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수 있으면 써보겠다는 글을 쓰기 위해서, 이전 글을 읽으려고 들어왔다가, 달려 있는 댓글들을 보구선 살 떨려서 열어볼 수도 없는 지경이었네요. 그래도 용기내어 저의 본글을 읽었는데, 읽자마자 발견된 글의 오류 때문에 뜨끔 했습니다. 댓글들에 그 부분에 대한 지적이 없어, 저 자신이 오류를 먼저 지적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 글에서 서구 유럽에서 18세기 중반까지 인간에 대한 해부가 금지되었다고 썼었는데, 이 부분이 오류입니다. 사실, 18세기 중반 이전에도 인간에 대한 해부가 가능했었고, 18세기 중반 이후에야 비샤를 중심으로 근대적인 병리 해부학(pathological anatomy)이 탄생하고, 이를 토대로 근대적인 임상 의학의 탄생이 가능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왜 저렇게 썼었는지 모르겠네요. 18세기 중반 이전에도 해부학은 있었는데,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과학적" 해부학은 없었던 거죠. 근대적인 임상의학, 해부학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18세기 중반 이전 서구에서 "생물학"이라는 분과 학문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린네의 분류학 정도는 있었겠지만,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생물학은 존재하지 않았던 거죠. 맨델의 유전학, 다윈의 진화론 등등의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생물학은 18세기 중반 이후, 즉 서구 근대성의 탄생, 혹은 "인간의 탄생" 이후에나 가능할 수 있었겠죠. 정치경제학, 즉 고전경제학 이전에는 "부의 분석"이 있었죠.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서구 근대 분과 학문들의 "과학성"이라는 것에 대해 논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던겁니다. 즉, 전근대(고전 시대, 혹은 초기 근대(early modern))와 근대를 가르는 과학성... 사실, 이곳에서의 "과학주의"라는 것에 넌덜머리가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주의에 대해 비판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요령부득으로 보입니다. 혹은 오만이었네요...

사실, 머리 속으로 생각했던 글은 <근대 임상 의학의 탄생>이란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그래서, 푸코의 <<임상 의학의 탄생>>을 읽었는데, 이전에 관심있는 쳅터들을 읽었던 터라, 저 글을 쓸 수 있는 정도는 읽어낼 수 있을줄 알았는데, 임상 의학, 해부학 등등에는 문외한인지라,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글은 써야겠으니, 푸코의 <<말과 사물>>을 읽었는데, 이 책도 어렵구요. 이 책을 읽으면서 임상의학이나 해부학에는 문외한이니, 차라리 그나마 이름이라도 알고 있는 "근대적 정치경제학"으로 근대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리카르도, 아담 스미스, 맑스가 비샤보다는 친근하니까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으려다 별 재미가 없을듯해서, 그리고 쳅터들의 제목만 보고도 어느 정도는 감이 와서, 조금 읽다가만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600페이지가 넘습니다.) 

몇 달 전에 칸트에 대한 짧은 몇 편의 글들을 [싸이에] 올렸었는데, 푸코를 더 논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글이 중단되었습니다. 대략 위에서 말한 내용들이 되겠네요. 그 짧은 몇 편의 글들을 나눠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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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노동절 집회에 갔다가, 후배가 요즘 한국에서 아감벤과 랑시에르가 읽히고 있다는 말을 전하더군요. 아감벤도 모르고, 랑시에르도 모르는 그 친구에게 그저 아감벤의 글 몇 꼭지를 읽어본 것이 전부인 제가 랑시에르라는 이름을 들은 적은 있는 것같다고 말을 되돌려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 랑시에르가 유행이라는 말에, 아마존닷컴에 떠있는 그의 책들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책을 주문했습니다. 제목은 <<미학의 정치학: 감각가능한 것의 분배>>이구요, 영역본입니다. "감각가능한 것(the sensible)"이라는 문구부터 저를 흥분하게했죠. "혹시... 푸코? 그의 가시성과 담론성이라는 개념, 즉, the seeable과 the sayable이라는 그의 개념? 게다가 어떤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결정하는 가시적인것과 표현가능한것의 배치의 방식을 이야기하는 푸코와 'the distribution of the sensible'이라는 랑시에르의 문구의 유사성을 생각한다면..."


