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사회 게시판
어제 어떤 논객이 호남에서도 박근혜표가 30%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더니, 오늘 어떤 글을 보니 노무현이 “호남에서도 이제는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돼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네요.
무지렁이들이야 모르니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그런 헛소리를 했다는 게 놀라운 겁니다. 노무현이 그런 말을 했다면 누구 말마따나 한나라당 프락치 아닌가요? 아니면 역사나 정치의식이 아주 희박한 머저리거나.
우리가 한나라당을 거부하는 이유가 단지 영남이라는 이유때문인가요? 단지 우리와 지역이 달라서 입니까? 한나라당은 수구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친일파 군사반란자 박정희, 전두환의 유산을 고대로 간직한, 그리고 아직도 그걸 반성할 줄 모르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매국적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요새는 이승만 정권까지 찬양하더군요).
내가 박정희부터 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유산을 혐오하는 이유가 단지 독재나 폭정 때문이 아닙니다. 불의를 정의로, 정의를 불의라고 강요하고 세뇌하여 민족정신을 말살시켰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한국인들은 정의에 대한 의식이 희박해졌습니다. 그러니 우리 돈 들여 침략전쟁에 앞장서서 들러리 서고, 미친 소고기나 수입하며 희희낙락하고, 사회에 부정부패가 난무하고,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이 박정희가 되는 겁니다. 박정희나 전두환이 어디 대통령인가요? 국가의 군대를 사용(私用)하여 권력을 탈취한 군사반란자죠. 정신이 그거 밖에 안 되는데 투푠들 올바로 하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해방후 프랑스처럼 친일부역자들을 철저히 소탕했다면 국민의식이 이 정도밖에 안됐을까요. 지금 영남패권이니, 개쌍도니, 난닝구니, 홍어니 하면서 출신지역 갖고 서로 물어뜯으며 자기파멸적 싸움이나 하고 있을까요.
불행이도 우리나라는 프랑스와 달리 친일부역자와 그들의 후예들이 통치세력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통치자가 왜(倭)국인에서 내국인으로 바뀌었을 뿐 아직도 우리의 정신은 식민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청산이 필요한 겁니다. 따라서 한나라당은 청산돼야합니다. 민주당 내에서도 식민지적 의식의 인물들은 청산돼야 합니다.
그런데 호남에서도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당선돼야하고 30%의 득표를 해야한다고요? 그게 박정희가 좋아했던 한국적 민주주의, 정치의식의 평준화입니까? 호남의 수구화가 호남의 탈지역화입니까? 한 지역에 정신병자가 많으니, 다른 지역도 정신병자가 늘어나야 탈지역주의가 되는 건가요? 그 말을 오랜만에 들으니, “박근혜를 뽑는 게 진보다”라고 주장했던 어떤 수구 페미니스트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네요.
굳이 따지려면 호남에서 다른 지역보다 민노당 표가 적다면 문제 삼으세요. 한나라당은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 영국의 노동당과 보수당처럼 상생 경쟁관계가 아니라 청산의 대상입니다. 한국에서는 수구정당 한나라당은 사라지고 민주당 정도의 보수정당과 민노당 정도의 진보정당이 보수/진보의 양당 관계를 이루는 것이 제가 바라는 정치적 선진화입니다.

좀 황당한 주장을 하시네요.
김구의 한독당이 한나라당과 무슨 관련이 있죠? 한나라당은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까지 하던데. 한독당의 ‘한’자와 한나라당의 ‘한‘자가 같다는 것외에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요. 그 ’한‘자도 한자와 한글로서 다른 의미죠.
민주당의 뿌리를 비난하기 위해 한민당이 민주당의 뿌리라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긴 있습니다. 이름없는전사님도 그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은데, 그것도 상당한 억지입니다. 한민당은 1949년에 해체됐습니다. 그 이후 여러 정당들이 만들어지고 없어지고 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한국내에서 서로 연결 안 되는 정당이 어디 있겠습니까? 님의 주장대로 한독당도 한나라당과 연결이 되고 민주당과도 연결이되고, 한민당도 민주당과도 연결이 되고 한나라당과도 연결이 되겠죠. 그러고 보니 김영삼이도 김대중과 함께 옛날 신민당에 있었으니까요.
