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서관에서 돌아 오니 제가 쓴 댓글이 직/간접적인 도화선이 되어서 많은 분들이 글을 남겨 주셨군요.  어떤 분한테는 '저능한 개소리' 라는 걸죽한 욕도 듣고, 평소에 제가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흐강님께서는 제 의견에 '지역주의적' 이라는 딱지도 붙여주시고... 근데...솔직히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욕을 먹었는데 기분이 별로 안 좋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좀 이상하더군요. 그냥 뭐랄까... 좀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가슴 속에 서린 한이랄까...그 한이 자신의 정치적인 관념을 철저히 규정할 정도로 체화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 사실 이런 분들 앞에서 민감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쉽지 않은일이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적절한 일인지도 판단이 잘 서지 않더군요. 솔직히 말해 이 글을 게시하는 지금도 이 글을 올리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인가에 대해 회의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한국 정치가 돌아가는 현실과 판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글을 올리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들어 보시고 그냥 개소리라고 생각하시면 그냥 이런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귀엽게 넘겨 주셨으면 합니다.  

2.

서구 기독교 문명의 가장 급진적이고 통렬한 비판자였던 니체는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도덕을 규정하는 감정의 원천에 따라 두 가지 종류의 도덕을 구분했습니다. 노예의 도덕과 주인의 도덕이 그것입니다. 노예의 도덕은 원한의 감정에 기초하고 있는 도덕이고, 주인의 도덕은 자기 만족, 자기 지배, 자기 도취의 감정에 기초하고 있는 도덕입니다. 원한의 감정은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나오는 감정이고, 자기 도취의 감정은 타인의 행위나 시선과는 상관 없이, 자신의 쾌락과 목적만을 위해,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어떤 일을 결행할 수 있다는 자기 우월감으로부터 나오는 감정입니다.  니체는 원시 유대교를 모태로 탄생한 기독교가 기본적으로 원한의 감정에 기초한 노예의 도덕이라고 말합니다. 원한의 도덕이 <노예>의 도덕인 이유는, 그것이 자신을 박해하는 박해자의 의존 관계를 전제로만 성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배 당하는 자>는,  지배자와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자신이 당하고 있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신을 통해 그 원한을 표출해야 합니다. 

타민족의 박해를 받아 끊임없이 정주지 없이 옮겨다녀야 했던 유대 민족에게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원한을 토로하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는 그들만의 신, 바로 야훼 뿐이었습니다. 야훼는 타민족의 신이 아니라 자신들만을 지켜주는 신 입니다. 타민족의 박해로 부터 생겨난 유대인의 원한은 야훼를 통해서만 누그러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훼를 배반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정신적 후원자를 배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야훼와 유대민족 간에는 죄책감을 매개로 한 도덕적 관계가 성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근본적인 죄의 형식, 즉 <너는 처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났다> 는 야훼의 언명은 야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을 스스로 경고하는 일종의 유대민족의 자기 구속의 표현입니다.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매개로 유대민족은 야훼와 자신들을 하나로 묶어 버린 것입니다. 

니체는 이런 노예의 도덕을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니체에 따르면 원한을 매개로 성립하는 도덕은 건강한 정신, 명랑한 정신의 산물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행동 양식은 결국 주인의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에 따라 규정되고 종속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순수히 나의 쾌락, 나의 목적을 위해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그렇게 하기 때문에/ 혹은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다> 면, 이 상황은 엄밀히 말하면 <나의 정신과 행위를 규정하는 것은 내 자신이 아니라 바로 타자>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도덕은 주인이 아니라 노예의 도덕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3. 

