만 선천적으로 그 공포심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파와 좌파의 대립은 본능에 휘둘리는 이로 태어난 이들과 그 본능을 이성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춘 이들로 태어난 이들의 대립이다. 모든 이들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우파적 본능의 강력함은 환경이나 처지의 변화를 겪으면서 공포심이 되살아나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하는 이들은 심심치 않게 있는 반면 우파에서 좌파로 전향하는 이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한다.

 

  4) 우파적 기질과 좌파적 기질이 타고나는 뇌의 차이라는 총수의 생각이 전혀 낮선 생각인 것은 아니다. 그런 식의 주장을 하는 뇌과학자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우파적 태도가 대단히 논리적으로 정교하고 복잡한 사유로도 표현될 수 있는 걸 보면, 우파 지식인들과 석학들이 적잖은걸 보면, 과연 우파적 태도를 타고난 기질적 태도라고, 논리적 추론이라는 매개를 선천적으로 덜 거치게끔 되어 있는 이들의 태도라고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물론 정교한 좌파적 논리의 기준에서 보면 가장 정교한 우파적 논리도 소박하고 엉성해 보이기 마련이고 그래서 논리라고 할 만 한게 없어 보이기 마련이기는 하다. 그러나 우파 지식인들과 학자들 입장에서는 좌파의 논리가 그러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5) 모든 이들이 우파적 논리에 경도될 잠재력과 좌파적 논리에 경도될 잠재력을 균등하게 가졌지만 사회 구조 자체가 우파적 논리에 도장을 찍어주기에,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파적 논리를 더 자주 접하기에 좌파보다는 우파가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물론 좌파가 소수라도 있는 것은 이미 얘기했듯이 많은 자본주의 사회들이 전체주의 사회이기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일정하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고) 우파적 논리를 의심할 만한 그럴듯한 이유들이 현실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소수파와 현실부정파는 바로 소수파이자 현실부정파라는 바로 이유로, 대다수가 상식으로 여기는 것이 왜 상식이 아닐 수도 있는지를 보여주여야 하기에, 이미 상식이 되어 있는 생각을 추인하고 조금 더 체계화하면 그만인 우파보다는 생각을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깨는방식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우파보다 더 지적으로 보일 수는 있다.

 

  6) 더욱이, 뿌리까지 캐다보면 우파적 태도는 결국 세계를 약육강식의 공포스러운 정글로 보고 내가 먼저 포식자가 되고 그 포식자로서의 지위를, 남들은 어떤 나락에 빠지든, 어떻게든 유지해야 겠다는 태도일 수도 있고, 우파 사상의 한 분파인 자유지상주의를 그런 태도를 함축하거나 가능하게 하는 것들 중 하나로 볼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우파의 공식적 대표 이데올로기는 공정한 분배의 기제로서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모든 이들의 삶의 질을 절대적으로 개선시키는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이라는 생각이다. 지난 40년 가까이 그런 식의 경제발전이 일어나지 못한 이유를 우파들은 국가가 시장친화적이지 않게 경제에 간섭한 결과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따라서 우파의 본심내가 먼저 포식자가 되고 그 포식자로서의 지위를, 남들은 어떤 나락에 빠지든, 어떻게든 유지해야겠다는 마음이라 해도 좌파는 이 본심을 직접 가리켜 보이며 비난할 수는 없다. 이 본심은 오직 이론을 통해서만 보이기 때문이다.

 

  7) 지금 한국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라 욕하는 적잖은 이들이 이 본심을 꿰뚫어본 것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그들 다수는 그 꿰뚫어봄에 상응하는 수준의 정치적 실천을 욕심내지 않는다. 조금 더 개혁적이고 덜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들어서는 것만으로는 이 본심이 관철되는 수준에 변화가 있을 리 없다는 것, 현재 자본이 누리는 자유를 놓고 볼 때 그저 조금 더 개혁적이고 덜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들어서는 것만으로 일반 민중들의 삶의 질이 개선될 수 없다는 현실을 보지 못한다. 참여정부 시절동안 한국의 분배구조가 더 악화되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그 시절 동안의 이런 저런 상부구조적 차원의 개혁의 성과들이 전혀 구조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건희같은 부류의 인간들을 한국 자본주의로부터 싸그리 제거하고 조중동같은 언론들을 거세시켜 한국 자본주의를 정상적인 자본주의로 개혁한다 한들 양심적 자유주의적 식자들의 속이 좀 후련해지는 것 말고는 대다수 민중들의 삶의 질면에서 더 나아질 것은 없다. 대다수 민중들, 60%에 육박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이 팍팍한 것은 한국자본주의가 천민자본주의이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민영화의 논리와, 즉 현단계의 자본의 논리와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조금 더 사람같은 이들이 정치하는 더 리버럴하고 개혁적인 정부만으로는 이 논리에 전혀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서구 여러 나라들에서 증명되었다. 블레어와 오바마가 무엇을 이루었나? 문재인같은 이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 것 같은가?