얘기를 현실적으로 정확히 하면 한나라당의 선조는 박정희고 지금의 민주당의 선조는 김대중입니다. 김대중이 한민당에서 활동했다면 민주당과 한민당의 연결성을 인정해주겠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박정희의 독립군 토벌하는 친일과 좌익을 번갈아 가면서 하며 기회주의를 보인 것과 김대중의 행적을 비교하면 간단합니다. 아직도 박정희 정서의 당이 한나라당이고 김대중 정서의 당이 민주당입니다.
국민들이 5.16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무슨 여론조사 통계자료라도 갖고 있습니까? 국민들은 4.19를 환영했지요. 4.19를 무효로 만든 게 5.16이고요. 5.16을 국민들이 환영할 정도라면 왜 민중혁명을 하지 군사반란을 합니까? 4.19 이후의 혼란은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과정의 일시적 혼란입니다. 설사 민주적 선거로 인한 정권이 혼란스럽다고 군사반란이 정당화대는 헌법은 없습니다. 마치 여자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다 성폭행을 당하면 범죄자를 정당화 하는 것과 같은 논립니다.
쿠테타 이후의 군사정권하에서 이루어진 선거는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두환도 유정회 선거로 대통령 되고 노태우도 대통령되는 거니까요. 북한에서도 선거는 있다고 하더군요. 히틀러도 김정일도 선거로 당선됐겠죠.
영남패권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이 박정희가 지역주의를 이용해 선거에 이기려고 시작된 것에 대해선 거의 인정되고 있는 사실 아닌가요?

...중략....Successive military dictators, including Park Chung-hee, originated from Kyongsang. In power, they funnelled a disproportionate amount of investment into the area, and people from Kyongsang were largely promoted over their south-western neighbors in public office and in government. Kyongsang developed into the country's industrial heartland. Cholla, on the other hand, was left out in the cold and its people stigmatised and disadvantaged, along with their long-term champion and Mr. Roh's predecessor, Kim Dae-jung.
This largely politically-engineered divide became more visceral after the country's military leadership brutally suppressed a 1980 rebellion in Kwangju, the capital of south Cholla...중략
우선 박정희 지역주의 조장은 economist에도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거결과에 대한 해석문제에 대해서는 , 우선 상당부분 부정선거 폭력선거가 개입되었기 때문에 저 선거결과로 어떤 유추를 한다는 것에 좀 그렇네요.
다만 아래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퍼센트지로 놓고 볼떄 영남의 박정희 편애가 눈에 들어오실 겁니다. 특히 67년 대선
<표 2> 여-야 대통령 후보의 지역별 득표비 (단위: %)
| 서울 | 경기 | 강원 | 충북 | 충남 | 전북 | 전남 | 부산 | 경북 | 경남 | 제주 | 전국 | ||||||||||||||
67년 대선 (박정희:윤보선) |
|
|
|
|
|
|
|
|
|
|
|
| ||||||||||||||
71년 대선 (박정희:김대중) |
|
|
|
|
|
|
|
|
|
|
|
|
출처 박상훈 책
그리고 쿠데타 이후 사회가 아무런 말이 없었고 일부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부분을 과장하시는데 그 당시 쿠데타는 엄연히 탱크와 총을 가진 군인이 매일 신문과 tv에 나오던 때입니다. 그런 모습을 매일 보는 일반 국민이 자기 목숨을 걸지 않는 한 대놓고 반대하는 것도 조금 그렇죠. 쿠데타 당시 사회에서 환영 어쩌고 하는데 그 당시 박정희는 분명 빠르 시일내에 민간에게 정권을 이양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측면도 고려해야겠죠. 하지만 박정희는 뒤로는 몰래 선거를 위한 총알을 준비하기 위해 4대 부정사건을 기획합니다. 일종의 사기술에 국민도 속은 겁니다. 민심이 자기에게 있다고 확인해서라기 보다 만일 그대로 물러나면 자기들의 권력을 누릴 수 없거나 자칫 자신들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어서였겠죠.