한국 정치에서 지역주의는 김대호 소장의 말마따나 <영남과 호남의 적대적 의존 관계>를 매개로 성립된, 한국 정치의 근본 문법에 가깝습니다. 영남의 지역주의가 없이는 호남의 지역주의는 성립할 수 없고, 호남의 지역주의가 상존하는 이상 가해자인 영남 역시 자신의 무장을 섣불리 해제해 버릴 수 없습니다. 박해하는 자와 박해 받는자로 나뉘어져, 두 정당을 매개로 두 세력이 적대적인 대결구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호남 지역주의의 비극은 쪽수에서 밀리는 호남이 쪽수로 정치판의 문법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영남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리만 지키면 자기가 누려온 기득권은 보전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변화의 계기라는 것이 없이도 걱정할 바가 없는 구조의 프리미엄을 누리고 있지요. 반면 호남은? 김대중이 택한 방식처럼 제 3지대 세력과 연대하거나, 영남과 수도권을 아우르는 개혁층을 흡수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남이 하지 않아도 되는, 자기 혁신을 끊임없이 해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타지방의 개혁 세력과의 연대 없이 영남 지배를 깰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남에게는  요구하지 않으면서 왜 호남에게만  요구하느냐> , <영남이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호남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언명은, 민주당에게 숙명적으로 놓여 있는 지역 구도하에서의 자기 혁신의 과제 앞에서는 그냥 궁색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혁신은 바로 영남이 지역 구도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 지역주의를 깰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입니다. <박근혜는, 문재인은, 그리고 유시민(혹은 안철수)는 자기 희생을 했느냐> 라는 질문과, <민주당이 혁신해야 한다>는 주문은, 그러므로 둘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명제입니다.  이 두 명제가 서로 상관이 있어 보이는 이유는, 이미 한나라당의 거울을 통해 민주당을 바라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왜 이래야 합니까? 왜 한나라당의 거울을 통해 민주당을 바라봐야 합니까? 한나라당이 안하는 혁신을 왜 민주당에, 호남에 강요하느냐라는 명제가 의미가 있으려면, 혁신을 하지 않아도 한나라당이 보수 진영의 맹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처럼, 혁신을 하지 않아도 민주당이 지속적으로 개혁 진영의 구심점으로 남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전망이 먼저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솔직해 집시다. 정말로 그러합니까? 정말로 민주당의 미래가 밝다고 보십니까? 외연의 확대에 성공을 하기는 커녕, 민주당 대선 주자들의 지지율을 다 합쳐도 박근혜 지지율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습니다. 그 암울한 상황에서 정당 기반이 전혀 없었던 안철수가 나와서, 민주당 정치인들이 그렇게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냈습니다. 단 일주일만에 박근혜 아성을 허물어 뜨려 버렸습니다. 만에 하나 이런 지지율을 가지고 안철수가 대선 출마를 한다고 가정했을 때, 민주당이 일개 한 명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지 않는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런 경악스러운 상황에서 민주당에 대한 철저하고 통렬한 반성과 고찰이 있기는 커녕, 거의 이데올로기적인 수준으로 격상된 영남패권주의를 전가의 보도로 삼아서 안철수 출신 지역을 문제 삼아 안철수 현상을 깍아 내리기에 급급하고, 현상에 대한 냉정한 분석도 없이  <영남 지역 개혁적 유권자들이 호남 정치인을 지지해주면 된다>는 안이한 소리만 하시고 계시니...위기를 위기라고 하지 않고 현실을 현실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하면...도대체 그 현실은 어떻게 개선될 수 있을까요? 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모르겠더군요. 이것이야말로 피해의식이 만들어 낸 정신 승리법 아닐까요?  <영남에 먼저 강요하기 전에는 호남에게 강요하지 말라> 이것이야 말로 원한의 감정에 기초한 노예의 도덕이 아니겠습니까? 영남에 요구하는 것이랑  상관없이 호남이 스스로 자기 혁신의 요구를 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4. 