영어 번역자와의 인터뷰에서, 역시나 랑시에르는 자신의 방법론이 "푸코와 조금은 유사하다"고 말을 하네요. 즉, 칸트가 그러한 것처럼, "진리의 독단론(dogmatism)을 가능성의 조건들로 대체하는" 푸코의 방식(푸코가 진리를 말하는 방식(veridiction)이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다르다는 의미이겠죠. 그 어떤 점은 바로 푸코의 고고학을 일컫습니다. 즉, 켜켜히 쌓여있는 지층들을 관통해 과거의 역사적 사실, 혹은 진실을 발굴해내는 고고학처럼, 푸코는 감추어진 것(the hidden)을 찾기 때문에, 어떤 순간 그의 사유에서는 "어떤 것이 사유불가능 해진다"고 말합니다. 감추어진 것은 감추어진 것이므로 그냥 감추어져 있는 것일 뿐이죠. 그러나 이는 랑시에르의 오해일텐데,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감추어진 것은 그의 연구대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의 1963년에 출판된 레이몽 루셀에 대한 저서에서도 명확히 밝히는 바이기도 하구요. 일반적으로 이야기되어지는 것과는 다르게, 푸코의 고고학적, 계보학적 기획들은 어둠과 침묵 속에 억압되어 있는 광기,
범죄성, 성(sexuality)에 대한 해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푸코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광기의 역사>>에서 그렇게 억압되어져 있어 말해져야만 하는 광기가 존재한다고 가정하기는 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폐기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둠과 침묵이라는 가시성과 담론성의 바깥(안이면서 동시에 바깥일 바깥)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네요. 즉, 칸트의 절대 공간에 선험하며, 그 공간을 점유하는 빛과 공존하는 어둠, 그리고 절대 시간에 선험하며, 그 시간에 질서를 세우는 언어와 공존하는 침묵. (칸트의 초험적인 (transcendental), 순수한, 형식적 선험성(a priori)인 시간과 공간에 앞서는 것으로서의 빛과 언어를 이야기하는 것은 들뢰즈입니다. 즉 칸트에 있어 주체의 경험의 선험적 조건인 시간과 공간과 이에 앞서는 빛과 언어. 랑시에르는 공유되는 감각적 질서 등등으로 말하는 가능성의 조건들.)


랑시에르와 푸코를 연결시켜주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칸트가 되겠네요. 허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랑시에르의 미학의 밑바탕에는 칸트가 깔려있다는 것이겠죠. 물론, 근대의 미학 전체가 칸트로부터 발생되긴 했지만요. 문학, 예술로서의 삶이라는 니체의 미학주의 마저도 말이죠. 그리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예술도, 대중으로부터 동떨어져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천재"로서의 예술가도 말이죠. 랑시에르는 쉴러의 "인간에 대한 미학 교육"에 대한 이론이 "칸트의 아름다움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도출된다고 말합니다. 푸코가 말하듯이, 칸트의 시대에 인간, 혹은 적어도 근대적 인간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역사와 문화가 탄생하기도 합니다. 즉, 니체가 기억을 지니지 않아 과거와 역사를 갖지 않는 동물과 기억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과거와 역사를 지니는 인간 중에서 누가 더 행복한가라고 물을 때, 그렇게 자연과 분리되면서 탄생한 인간과 더불어서 역사와 문화가 탄생하는 것이죠. 그리하여 그 시대에, 데카르트적인 기계론과 대별되는 생기론(organism)이 득세하면서, 푸코가 말하는 생명(life)이라는 범주가 불쑥 튀어나오게 되죠.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생명"을 언급하고, 인간성(humanity)과 총체성(totality)을 언급할 때, 인간, 역사, 문화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혹은 적어도, 근대적인 인간, 역사, 문화가 탄생하는 것이죠. 지금의 우리를 꼴짓는 인간, 역사, 문화 말이죠. 위에서, 생명이라는 것, 인간성이라는 것, 총체성이라는 것은 바로 칸트가 sensus communis (common sense) 혹은 보편적 소통가능성(universal communicability)이라고 말하는 것에 다름아닙니다. 이는 보통 영어로 common sense로 번역이 될텐데, 그냥 common feeling으로 보면 됩니다. 이로부터 칸트는 감각이나 개념이 아닌 정서에 기반하는 공동체로 나아가죠. 그리하여, 그 공동체 안에서 보편적인 소통가능성을 지닌 주체들은 "아름다움"에 대해서 소통가능하게 됩니다. 혹은 "숭고함"에 대해서도 말이죠. 랑시에르는 이를 검토하고 이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려고 합니다. 칸트에 있어, common feeling 혹은 universal communicability는 초험적이고 형식적인 선험성을 이루겠지만, 푸코가 그러한 것처럼, 랑시에르는 그 공통된 정서를 꼴짓는 역사적인, 경험적인 가능성의 조건들을 제기합니다. 이로부터 이러저러한 공동체에 대한 논의가 촉발되겠죠. 랑시에르에 있어 이는 플라톤적인 공동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공동체, (칸트로부터 시작되는) 미학적 공동체를 이야기 하죠.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하기는 하지만, 전-소크라테스적인 비극의 공동체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보면서, 웃고 울고 하는 겁니다. 물론, 연민과 공포의 경제학(economy of pity and fear)을 통해 무대로부터, 비극적인 장면으로 부터 거리두기를 하면서 말이죠. 그 비극에는 광기가 있고, 비이성이 있고, 체제를 넘어서는 어떤 무엇이 있죠. 관객들을 집어삼키는... 혹은 호머의 이야기를 통해 구성되는 서사시적 공동체도 있겠고 말이죠. 이것들을 플라톤은 그의 "이야기"로 싹 정리해버리죠.


이 이야기들의 세계가 바로, 역사이고, 예술이고, 정치입니다. 윤리학이기도 하고, 미학이기도 하구요. 물론 철학이기도 하겠군요. 그래서 랑시에르는 "역사는 허구(fiction)의 한 형식인가?"라고 질문합니다. 푸코가 자신의 고고학, 계보학을 역사도 철학(이론)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허구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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