3. 한국 사람들에게 정말로 섬나라 의식이라는 게 있나? 오히려 한국 사람들, 특히 40대 이하 사람들 - 이들 중 가장 젊은이들은 일본을 갈라파고스화되어 있다고 비웃는 이들이다 - 은 분단된 나라 사람들 치고는 꽤나 자신들을 세계 속에서 포지셔닝 하는 이들 아닌가? 배낭 여행만 하더라도 한국 청년들이 배낭여행에 나서는 규모나 수준은 세계적 수준 아닌가? 경제와 인구의 규모를 놓고 볼 때 바깥의 문물과 지식에 한국만큼 심혈을 기울이는 나라가 있나? 잘 팔리지도 않는 난해한 인문한 서적들조차도 곧잘 번역되어 나오지 않나? 유럽에서 까지도 극소수나마 매니아를 만들어내고 있는 한류는 또 어떤가?

 

4. <범 진보 세력이 현재 주어져 있는 실현가능성 있는 가장 진보적인 대중의식(반이명박주의/반한나라당주의)에 맞물리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또 문재인이 자연스럽게 그 통합된 정치세력을 대표하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고서는 승산이 없고 또 한 번 한나라당 정권이 창출되면 대중들 사이에 정치적 허무주의가 확산되고 기존의 범진보 진영은 산산조각 날 것이다. 물론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천국이 도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이명박 시절만큼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마치 노무현 시절로 인해 이명박 시절이 얼마나 나쁜지가 자각될 수 있는 것처럼 문재인 시절 또한 그런 역사적 기준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전체를 일관하는 가장 핵심적인 주장인데, 이명박 시절을 노무현 시절의 구조적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 이들, 노무현 시절을 오직 상부구조가 약간 더 리버럴해진 것 말고는 (이 리버럴해짐도 전혀 구조적 수준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냥 자기편 인사들을 문화계 요직에 앉힌 게 전부다) 이루어진 게 없는 시절로 인식하는 이들을 설득할 만한 논변이 없다. 양 시절 사이에 뭔가 실질적 차이가 있다는 생각은 상부구조상의 리버럴한 변화만으로도 기쁨을 느끼고 그 변화로 인해 이익마저 챙길 수 있는, 사는데 별 걱정 없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지식인/먹물들의 원망사유일 수도 있다. 물론 다수 대중의 물질적 삶의 질은 이명박 시절 더 악화되었다. 그러나 그 악화의 메커니즘이 기본적으로 노무현 시절 발동된 것이거나 방임된 것이라 보는 이들이 적잖다. 특히 진보신당류의 입장은 자기 외의 야권정치세력은 노무현 시절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의지와 이념을 결여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냥 총수의 본능적 통찰력과 균형감각을 믿어달라거나 두리뭉실하게 '더 좋았다'라고 얘기하지 말고 '대중적 언어'로 뭔가 가슴에 와닿는 차별성 주장을 해야 한다. 오바마 얘기도 나오던데, 오바마가 단순히 천국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만은 아니다. 수많은 이들의 울음보를 터뜨리며 당선되었던 그 오바마는 어떤 거시적인 진보적인 정책도 의욕적으로 밀어붙인 적이 없으며 오바마 민주당 정권 아래서 미국 일반 민중의 삶의 질은 부시 시절보다 더 악화되었다. 오바마가 또 한 번 대통령이 되거나 민주당에서 다른 누가 대통령이 된다 한들 나아질 것 같은가? 좌파정당이 치고 들어와 양당구조가 깨지지 않는 한 미국에 미래는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떤 근거로 통합야당과 문재인이 오바마 민주당 정부 이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야 하는가?


5. 박근혜에 대한 평가. 구태의연한 아버지 시대의 프레임 말고는 아는 게 없다/구체적생활의 감각이 없다, 즉 한국인들 다수가 겪고있는 고난을 체감할 기회를 누려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명박보다 더 나은 정치를 할리가 없다라는 것인데, 이건 박근혜라는 개인의 한계인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인들 집단으로서의 한나라당의 구조적 한계가 아닌가? 한나당에 박근혜보다 경험을 폭넓게 하고 공부를 많이 해서 비교적 합리적인 보수 이념을 지닌 인사가 극소수나마 있다 하더라도 수구기득권반공재벌세력을 대변한다는 한나라당이라는 것의 구조적 아이덴티티 자체가 그런 인사가 대통령 후보로까지 나서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지 않는가? 그게 가능해진 한나라당이라면 이미 민주당과도 전혀차이 없는 정당이다. 박근혜의 높은 지지율에 대한 분석은 통찰력 있지만 박근혜의 개인적 한계에 대한 구구절절한 얘기는 한나라당의 구조적 한계에 대한 초점을 희미하게 할 우려가 있다.

 

6. 황우석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구조와 프레임의 더러운 요소들을 집약적으로 체현한 인물이었지 단순히 생래적으로 보수적이거나 인간적 과오를 저질렀던 정도의 인물이 아니었다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