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가 합당의 명분으로 내걸고 끝까지 관철하겠다고 의지를 보인 기초선거 무공천은 결국 여론조사를 통해 철회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저는 이번 사태를 보면서 한편의 코메디를 보는 것 같았으며, 우리 정치 수준의 허접함에 다시 한번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명색이 대한민국의 야당이고, 그 수장이라는 사람들, 그리고 그 지지자들인데 저런 식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을 보니 야당과 진보진영의 미래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 됩니다. 정권이란 장기화되면 부패하고 방어적으로 변해 결코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새누리당(보수 진영)이 장기 집권하는 것은 그런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지요. 그런데 작금의 야당이 하는 꼴을 보면 어쩌면 새누리당이 일본의 자민당이 누린 장기 집권 기록을 넘어 설 것 같습니다. 일본 자민당의 장기 집권이 일본사회에 악영향을 미쳤듯, 새누리당의 장기집권도 우리에게 좋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야당이나 진보진영이 대오각성하고 전열을 가다듬고 쇄신 분발하여야 하는데, 총선, 대선에서 참패를 하고 1년이 지난 지금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새민련이나 진보진영을 욕했던 저도 이젠 걱정이 됩니다.


이번 안철수의 기초선거 무공천 싸움은 여러 측면에서 해서는 안되는 자충수이며, 자업자득입니다.

1. 먼저 합당 명분으로 기초선거 무공천을 내건 것은 무리였습니다.

안철수는 새정치를 주창하고 민주당과 새누리당 양당을 구태정치로 비난하며 100년 갈 독자 정당을 만들겠다고 합당 발표 직전까지 말했습니다. 민주당과 합당하려면 그것을 뒤집을 만한 대의나 명분이 필요한데 기초선거 무공천은 명분이라고 하기보다 변명이나 억지 명분 만들기로 밖에 비칠 수 없었습니다. 국민들은 관심도 없는 사안을 합당 명분으로 내거니 국민들이 냉소적일 수 밖에 없지요. 제 주변의 대부분 사람들은 기초선거 무공천이 무엇이냐고 되묻는 정도였으니 안철수의 합당 명분이 국민들에게 먹혔겠습니까?

2. 안철수와 김한길의 합당 합의 발표 과정에서의 비민주성이 합당 명분으로 내 건 기초선거 무공천 의미를 격하시켜버렸습니다.

김한길은 합당 발표를 결정하기까지 민주당 당원들 의사를 묻지 않았고 심지어 국회의원들과 상의하지도 않았으며, 특히 안철수는 자기가 영입한 새정치연합 공동위원장들에게 일말의 언질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독단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이런 비민주적 형태는 국민들이나 안철수 지지자들이 김한길과 안철수가 합당 명분으로 내건 기초선거 무공천의 의미를 되새길 기회도 주지 않고 돌아서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합당의 당위성이나 목적성이 와닿지 않은 상황에서 그렇지 않아도 관심이 별로 없었던 기초선거 무공천에 대해 꼽씹어 볼 지지자나 국민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3. 기초선거 무공천이 공천보다 유익하다거나 지방자치 본연의 기능을 되살릴 수 있는 방책이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안철수와 김한길이 이것을 합당 명분으로 내 건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특히 김한길과 안철수 스스로도 기초선거 무공천에 대해 그 유익성을 확신하지 못했으면서 저런 무모한 짓을 한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4. 기초선거 무공천을 여론화하는 전략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무공천을 합당명분으로 내세울려면 기초선거 정당공천의 폐해를 적시하고, 무공천의 장점을 설명해 기초선거 무공천을 이슈화해서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것을 선행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도 국민들이 관심을 가질까 말까 하는 판에 안철수나 김한길은 이런 사전 작업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5. 기초선거 무공천에 따르는 법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합니다.

기초선거 무공천을 전면 실시될 경우 비례대표 의원에 대한 처리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를  어떻게 처리할 지를 미리 공론화하고 새누리당을 압박했어야 합니다. 비례대표는 정당공천을 해야 가능한데, 무공천을 하게 되면 비례대표 의원을 뽑을 방법이 없습니다. 무대포로 전면 무공천만 주장하고 비례대표는 어떻게 할지 언급도 없으니 관심있는 국민들이라도 뭐 하는 짓인지 의아해 할 수 밖에 없지요.

6. 무공천을 주장하려면 그에 대한 대안을 내놓았어야 합니다.

무공천에 따르는 폐해도 사실 공천하는 것과 비교해 만만치 않습니다. 지방의회와 지자체가 지역 토호들의 놀이판이 되고, 책임정치가 실종될 우려도 있으며, 여성 등 소수자들에 대한 배려도 쉽지 않게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전면 무공천을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적절한 대안이나 보완책을 내놓고 국민들을 설득했어야 하는데 김한길과 안철수,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이 이런 작업을 전혀 하지 않았죠.