그리고 부마항쟁은 칭찬해 줄 일이나 나중에 김영삼의 3당합당에 대해 추인해준 점은 문제였다는 게 제 관점입니다.
국민들의 대부분이 쿠데타를 지지했다? 기존 정치권에 환멸을 느끼고 군부를 환영했다? 왜 근데 박정희는 기존 정치권의 대표주자인 윤보선이랑 붙어서 집권 프리미엄에도 불과하고 간신히 이겼답니까? 황당한 소리 자제를 부탁드립니다.
영남패권에 책임을 물을수 없는 근거로 든 과거의 사례가 죄다 유신독재 이전이군요. 박정희 독재의 핵심인 유신독재를 제외한 전반기 독재 정권에서 특별한 일이없었으니까 영남패권 없다? 어유 되게 편리한 논리네요. 유리한 과거만 기억하고.

국민이 지역패권창출을 용인했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입니다. 국민이 영남패권까지 동의해줬다는 근거는 뭡니까? 박정희가 영남패권을 하겠다고 공약이라도 했습니까? 그 당시 63년 선거 67년 선거는 밀가루 선거라고 해서 극심한 식량난 과정에서 대량의 식량을 풀었던 것이 선거와 연결되었습니다.(태풍까지 겹쳐서 식량난이 더욱 심했죠) 그 당시 민도수준이야 지금과 비교할 수 없었을 정도이고 나아가 쿠데타로 집권하는 과정을 통해서 반 강압적 분위기로 고려할 필요가 있겠지요.
박정희에 대한 호남의 태도가 63년과 67년을 기점으로 달라진 것은 그의 호남차별이 주효했습니다. 잘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영남패권이 강고해졌다는 외부적 사실 자체만으로 어떻게 국민이 그것을 용인해줬다는 주관적 의사가 도출됩니까? 최소한 선거과정에 영남패권을 하겠다는 말을 했으면 모를까? 그리고 71년 대선에서 호남은 분명하게 영남패권적 과정 특히 개발과정의 차별적 현상에 대해 NO라고 대답했습니다. 유신 이후는 선거 자체가 무의미하니까 패스하겠습니다. 그 당시는 북한의 선거와 유사하다고 보면 될겁니다.
님의 주장은 박정희가 63 67년 대선에서 나는 영남출신 위주의 인사를 하고 영남을 주로 개발하고 영남기업들에게 대출의 60프로 이상을 독점시키겠습니다. 라고 선거과정에서 명시했음에도 박정희가 당선될 가능성이 있을때가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63년은 박정희가 전에 한 정책이 없고 67년에 경부고속도로나 베트남전쟁이 이슈가 된 적은 있지만 영남출신을 우대하라는 것까지 국민 일반의 동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참고로 윤보선 월남파병 반대, 김대중은 월남파병에 대해 부분적 찬성이었습니다 / 경부고속도로의 경우에도 그 당시 야당은 전면반대가 아니고 조건부 찬성이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에 대한 이슈가 있어서 그럼 국민이 경부축에 한정된 불균형개발에 동의한 것이 아니냐 하는 논의도 가능하겠지만 정작 박정희는 자신의 경부고속도로로 인해 균형개발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국민이 불균형개발자체를 동의했다는 것도 어폐가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소수자의 보호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진데 분명하게 자신들의 지역적 차별양상에 문제제기를 했음에도 그 뒤 별반 나아진 바 없고 더 악화되었습니다.
영남이 박정희 독재를 그 당시 지지했다는 것도 조금 그렇습니다. 전 그렇게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영남이 개발의 과정에서 지역주의적 욕구를 표시하긴 했지만 독재자체까지 용인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지역패권에 대한 용인과 독재에 대한 용인은 구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폭력에 기반한 권위적 통치와 영남출신에 대한 과도한 혜택은 그 동의대상이 다릅니다. 영남이 63 67년 당시까지는 전자에 대한 동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다만 후자에 대해서는 상당한 수가 동의한 면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도입니다. 물론 그들의 지역적 열망에 기한 투표가 그들의 본의와 달리 박정희에게 독재부분에 이용당한 면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박정희는 지역적 특혜를 통해 자신의 독재의 기반을 마련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당시 영남이 독재를 용인한 수준은 아니라고 봅니다.
