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론 중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가장 유명한 것 같다. 플라톤은 모든 존재는 이데아의 희미한 그림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현실 속의 삼각형은 삼각형의 이데아의 왜곡된 판형일 뿐이다. 아무리 삼각형을 잘 그려도 완벽한 직선일 수는 없다. 또한 삼각형의 이데아에 완벽하게 부합하려면 선의 두께가 0이어야 하인데 실제로 그린 선은 두께가 0이 아니다. 세 개의 직선이 세 개의 각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삼각형의 본질이다. 실제 삼각형은 이런 본질을 어느 정도만 구현할 뿐 완벽하게 구현하지는 못한다.

 

플라톤은 이런 식의 생각을 생물에도 적용했다. 세상에는 인간의 이데아, 토끼의 이데아 등이 있다. 그리고 실제 삼각형이 삼각형의 이데아를 불완전하게 구현하듯이 실제 인간과 실제 토끼는 인간의 이데아와 토끼의 이데아를 불완전하게 구현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의 시초(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부터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다만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한 현실 속의 존재가 어느 정도 이데아에서 벗어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생각은 인간은 원래부터 인간이었고 토끼는 원래부터 토끼였다는 생각과 들어맞는다. 인간의 어머니도 인간이었고, 그 어머니도 인간이었고, 그 어머니도 인간이었다. 이런 식으로 아무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도 인간의 어머니는 인간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영원히 거슬러 올라간다고 믿었고 어떤 이들은 기독교식 창조론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믿었다. 신이 현재의 형태로 인간을 창조한 후 본질적으로 인간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찰스 다윈 이전부터 이런 본질론 또는 이데아론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 따르면 생물은 진화한다. 따라서 “손가락은 열 개”라는 명제가 우리의 먼 조상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윈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진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종의 기원』에서 잘 정리했다는 점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다윈 이후에 나온 증거들까지 수집하여 『지상 최대의 쇼』를 썼다. 진화의 증거를 보고 싶은 사람들은 읽기 까다롭고 시대적 한계가 있는 『종의 기원』보다는 『지상 최대의 쇼』를 읽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얼핏 들어보면 이것은 다윈에서 플라톤으로 후퇴하는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진화 심리학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본질 또는 본성 개념을 삼각형이나 산소 원자 등에 적용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끝없이 진화하는 생명체에 적용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 아닐까? 진화 심리학자들은 말로만 다윈을 들먹이지만 다윈의 핵심 업적 즉 생물학계에서 본질론을 파괴해 버린 업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진화 즉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은 이제 명백히 입증되었는데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창조론자나 하는 것이 아닐까?

 

 

 

진화 심리학자들이 초보자가 오해하기 딱 쉬운 표현을 쓰기도 한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지만 진화 생물학의 기초를 이해하지 못할 만큼 바보 같거나 무식하지는 않다. 얼핏 보면 플라톤의 “인간의 이데아”와 진화 심리학의 “인간 본성”이 같아 보이지만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당연히 인간의 진화를 인정한다.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해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플라톤은 인간의 이데아가 세상의 시초부터 세상의 종말까지 전혀 변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인간의 이데아에 대한 절대불변의 진리다. 반면 진화 심리학자들은 아주 멀리 거슬러 올라가서 인간의 직계 조상이 물고기의 형상을 하고 있을 때에는 손가락이라는 개념 자체가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물론 단세포 생물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손가락의 원형조차도 찾을 수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변하지 않는”이라는 표현은 단지 인간의 경우 수천 년이나 수만 년 정도의 세월로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다. 수천만 년이나 수억 년 동안에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수억 년 동안의 우리 직계 조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인간 본성 또는 인간의 이데아에 대해 떠드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지난 수만 년 동안의 우리 직계 조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이데아론을 느슨하게 적용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생리학적, 해부학적 측면들을 모아 놓은 인간 생리학 교과서나 인간 해부학 교과서가 의미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직계 조상을 거슬러 올라갈 때 언제부터 인간인지가 애매하다. 인간 개념 자체가 애매하기 때문에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도 애매할 수밖에 없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남자의 본성과 여자의 본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논란의 여지가 없이 나눌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때로는 남자의 생식기와 여자의 생식기를 모두 갖추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유전자를 보면 남자에 가깝지만 육체를 살펴보면 여자에 가까운 사람도 있다. 인간 개념이 애매한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여자 개념도 애매하다.

 

하지만 인간 개념과 남자/여자 개념은 유용하며 실제 연구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논란의 여지가 없이 구분할 수 있다. 또한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면 무엇이 인간 본성 또는 남자의 본성 또는 여자의 본성인지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다. 예컨대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인간 본성이다”라는 명제는 논란의 여지가 별로 없다. 물론 이 명제가 “손가락이 열 개가 아닌 사람은 인간도 아니다”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특수한 유전자 돌연변이, 특수한 자궁 환경, 사고로 손가락을 잃는 경험 등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인간에게서 “열 개의 손가락”이 안정적으로 발생(development)하고 유지된다는 뜻일 뿐이다.

 

진화 심리학자가 “질투 기제는 인간 본성이다”라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질투 기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면 안정적으로 질투 기제가 발생(심리학에서는 “development”를 보통 “발달”이라고 번역한다)한다는 뜻일 뿐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글자 그대로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그것은 다윈 이전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반면 상당히 느슨하게 이데아론 또는 본성론을 적용하는 것은 그런 후퇴가 아니며 상당히 유용하다.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생리학에서 그런 본성론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심리학에 유용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이덕하

2011-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