7. 무공천 실시 주장을 전면화한 시기도 늦었습니다.

김한길과 안철수가 합당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새누리당과 박근혜에게 기초선거 무공천을 요구한 것은 3월초로 6.4 지선을 불과 3개월 남겨놓은 상태였습니다. 새누리당은 이미 무공천을 철회하고 공천방침을 확정하고 공천작업에 들어간 상태였지요. 이런 상황에서 그 때 와서야 무공천을 전면적으로 요구하고 이슈화하는 것은 timing을 놓친 것입니다. 양당 합의나 법적 정비를 하는데 시간적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정말 김한길과 안철수가 기초선거 무공천이 새정치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면 적어도 올 연초에는 이 문제를 전면화시키는 작업을 했어야 합니다.  6.4 지선에 적용하기는 현실적으로 많은 무리가 따르는 시점에서야 저런 주장을 하니 국민들이 그 진정성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입니다.

8. 안철수가 여론조사로 당원과 국민들을 핑계 된 것도 패착입니다.

어차피 현실적으로 무공천을 철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당원과 국민 여론조사 결과로 책임을 미룰 것이 아니라 안철수의 결단으로 무공천 철회를 선언했어야 합니다. 당원과 국민들의 여론조사 과정이 얼핏 민주적이고 소통하는 것으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저런 행위는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밖에 비치지 않습니다. 합당은 지지자들이나 국민들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일방적으로 혼자 결정해 놓고 합당의 명분인 기초선거 무공천 문제를 이제 와 여론을 묻는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되고 선후가 뒤바뀐 것이며,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여론을 물으려 했다면 합당 전에 했어야 하고, 그것을 토대로 합당 명분을 삼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다 보니 국민들은 기초선거 무공천 건은 합당의 구차한 명분(변명)으로 보이고 정치쟁점화하려는 의도로만 보여 진정성을 믿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9. 여론조사가 공천 우세로 나왔을 때  안철수는 곧바로 그 결과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어야 합니다.

안철수는 여론조사를 하겠다고 기자회견을 할 때, 자기의 신임과 연계하겠다는 결연한 자세로 나왔어야 하고, 설혹 사전에 그런 표명을 공식적으로 못했다 하더라도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을 때, 대표직을 사퇴하고 백의종군하여 지선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발표했어야 그나마 안철수도 재기의 기회가 있고, 새민련도 지선에서 참패를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철수는 그런 결단을 하지 않았습니다.(못한 것일까요?)


안철수는 무공천을 명분으로 합당하는 그 때에 이미 그의 정치생명은 끝났습니다. 지금의 무공천 철회로 위기가 고조되는 것은 예정된 끝으로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일 뿐입니다.

안철수가 영입한 새정치연합의 위원장들과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지지자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달랑 기초선거 무공천을 명분으로 김한길과 합당을 선언한 것이 지금의 안철수의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합당의 명분이라는 것이 고작 기초선거 무공천이라는데 국민들이나 지지자들이 선뜻 동의할 수 있었을까요?  안철수 본인 자신도 작년 8월에 기초선거 무공천에 부정적 발언을 한 마당이고, 기초선거 공천여부는 국민들의 관심사항도 아니며, 또 기초선거 무공천이 공천보다 유익하다는 것을 제대로 설명도 못하는 판인데 이것을 그토록 구태정치라 비판했던 민주당과 합당하는 명분으로 내세웠으니 이게 통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저는 그게 궁금하더군요.


안철수나 여기 아크로 유저들을 비롯한 안철수 지지자들은 이번 사태에 새누리당, 박근혜, 친노에게 책임을 돌리려 애쓰지만, 이번 사태는 전적으로 안철수의 자업자득인 것이고 안철수는 누구를 탓할 입장이 못됩니다. 기초선거 무공천을 합당 명분으로 내건 것이 이 사태의 발단이고, 오히려 그 때문에 새민련(민주당)이 궁지에 몰려 지선을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선거국면에서 여당을 공격할 의제들을 기초선거 무공천 건이 블랙홀처럼 빨아먹은 꼴이 된 것이죠. 그 무공천 의제마저도 새민련에게 커다란 상처만 남기고 새누리당에게 면죄부를 줘 버렸으니 저런 뻘짓도 없는 것입니다.

제가 3월초에 썼던 <안철수는 끝났다>는 글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지선의 결과가 아직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진행된 상황은 제 글에서 예상했던 그대로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 예상이 틀리도록 아크로 유저들과 새민련 지지자들이 정세판단을 잘 하셨어 새민련이나 안철수를 잘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