유신이야 형식적이라 국민의 의사자체도 존재한다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에 논의 자체가 무의미할 겁니다.
다만 87년 대선에는 반독재 열기가 엄청나게 높았던 시절이라는 점을 고려해볼때 독재에 대한 영남의 동의가 부분적으로 있었지 않나 하는 정도의 생각이 있습니다.(반독재열기기 있었음에도 노태우에게 상당부분 몰표를 주었다는 것은 그 부분에 대한 미필적 고의를 추정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3당합당의 경우도 아쉬운 대목입니다. 하지만 영남이 모두 독재와 연결되었다고 주장한 바는 없습니다. 부마항쟁의 역사도 있고 노무현 이후의 역사도 있고 하니깐요.
그리고 전 영남이 덜떨어졌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에 투철한 면이 강하죠.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노탱우의 경우처럼 독재까지 (부분적으로) 용인하는 함정에 빠진 면이 있다는 정도죠.
참고로 님처럼 선거는 모든 것에 대한 동의라고 해석하는 것은 홉스식의 절대왕정국가에서나 가능한 이론입니다.(또는 히틀러의 나찌가 집권할 당시처럼 구체적인 수권법에 의한 절대권력의 이양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머 사실 이런 이양 자체가 민주주의이론에서 무의미한 것이긴 하지만요.) 하지만 그 당시 한국은 이미 헌법적으로 민주공화국을 못박고 있었습니다.

한독당 vs 한민당이라는 건 어디서 가져온 겁니까?
민주당의 계보는 그게 아닙니다. 한독당계열의 신익희+한민당계열의 송진우 김성수 백남훈+대동청년단 계열의 지청천이 합작해서 만든게 민국당이고 이 민국당이 나중에 민주당 내 구파가 됩니다. 즉 민주당내 구파에서 친일과 연결되는 것은 한민당이 있을 정도죠
그리고 민주당내 신파는 안창호의 흥사단계열(장면 정일형)과 자유당탈당계(현석호)등이 주축이 됩니다.
민주당 구파는 나중에 윤보선-김영삼으로 이어지고 윤보선이나 김영삼이나 모두 부자였습니다. 윤보선 역시 지주였고 윤보선 집안자체는 친일과 상당히 연관되더군요.(뒤에 나오는 윤치영이 윤보선과 친척관계) 김영삼 역시 자기 아버지가 알아주는 멸치잡이 상인이있었구요(김영삼 정권때 멸치만 수입금지 시켜 때돈을 벌었다는 말도 있었죠)
그리고 민주당 신파는 그닥 친일과 관계 없구요. 물론 관료출신들이 부분적으로 있었지만 그다지 문제는 안됐습니다. 지금의 민주당이 민주당 신파의 맥을 잊고 있다고 볼때 대충 견적이 나오죠.
그리고 자유당은 윤치영의 대한국민당과 관계가 있는데 윤치영 역시 처음엔 한민당출신입니다(얼마전 항일에서 친일로 판명이 되어 서훈이 취소 되었습니다.). 물론 자유당 자체는 이범석의 족청등이 가미됐는데 이승만의 선거를 위해 급조되었죠. 근데 이승만이 자신의 대통령이 될 게 확실하자 족청의 이범석을 외면함으로써 족청은 들러리 수준에 불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윤치영은 3공화국때 박정희때도 활동하구요. 박정희 자신이 일본 육사출신이라 그의 주위 인맥에 친일군인들이 많았습니다. 참고로 민주당 구파의 대부 윤보선은 박정희때와 달리 전두환 노태우때는 그쪽으로 넘어갑니다.(5.16당시에는 의도적으로 협력했다는 혐의는 있음) 암튼 한민당 계열이 그 결과 그쪽으로 많이 들어가기도 하구요. 참고로 자유당출신들은 윤치영에서 알 수 있듯이 나중에 대거 박정희의 공화당에 입당합니다. 독재의 잔재들이 계속 이어온 것이죠.
