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설계론에도 여러 분파가 있다.

 

“과격 지적 설계론자”에 따르면 자연 선택은 생물의 몸, 즉 생리 현상조차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예컨대 인간의 눈과 같은 고도로 복잡하고 정교한 구조는 자연 선택만으로는 진화할 수 없다. 눈이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이 진화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온건 지적 설계론자”에 따르면 생리 현상은 몽땅 자연 선택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반면 인간의 심리 현상은 자연 선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신이 진화에 개입했기 때문에 고도의 인간 심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여기에서 “자연 선택만으로는 심리 현상을 몽땅 설명할 수 없다”라는 말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겠다. 이것을 “자연 선택뿐 아니라 문화나 학습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유물론자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도 이런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유물론자가 이런 말을 할 때에는 문화나 학습도 기본적인 물리 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온건 지적 설계론자가 “자연 선택만으로는 심리 현상을 몽땅 설명할 수 없다”라고 말할 때에는 그런 뜻이 아니다. 물리 법칙에 따르는 자연 선택, 물리 법칙에 따르는 학습, 물리 법칙에 따르는 문화 발전 등을 몽땅 끌어들여도 예술, 철학, 과학, 수학, 도덕성 등과 관련된 인간의 고도의 심리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것은 “물리 법칙의 작동만으로는 심리 현상을 몽땅 설명할 수 없다. 신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일부 온건 지적 설계론자에 따르면 인간의 도덕성이나 이타성을 몽땅 자연 선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예컨대 엄마가 자신의 자식을 겁나게 사랑하는 것을 친족 선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은 진화론 책 좀 읽은 온건 지적 설계론자도 인정한다.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철로 위로 뛰어드는 행위는 친족 선택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그들에 따르면 이것은 상호적 이타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친한 친구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상호적 이타성 이론을 확장시켜서 소문까지 고려한 이론이 있다. 이 이론은 친한 친구가 아닌 사람을 돕는다 하더라도 착하다는 소문”이 퍼지면 번식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점까지 고려한다.

 

확장된 상호적 이타성 이론에 맞서기 위해서라면, 어떤 젊은 남자가 외국에 놀러 갔을 때 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데도 처음 보는 가난한 할머니를 돕는 경우를 상상해 보면 된다. 할머니이기 때문에 짝짓기를 통한 번식을 기대하기도 힘들고, 가난하기 때문에 돈을 줄 것 같지도 않고, 친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보는 사람도 없어서 남들이 소문을 퍼뜨릴 수도 없고, 외국이기 때문에 할머니가 퍼뜨리는 소문이 그 젊은 남자에게 도움이 될 일도 사실상 없다. 그런데도 우리의 상식에 따르면 그런 경우에도 할머니를 돕는 사람이 있다.

 

 

 

일부 온건 지적 설계론자는 “할머니를 돕는 젊은 남자의 이타적 행동을 어떻게 진화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묻는다.

 

그 젊은 남자의 행동은 명백히 부적응적이지(maladaptive) 않은가? 그런 행동은 명백히 번식에 해롭지 않은가? 인간의 이타성이 오직 자연 선택만으로 “설계”되었다면 어떻게 이렇게 명백히 부적응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행동은 신을 끌어들여야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글에서 이런 논리를 반박하는 대신 똑 같은 논리를 다른 예에 적용해 보겠다.

 

 

 

콘돔 사용이 대체로 적응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복지 제도가 어느 정도 정착된 선진 산업국에서 콘돔을 사용하는 것이 대체로 적응적일 리가 없다. 간단한 산수를 해 보자.

 

첫째 부부는 20세에 결혼하여 콘돔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대략 1년에 한 번씩 평생 20명의 자식을 낳았다고 하자. 둘째 부부는 20세에 결혼하여 거의 모든 성교에 콘돔을 사용하였으며 평생 2명의 자식만 낳았다고 하자. 셋째 부부는 20세에 결혼하여 모든 성교에 콘돔을 사용하였으며 자식을 전혀 낳지 않았다고 하자.

 

첫째 부부는 많은 자식 때문에 매우 가난하게 살았으며 그 여파로 자식들 중 2명이나 어른이 되기 전에 죽었다. 그리고 5명은 결혼을 하지 못했다. 둘째 부부가 낳은 자식은 모두 잘 자라서 결혼을 했다.

 

결국 콘돔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첫째 부부의 경우 13명의 자식이 결혼에 성공한다. 반면 둘째 부부의 경우 2명의 자식이 결혼에 성공한다. 그리고 셋째 부부의 경우에는 자식이 전혀 없기 때문에 결혼에 성공한 자식도 없다. 이래도 콘돔 사용이 대체로 적응적인가?

 

 

 

자연 선택만으로 “설계”된 사람이 위에서 이야기한 “할머니 돕기”처럼 부적응적인 행동을 할 리가 없다고 일부 온건 지적 설계론자는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신이 개입했기 때문에 “할머니 돕기”가 가능한 인간이 생긴 것이다.

 

그 이야기가 맞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자연 선택만으로 “설계”된 사람이 콘돔 사용처럼 부적응적인 행동을 할 리가 없다. 따라서 신이 개입했기 때문에 콘돔 사용을 하는 인간이 생긴 것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이로써 콘돔이 신의 뜻임이 확실해졌다.

 

 

 

이런 신의 뜻도 모르고 교황은 피임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동성애와 피임 낙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낙태와 동성결혼, 피임을 금지하는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견지하면서도 예수회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신이 동성애자들을 본다면 어찌하실까? 우리는 자비로서 그들과 함께 할 필요가 있다'며 전향적인 입장을 취했다한다.

http://www.doctors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8122

 

내가 온건 지적 설계론자라면 내일이라도 교황을 찾아가서 바티칸에 콘돔 공장을 지으라고 설득해 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