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와 체제 안에서의 삶의 방식

  


 1. 걍 한번 생각해 보자구.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만일 우리의 몸이 지금과 같은 상태가 전혀 아니라, 예를 들어 팔이 네 개이거나 눈이 세 개이거나, 또 지금보다 피부가 훨씬 단단하거나 날개가 있어서 날아다닐 수 있다거나. 아니 그럴 것도 없이 그냥 아예 몸 자체가 없다고 치고, 우리는 어떤 에너지의 일종이어서

그 에너지의 흐름을 통해서 의사소통하고 그렇게 교류되는 하나의 네트워크 체계가 우리의 세계라고 말이다. 마치 매트릭스처럼 전기 신호가 곧 내 몸인, 육체 없는 에너지의 세계, 그래서 일체의 움직임 없이도 생각과 감정이 신호에 의해 전달되는 세계. 만약 이런 세상이 정말 있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까? 나도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튼 지금과는 완전 다른 세상일 것이 분명하다. 거기서는 이효리가 텔레비전에 나와 춤추며 광고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세미나도 없을 것이고, 물론 돈도 없을 것이다. 돈이 없으니 금융 중개인도 없을 거고, 주식시장도 없을 거고, 돈 가지고 사기치고 장난치는 일도 ‘애시당초’ 없을 것이다.

 

만약 시간과 공간이 지금과는 전혀 딴판이라면 또 어떤가? ‘평행우주’설처럼 매 시간 시간 마다 전혀 다른 공간이 무한히 생성된다면, 그래서 나 자신도 지금 어디에 가 있는지 모르게 된다면? 중력이 없거나 공기가 없거나, 또는 뇌가 세 개여서 각기 다른 감정을 동시에 품을 수 있다면? 그렇게 되면 바람을 피워도 전혀 문제가 안 되는 세상일 수도 있지 않나? 열 받으면서 동시에 열 받지 않는 감정이 공존하니 간통 법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지 모른다.

 

2. 환경과 인간

굳이 어려운 과학 이론까지 가지 않아도 환경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곧잘 익숙한 것의 중요성을 모른 채 지나치곤 한다. 공기, 바다, 숲부터 시작해서 두 개의 팔과 밥 들어가는 입을 가진 몸, 텔레비전, 광고, 도로, 자동차, 컴퓨터, 인터넷, 경찰, 대통령제까지 이 모든 것들은 모두 환경의 일부이며 우리는 이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환경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인디언으로 태어났다면, 세상에는 사슴 잡아서 구워먹고 때 되면 몸에 아픈 문신을 하며 거북신께 매일 맛있는 것도 드리고 그러다가 늙어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그런 체제만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이 아프리카 할례 문화권의 여성으로 태어났다면, 성인이 되어서 성기를 봉합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고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할 것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그렇게 무모한 짓을 왜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도 못해보고 죽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은 모두 환경이 만들어낸 부산물이지만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있던 것이라면 세상에는 오직 그러한 것만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바꿔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믿곤 하는 것이다.(사실 그런 질문이라도 하면 다행이지만) 이 얼마나 웃기는 믿음인가. 시공간이 우리를 규정하는 것도 억울할 판에 스스로 만든 감옥도 갈아치울 수 없다니! 당연히 갈아치울 수 있다. 물론 숲과 나무와 같은 자연 환경은 바꿀 수도 없고 바꿔서도 안 되는 것들이니 여기서는 제외하자. 지금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인위적인 환경, 곧 체제의 환경이며 그 중에서도 우리의 삶을 좀 먹으며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들이다. 체제는 경찰이고 대통령제이고 텔레비전이며 광고와 도로, 자동차, 핸드폰, 각종 상품 이 모든 것들을 말한다. 당신이 오늘 무엇을 했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일은 또 어떻게 해야 하며 타인과는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는, 별다른 생각 없이 산다면 전적으로 체제가 결정해줄 것이다. 즉, 체제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삶이 규정되고 지배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레짐작 하지는 말자! 지금 ‘현 정권 몰아내자거나 새로운 정책 펴자거나, 화성으로 가서 살자!’ 하는 거창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체제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이나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나?



3.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화신

그래서 나는 다니엘 플레인뷰와 같은 인물이 왜 생겨나는지를 물어보고 싶다. 플레인뷰는 석유업자로 성공해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 끊임없이 땅을 파고, 유정탑을 세웠다. 그는 왜 그렇게 석유에 몰두했는가? 꼭 필요한데 쓸 돈이 필요해서? 천만의 말씀이다. 사실 그는 딱히 돈 쓴 데가 없다. 기껏 집안에 볼링장 만들고 술 많이 마신 게 전부다. 아니면 돈을 많이 벌어서 자선사업을 하려고 그랬나? 전혀! 그는 자기 자식한테도 돈을 안 쓰는 인간이다. 내가 보기에 플레인뷰는 ‘그냥’ 돈을 벌었다. 그냥? 그렇다. 그냥이다. 그는 그냥 맹목적으로 돈을 벌었다. 맹목적으로 돈을 벌기위해 사람을 이용하고 자식을 이용하고 종교를 이용했다. 체제가 말해주는 방식대로만 살다보니 체제 기생체, 자본주의의 화신이 된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게 된다. 플레인뷰 뿐만이 아니다. 제삼계시교회 목사 일라이도 마찬가지다. 사랑과 믿음을 얘기하며 겉포장은 그럴싸하지만 사실은 돈과 목사로서의 성공이 신보다 중요한 인간이다. 기생하는 수단과 방법이 약간씩 다를 뿐 둘 다 ‘그냥’ 자본의 화신이다. 그렇다면 이 맹목적인 ‘그냥’의 근저에는 어떤 심리 기제가 있는 것일까? 대체 얼마나 무서운 놈이 거기에 있기에 이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해진다. 과연 왜 그런 것일까?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그냥 돈 버는 사람들이 참 많다. 누가 벌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일단 벌고 본다. 왜 그렇게 돈을 벌어야 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답대신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우리는 ‘그냥 산다’는 말처럼 ‘그냥 돈 버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일단 돈은 많고 볼 일이고 왜 돈을 버느냐고 물어보는 이에게는 한심한 표정을 지어줘야 하는 체제. 가치의 평가 방식이 돈의 양에 따라 결정되고 그래서 땅을 사려면 자식도 이용하고, 종교도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 무시무시한 체제.