정확히 말하면 친일은 평가하는 자에 따라 부분적으로 달라질 수 있지만 민주당 신파 는 그닥 연결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민주당 구파도 신익희에서 보듯 올곧은 독립운동가였구요. 머 한민당 계열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윤보선이 나중에 전두환 노태우 지지하면서 그쪽으로 넘어 갔습니다. (유신과 관련되어서는 유진산이 사쿠라로 불릴만큼 그쪽으로 넘어갔음)
확실한 건 지금의 한나라당은 자유당 독재+ 박정희 친일과 독재+윤보선 이하 한민당계열의 친일+나중에 김영삼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거죠.(사실 친일파들은 박정희 때문에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었죠. 이승만까지만 해도 그렇게 까지는 심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경찰 군대와 같은 그런 관계된 부분은 이승만이 친일파를 그대로 썼지만)
나머지 부분중에 60년대 선거에서 국민의 동의가 있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언입니다. 그 당시 선거 자체가 불법 돈 선거였고 여당의 선거 직전 막대한 부정(보통 4대 부정사건라고 하져)이 있었고 증언에 따르면 선거에서 그 당시 GDP의 1/10이 쓰였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밀가루 선거 이런 말도 있었구요. 머 여촌야도라는 구도자체가 돈선거가 먹히느냐 여부와도 밀접히 관계가 있었으니. 그리고 63년 대선에서 이미 박정희는 60프로 67년 대선에서 70프로대의 강력한 지역적 이익을 취합니다. 나아가 63년 부터 이효상등의 활약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지역주의 자체가 이슈가 안되었던 건 비록 영남의 몰표만 있었지 타 지역의 대립적 몰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글을 참조
http://www.skepticalleft.com/bbs/board.php?bo_table=01_main_square&wr_id=13170&sca=&sfl=wr_name%2C1&stx=%EB%A3%A8%EB%82%98%EC%9D%98%EB%B3%84&sop=and
그리고 4.19 당시 사회적 혼란기가 있었지만 박정희는 그 전에 몇번이나 쿠데타의 계획이 있었고 원래 장면을 쿠데타 당시 상징적 인물로 세울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장면도 나중에 친일논란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서로 연관이 있었죠.) 그리고 동시에 장면 정권이 출범하자 마자 쿠데타 모의에 들어갔구요. 이건 그의 쿠데타 과정의 순수성을 의심케 하는 대목입니다. 강준만의 관련 글을 보면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사회가 마치 혼란하도록 보이기 위해 대규모 데모가 일어나도록 유도하기도 했지만 막상 5.16 당시에는 너무도 조용했다고 하죠. 박정희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사실 친일파들의 득세와 연관이 있습니다. 나아가 자유당 독재에 빌붙었던 자들이 박정희를 전폭적으로 밀었던 거죠. 그래야 자기들이 사니까.
그런 의미에서 친일 독재의 뿌리가 박정희를 매개로 면면히 한나라당까지 이어져 온 것입니다.(한민당계열 유진산 윤보선가계. 자유당 독재. 공화당 독재. 박정희 측근의 친일 이렇게요.)
그에 비해 지금의 민주당도 부분적으로 친일이 있었지만(장면의 경우 친일논쟁이 일어나는 것 등으로 볼때 일정부분 있었음) 기본적으로 안창호의 흥사단계를 잊고 있습니다. 나아가 자유당의 독재에 불만을 품고 탈당한 자들이 민주당에 가입했거든요. 또한 족청의 이범석도 이쪽으로 결국은 넘어 오구요.(이건 좀더 확인 필요) 그런 의미에서 반친일 반독재의 면면이 있었고 김대중을 통해 이어져 왔던 겁니다. 참고로 김영삼도 그 자유당을 탈당한 소장파의원 14명중에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이 부유한 집 출신이라 민주당 구파의 지지를 받게 되고 윤보선도 그를 밀었구요. 김영삼의 그 당시까지의 리버테리안적인 면모는 자유당의 독재에 반대하는 정치적 자유중시와 그 자신 부자인 이유로 경제적 우파(또는 보수)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한민당과 연결된 이유도 경제적 보수와 관련되구요. 그러다 3당합당으로 정치적으로도 보수(사실은 패륜)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공화당과 민정당의 연결고리는 박정희가 김종필등의 세력을 대립 견제시킬 목적으로 영남출신 군인을 주로 키우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인맥인 하나회인데 이 하나회를 주축이 되어 세워진게 민정당입니다. 머 어차피 공화당계도 영남인맥등으로 어느정도 흡수되었구요.

