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심리학을 어느 정도 공부하면 어떤 현상과 관련된 그럴 듯한 진화론 가설을 금방 생각해낼 수 있을 때가 많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에 시비를 건다. 진화 심리학이 무엇이든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 것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진화 심리학의 개념틀 또는 이론틀이 너무나 유연하기 때문에 끼워맞추기식 설명을 만들어내기가 너무 쉽다는 것이다.

 

 

 

우선 왜 그럴 듯한 진화 심리학 가설을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 이유부터 몇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온갖 측면에서 선택압에 대한 가설을 만들 수 있다. 온갖 측면들이 유전자의 복제 또는 개체의 번식과 관련이 있다. 그런 관련이 있는 온갖 측면들은 곧 선택압이 된다. 따라서 많은 경우에 설명하고자 하는 어떤 현상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선택압에 대한 가설을 만들기가 쉽다.

 

둘째, 선택압들이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예컨대 맹수를 더 경계하면 맹수에게 잡혀 먹힐 가능성은 줄어들지만 짝짓기 하는 것에는 방해가 된다. 만약 어떤 동물이 맹수를 매우 경계하면 맹수에게 잡혀 먹지 않기 위해서라고 설명할 수 있고 어떤 동물이 맹수를 별로 경계하지 않으면 짝짓기를 더 잘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할 수 있다.

 

셋째, 어떤 기제에는 비용이 든다. 어떤 심리 기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들며 그 심리 기제를 작동하기 위해서도 에너지가 든다. 심리 기제는 곧 뇌 세포들의 집합이므로 뇌에서 공간을 차지하고 약간이라도 무게가 나간다. 이런 것들도 비용이다. 만약 어떤 기제가 있다면 그 기제가 번식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고 그 기제가 없다면 그 기제를 만드는 비용이 이득에 비해 크다고 설명할 수 있다.

 

넷째, 어떤 현상을 적응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부산물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예컨대 강간이라는 현상이 있을 때 강간 조절 기제가 진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성 충동 기제와 강제력 사용 기제의 부산물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다섯째, 보통 돌연변이가 있어야 진화가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기제가 진화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돌연변이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여섯째, 개체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 한 개체의 어떤 기제 또는 어떤 전략의 유용성은 다른 개체들의 전략에 의존할 때가 많다. 만약 다른 개체들이 무자비한 보복 전략을 쓴다면 남을 등쳐 먹는 전략을 쓰는 것이 유리하지 않다. 반면 만약 다른 개체들이 보복에 별로 열을 올리지 않는다면 남을 등쳐 먹는 전략을 쓰는 것이 유리하다. 만약 암컷들이 철통 같은 강간 방어 전략 예컨대 강간이 일어날 때마다 자연 유산을 하는 전략을 쓴다면 수컷의 입장에서는 강간은 시간 낭비다. 반면 암컷들의 강간 방어가 허술하다면 강간이 유력한 전략이다. 따라서 다른 개체들의 전략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어떤 형질의 진화에 대한 그럴 듯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일곱째, 우리는 과거의 어떤 측면에 대해 잘 모를 때가 많다. 잘 모르기 때문에 그만큼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 수 있다. 우리는 천만 년 전에도 우리의 직계 조상 중에서 암컷이 임신을 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 따라서 “수컷이 임신을 했기 때문에 ...”라는 식으로 가설을 펼 수는 없다. 반면 과거에 대해 잘 모를 때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가설을 만들어도 당장 반박되지는 않는다.

 

여덟째, 많은 경우 선택압과 관련된 정밀한 정량 분석이 매우 어렵다. 따라서 가설을 만들 때 과학자는 이런 면에서 별로 제한을 받지 않는다. 과학자 A는 선택압 a가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과학자 B는 선택압 b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이 때 정량 분석이 어렵다면 두 과학자 모두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도 된다.

 

여기에서 나열한 이유들과 나열하지 않은 이유들 때문에 진화 심리학의 개념틀과 이론틀은 생산성이 대단하다. 어떤 현상 A를 설명하는 그럴 듯한 가설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A와 거의 정반대되는 현상 B를 설명하는 그럴 듯한 가설도 만들어낼 수 있다. 진화 심리학을 어느 정도 배운 사람이 어수룩한 초보자를 홀릴 수 있는 끼워맞추기식 설명을 만들어내기는 보통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가설을 쉽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 뭐가 문제인가? 다른 온갖 분야들을 살펴보라. 하나의 현상을 두고 온갖 가설들이 경쟁한다. 하나의 현상을 두고 수 많은 가설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것은 그 분야에서도 가설 생산성이 대단하다는 것을 뜻한다. 왜 다른 분야는 가만히 두고 진화 심리학의 가설 생산성에만 시비를 거는 것일까?

 

만약 어떤 현상이 도마 위에 올랐을 때 모든 과학자들이 한결같이 하나의 가설만 떠올릴 수밖에 없다면 그리고 그 가설이 늘 옳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과학하기가 참 쉬울 것 같다. 하지만 생명 현상 특히 인간처럼 복잡미묘한 생물과 관련된 현상의 경우에는 그렇게 쉽게 일이 풀리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수 많은 가설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무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런 가설들을 가릴 수 있는 과학적 방법론이 있느냐 여부다. 즉 어떤 가설을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방법론이 있느냐 또는 어떤 가설과 대안 가설 중에 누가 더 옳은지를 가릴 수 있는 방법론이 있느냐 여부가 중요하다.

 

정말로 진화 심리학이 엉터리 과학이라고 생각한다면 가설 생산성에 시비를 걸지 말고 가설 검증 방법론에 시비를 걸어야 한다. 진화 심리학의 가설 검증 방법론은 다른 곳에서 다룰 것이다.

 

 

 

제대로 된 진화 심리학자라면 가설을 만들어 놓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설을 검증해야 한다는 점을 모르는 진화 심리학자는 없다. 가설이 어느 정도 입증된다면 적어도 잠정적으로 그 가설을 받아들인다. 가설이 충분히 반증된다면 그 가설을 버리고 다른 가설을 만들어낸다.

 

어떤 진화 심리학자는 하나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가설 A를 제시했다가 반증되니까 이번에는 가설 B를 제기했다가 또 반증되니까 이번에는 가설 C를 제시했다고 또 반증되니까 가설 D를 제시하는 식으로 끝없이 헤맬지도 모른다. 그런 진화 심리학자를 두고 가망성 없는 가설만 제시하는 능력 없는 과학자라고 조롱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설이 반증된다는 것은 곧 제대로 된 검증 방법론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진화 심리학 자체가 엉터리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덕하

2011-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