4. 니체와 노예들의 천국

니체라면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할까? 니체는 고귀한 자와 노예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가치의 평가 기준이 자신에게 있느냐, 자신의 외부에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렸다고 했다. 고귀한 자는 스스로가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예들은 자신을 부정한다. 자신을 부정하며 자신보다 높은 이를 쫓거나 낮은 이를 야유하며 가치의 위계를 세운다. 즉 자신이 아닌 것으로부터 기준을 들여와 가치의 고하를 매기는 것이다. 그러니 니체가 보기에 플레인뷰는 돈을 가치의 평가 기준으로 삼는 노예나 다름없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노예이기를 그만 두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돈을 많이 번 노예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노예들의 천국이다. 우리가 가치를 평가하는 방식,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텔레비전에 나온 연예인들의 이런 저런 말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식이 결정되지 않는가. 김혜수의 헤어스타일과 패션은 ‘엣지’있는 거다. 아, 그러니 우리도 엣지있게 되자! B형은 나쁜 놈들이란다. 세련된 이들이여 B형하고는 안 맞으니까 사귀지 말자! 이렇게저렇게 행동해야 쿨한 거란다. 그러니 우리도 대세를 따라 쿨하게 되자! 잘 나가는 연예인이 광고를 하면 줘도 안 갖던 물건이 ‘비싼’ 물건으로 둔갑하고, 화끈한 선전이 없는 영화는 볼 가치도 없는 영화가 된다. 마찬가지로 돈과 미디어가 규정한 방식이 아닌 삶, 돈과 미디어가 평가해주는 가치에서 벗어나는 삶은 비정상적이고 가치 없는 삶이 된다. 그 방식을 벗어나서 살면 인상을 찌푸리며 쳐다본다. 너는 왜 이상하게 사느냐고, 왜 노예가 되길 거부하느냐고.





돈과 미디어의 평가 방식이 곧 우리의 평가 방식이라면, 이거야말로 노예들의 세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무런 생각 없이 체제가 말해주는 대로만 살다보면 영원히 노예로 살게 될지 모른다. 그냥 노예로 사는 게 편하다고? 그렇다면 할 말 없다. 하지만 부디 살아가며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겠다느니, 내 의지에 따라 결정한 것이라느니 하는 황당한 얘기는 하지 말도록 하자.

                                                                                        "그들은 모두 배우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참된 것이 하나도 없다"

-니체-

   
이제 우리 변화를 만들어 보자. 그렇다고 집 안에서 뒹굴며 피 토하며 살거나 세상과 떨어져 고고한 정신으로 고뇌하며 지내란 얘기가 아니다. 현대인이 얼마나 구속받고 사냐며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고, 열심히 자격증 학원 다니는 친구들에게 설파하다가 왕따 당하란 얘기도 아니다. 변화는 그런 힘든 일 안해도 충분히 가능하다. 결코 학벌이나 지능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전제는 있다. 그건 바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날 세상은 만만치 않다며 무작정 돈만 많이 벌려 하거나, 신문에 나오는 대기업 평가 순위가 곧 삶의 순위인줄 착각해서 순위가 높은 기업에 취직하려고 관심도 없는 자격증과 토익점수에 목매거나, 마시멜론지 시크릿인지 하는 베스트셀러 처세술 책을 열심히 보며 자신은 언제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이런 것들은 삶을 긍정하는 의지가 발현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노예의 의지가 열심히 작동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체제의 가치 평가 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없다면 절대로 족쇄는 풀리지 않는다. 의지는 일단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면 생각은 자연히 달라지게 되어있다. 옛 선인들이 말하는 ‘발심’이라는 것이 이런 걸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발심’에 담긴 중요한 메시지는 구속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져서 스스로 묻기를 거부하는 노예가 되지 말고 일단 한번 마음이라도 달리 먹어보라는 것이다. 진정으로 마음을 달리 먹어보면 ‘발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갑자기 집안을 청소하게 될지 모른다. 갑자기 혼자 아랍어를 공부하고, 장자를 읽게 될지도 모른다. 무슨 기적이 일어나고 바다가 갈라지지는 않을지라도 생활의 태도는 분명히 변한다. 계속해서 노예일지라도 노예이길 거부하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니체의 말처럼 자신에게 변신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힘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세상을 대하는 태도부터가 다르다. 그는 남이 만들어 준 욕망의 지도를 가지고 보물을 찾으러 다니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욕망의 지도를 자신이 만들어 낸다. 이제 곧 그는 고귀한 자가 되어갈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신을 믿으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한다. 신을 믿건 안 믿건 간에 ‘거듭난다’는 의미만큼은 의지의 혈액순환에 담궈 볼 필요가 있다. 혹시 아나. “I'm finished(난 끝났어)”라는 플레인뷰의 마지막 말이 정 반대의 의미로 다가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