어떻게 한독당이 몽땅 자유당으로 갑니까? 한민당 계열의 윤치영도 자유당인데. 그 당시 한독당의 신익희는 민주당으로 갔고. 그러니까 님이 애시당초 처음 시도한 것부터가 에러라는 겁니다.
친일 반일 구분은 친일인명사전을 기준으로 했죠. 다만 장면은 논란정도가 정답이구요.
그리고 한민당계열도 찬찬히 살펴보면 유진산은 박정희에 넘어가고 윤보선은 나중에 전두환 노태우 지지선언으로 넘어갑니다.
민주당 신파의 경우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계와 자유당의 개헌반대를 외치면서 뛰쳐나온 탈당파들은 상당부분 독립운동가 출신입니다. 한민당과 근본이 다르죠.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이 민족주의 계열중에 그나마 덜 타락한 세력입니다.
그리고 자유당 공화당은 집권당이었습니다. 집권당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경찰 군대 검찰 등에 친일 인사를 등용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친일을 했던 사람들이 자유당 공화당을 피신처로 삼았던 겁니다. 민주당이야 장면집권기 고작 1년이라 그런게 제도적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낮았구요. 박정희가 집권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자유당정권하에 있었던 친일분자들이 자신들이 살기위해 정략적을 움직인 면도 없지 않고 그들은 나중에 모두 공화당으로 흘러들어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당 공화당의 계보를 잊는 한나라당이 친일과 연결되는 겁니다. 박정희는 자신부터 혈서를 쓸 정도의 친일이었으니.
63. 67년 선거 직전에 엄청난 부정이 있었고 나아가 쿠데타 이후 강압적 분위기, 식량난에 밀가루 무료배급등이 그 당시 박정희 군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한 면이 있습니다. 여촌 야도가 그런 측면을 반영하구요. 밀가루 선거는 부정선거의 대표적이죠. 더구나 그 당시 박정희 친일경력 자체는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아마 이게 알려졌다면 결코 될 수 없었을 겁니다.) 윤보선이 박정희 빨갱이 경력을 선거전략으로 했는데 이게 그 당시 여순반란사건등과 연결되어 나름 좌파가 많았던 호남 그리고 대구폭동사건으로 나름 좌파가 많았던 대구등에는 부정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박정희 자신이 폭력을 유감없이 동원했기 때문에 지금의 선거와 비교하는 것도 무리입니다.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라고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숱한 망언을 양산해냈습니다. 그 밖에도 공화당 정치인들은 영남 지역
유세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들을 쏟아냈습니다.
"박 대통령은 경상도 대통령 아이가."
"문둥이가 문둥이 안 찍으면
어쩔끼고."
"경상도 사람 쳐놓고 박 후보 안 찍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라."
"1천만 명에 가까운 경상도가 주동이
되고 단결만 하면 선거에 조금도 질 염려가 없다."
"경상도에서는 쌀밥에 뉘 섞이듯 야당표가 섞여 나오면 곤란하니 여당표 일색으로
통일하자."
"우리 지역이 단합하여 몰표를 밀어주지 않으면 저편에서 쏟아져 나올 상대방의 몰표를 당해낼 수
없다."
공화당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활약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김대중 후보가 정권을 잡으면 경상도 전역에
피의 보복이 있을 거라는 인간의 원초적 공포심을 자극하는 터무니없는 발언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아울러 '우리가 똘똘 뭉쳐 몰아주지 않으면
우리는 망한다. 서울이고 경기도고 전라도고 우리 표를 빼낼 곳이 없다. 우리가 몰표를 던짐으로써 우리의 지도자, 조국 근대화의 기수를 건져내야
한다'라고 부추겼다. 그리고 경상도 지역의 공무원들에겐 '김대중이가 만약 정권을 잡으면 모조리 모가지가 날아갈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아울러
공화당원과 경찰,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서울에서 영남 지역으로 내려온 참관인들에게 '이 전라도놈(김대중 후보를 지칭) 앞잡이들아, 모두
꺼져버려라!'라고 스피커를 동원해 대대적으로 협박하고는 공명선거 감시단 참관인들을 모조리 쫓아버리곤 했다. 이 때문에 영남 지역에는 참관인들이
아예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또한 영남 지역 야당 인사들에게는 '이 선거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싸움인데 당신은 왜 전라도놈 앞잡이 노릇을 하고
다니느냐?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이 마을에서 없어져라!' 하면서 여럿이 떼로 몰려와 구타 · 협박하였다. 혹은 술과 밥과 돈으로 매수하여,
투표 당일 야당 참관인으로 참석 못하게끔 했다. 설령 참석한다 해도 그들이 어떠한 선거부정을 저질러도 찍소리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반공주의의 관점에서 박정희의 빨갱이 경력을 63년 선거전에서 이용했던 것은 윤보선으로 대표되는 민주당 구파였습니다. 왜 그들은 반공보수와 무관할 거라는 생각을 하시는지요? 장면만 해도 철저한 반공주의자 였습니다. 물론 유진산은 유신과정에서 사쿠라로 낙인찍히게 되고 윤보선은 전두환 노태우를 지지하면서 배신의 길을 갑니다. 물론 김영삼은 3당합으로 그렇구요.
물론 한나라당은 친일부역 세력, 민주당은 독립투사 이렇게 획일적으로 떨어지지는 않습니다만, 한나라당의 초창기 계보가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이라고 볼때 자유당 집권기간에 친일관료등을 구체적으로 등용해서 자신들의 독재에 이용했던 과거가 있고 공화당의 경우도 박정희 자신과 그 주위 육사동기들이 모두 일본 육사출신이라서 자연스럽게 친일을 등용하게 되었다는 부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집권기간이 대략 몇십년이고 실질적으로 (그 기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으므로써) 그들이 친일부역세력을 보호한 게 사실이져.
그에 비해 민주당 구파 중 한독당계열의 신익희와 대동청년단 계열의 지청천을 제외한 한민당계의 경우 지주출신이라 친일과 연결될 가능성이 높지만(구체적 개개인은 각자 따로 볼 필요가 있음) 민주당 신파의 경우 구파에 비해서 볼때 도산안창호의 흥사단출신과 자유당탈당파가 중심이 되다보니 상대적으로 덜 타락한 세력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구체적으로 집권한 기간도 거의 없기 때문에 친일관료들을 그들의 정권의 호위병으로 부릴 수도 없었구요.
그런 과정에서 상대적이지만 한나라당이 친일 독재 부역 세력이라는 관점이 왜 틀리냐 이말입니다. 그들이 집권할당시 구체적으로 친일을 등용하고 했는데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친일출신들이 자유당 공화당때문에 살 수 있었구요.

한국의 해방공간에 서 그나마 친일이 문제될 수 있는 정치세력은 한민당 계열이었습니다. 한민당계열이 민주당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또 한독당계열이 자유당에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한독당 vs 한민당 이런 구도는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민당이 친일지주층이 많았으니 한민당이 부분적으로 있었던 민주당이 친일정당이다 하는 것도 제가 위에서 족보이야기 하면서 관련 내용을 설명했습니다. 민주당 구성 자체가 구파 와 신파로 나뉘는데 구파 자체에서도 한민당만 있는게 아니고 한독당계열 대동청년단 계열이 섞에 있구요.
또 한민당계열은 유진산때는 유신과정에서 윤보선은 전두환노태우때 조금씩 자유당 공화당의 한나라당계보로 넘어가 버립니다.
결국 민주당에 남는건 한독당 대동청년단의 민주당 구파와 안창호의 흥사단계열과 자유당탈당파들이 됩니다. 자유당탈당파도 이승만 독재에 반대해서 나온 세력이구요.
물론 안창호의 흥사단 계열에 장면에서 보듯 부분적으로 친일의혹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민당의 친일지주에 비해서는 덜 타락했고 또 대부분 독립운동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민당 자체도 독립운동경력(한국 내에서 주로)이 있었다가 다만 끝에 타락한 부류가 많을 뿐입니다. 박정희가 혈서를 쓴 부분이 문제 되어 그 적극성 때문에 친일사전에 올랐듯이요.
그리고 한나라당-친일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한나라당 전신의 집권기간 동안 친일세력을 그들이 보호하고 그들의 정권의 주요축을 실제 가담시켜 이용해왔다는 부분일 겁니다. 그런 면에서 친일이 될 수 있으니 한나라당의 계보는 친일독재잔당이라는 말도 가능한 것이죠. 물론 지금의 한나라당이야 상당부분 변하기 했지만 과거의 유산이 흐르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한민당의 뿌리 주류세력들이 호남 지주들이니까 한민당도 민주당의 뿌리가 맞고.
상해임정 수립때부터 활동하였고 독립후에 김구 선생님과 이시영 선생님과 같이 입국한 해공 신익희 같은 핵심 인물들이 민주당의 뿌리니까 한독당도 민주당의 뿌리가 맞죠.
해방후.
한민당이 결성되었고. 호남지주 김성수와,호남지식인 일본 유학파 독립운동세력 송진우등이 주축이였고.
1946년 대구 총파업 그후 10월 1일 대구 경북 남로당폭동.
미군정과 한민당같은 세력들 그리고 광주에서 결성된 이범석의 민족청년당이 대구폭동을 진압하죠.
그후 남로당은 지하로 숨어들고.
남로당이 다시 떠오른것이 48년 제주 43사건.
그리고 그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려 출동한 14연대 반란.
14연대는 광주 13연대에서 부대가 분할되고 그후 외부에세 다수의 인원이 충원된 부대였고. 그때문에 남로당 세력들이 많이 침투햇고.
광주 상무대에서 남로당 세력들이 활약.
여순은 14연대 반란에 휩쓸리고 여순 주민들 엄청난 이념지옥에 빠지고.
그와 동시에 대구 16연대 반란이 일어나죠.
모두다 남로당 세력들의 군사 반란을 일으켰고 이때 핵심은 남로당 군사총책.. 결국 반란은 진압되고. 이때문에 여순 주민들만 엄청난 희생을 치름
그후 조봉암의 농지개혁추진에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은 단절되고.땅을잃은 한민당 내부의 지주세력들 도퇴되고.
이승만은 자유당을 창당합니다. 이 자유당이 한나라당의 뿌리죠.
한민당은 이승만과 분리된후 김구선생님과 함게 독립운동했던 한독당 그후 국민당을 이끌던 해공 신익희 선생과 합당하죠.
민주국민당이 탄생하고. 해공 신익희 선생이 민주국민당 의장이 됩니다.
그리고 초대부통령이고 이회영 선생님의 막내동생 이시영 선생님도 이승만을 등지고 민주국민당에 참여하고 이시영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서 패하죠.
그후 신익희는 민주국민당을 확대 개편하고 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꿉니다.
신익희와 이승만의 대선에서 신익희가 뇌출혈로 사망하는 바람에 이승만 당선..
60년 4 19 민주당
61년 5 16 그리고 공화당 .
대충보면 이런 방향입니다.
민주당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에서도 핵심세력이이였고.
호남 주류는 한국이 공산화 되지 않는 방패막이로도 핵심세력이였고.....지리산 빨치산의 핵심세력은 대구의 남로당과 남로당에 휩쓸린 삼남지방의 사람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간것이 빨치산이고요.
한독당 이후 민주당이 한독당의 역할을 대체했으니까.
또한.
독재정부에 저항하고 자유 민주주의 한국을 만드는데도 핵심세력이였고.
한국 경제 개발하는데도 호남사람들 타향살이 공돌이 공순이 하면서 죽어라 일했으니까 핵심세력이라고 생각되고. 파월 장병들도 호남 출신이 가장 많았다고 하고..
어디 틀린부분 있으면 말해주세요.

정치/사회게시판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