묘익천님이 참 맞는 소리를 하셨습니다.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영남 지역 개혁적 유권자들이 호남 정치인을 지지해 주면> 사태는 해결이 되겠지요. 그리고 바로 그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입니다.  그런데... 그럼 호남 지역 정치인들이 지역 구도를 허물기 위해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영남 지역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호남 정치인들이 한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지역 구도>, <지역 주의>만 놓고 이야기 하고 있는 이 마당에 정책적인 측면을 걸고 나와서 물타기는 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영남 개혁층 표밭을 일구는 것은 <영남 애들 소관>으로 수수방관 했다는 것.  민주당 깃발 들고 영남 들어가는 정치인들을 그냥 강건너 불구경 하듯이 봤다는 것,  이것이 진실에 가까운 표현이 아닐까요?  
 국회 의원은 - 진부하지만 너무도 새삼스럽게 들리는 말입니다 - 지역 대표가 아니라 국민 전체의 대표입니다. 국회 의원은 국민 전체의 대표를 선출하는 것이지 그 지역 향우회의 대표를 뽑는 것이 아닙니다. 국회 의원이 지역 정치에서 현실적으로 미치는 막강한 권력, 영향력 때문에라도 한 지역에서 한 사람이 장기 집권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계속 당선된다면...그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인물 경쟁력을 묻기 전에 상황을 먼저 봐야 한다는 것.. 본선에서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 이룩한  6선, 7선이랑  공천만 받으면 당선은 따놓은 당상인 지역의 6, 7선이랑 정치적인 의미와 비중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묘익천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호남에서 계속 지역구도에 대한 도전자가 나와야 한다고 제가 강조하는 이유는 호남이 진보/개혁 세력을 대표하는 대주주이긴 하지만 호남의 힘만으로는 영남 지역 주의의 굴레를 벗어나 자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의 영남의 노예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남의 개혁층, 수도권의 개혁층, 제 3지대의 개혁적 대중을 함께 어우르지 못하면,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지 못하면 이 게임은 승산이 없습니다. 한 사람의 우군이라도 아쉬운 판에 영남 <개혁> 세력 마저도 <영남>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찍어 내리고, 민주당에 쓴소리 하는 사람들을 <영남 삼류 노빠 혹은 유빠>라고 하면서 레이블링하고..이게 뭡니까?  <받은 만큼 고스란히 돌려준다>는 마인드는 그렇게 해도 아쉬울 것이 없을 때나 가능한 소리이지요. 뭐 여기 계신 분들중에는 정권 다시 한나라당에 넘겨 주더라도 <영남> 개혁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마인드를 가지신 분들이 많으시니.. 할 말은 없지만서도. 

 혼자서 자립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계획을 세워야 겠지요. 영남 노유빠들이나 영남 개혁을 움직이지 않고도 자립할 수 있는 방책이 어떤 게 있을까요? 저는 하나가 있다고 봅니다. 호남의 중진급 정치인들이 영남, 특히 대구나 부산에서 출마하는 겁니다. 제가 전 글에서는 <호남 중진급 정치인들이 수도권으로 정치적 기반을 넓혀야 한다>고 말했지만, 솔직한 속내는 수도권이 아니라 영남으로 가서 출마하라는 것입니다. 영남 노유빠 애들한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서, 영남 개혁층과 제 3지대 개혁적 대중의 지지를 얻어올 수 있는 방법은 제가 보기엔 이것 밖에 없습니다. <저는 호남 사람입니다만, 영남 지역에서 일하며 호남과 영남의 조화로운 발전과 화해를 위해서 한 번 일해보고 싶습니다. 저를 통해 영남과 호남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만들어 지면 좋겠습니다 저에게 기회를 한 번 주십시오> 라고 말하면서, 영남 민심의 바닥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겠지만.... 도전하고 도전하면.... 양이 사자가 될때까지 도전한다면... 그 진정성에 움직이는 영남 사람들이 하나 둘 씩...생겨나지 않겠습니까? 그게 단 1퍼센트던... 5퍼센트던....영남 정치인이 아닌 호남 정치인이 영남의 심장부에 들어가서 영남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호남에 대한 영남의 증오를 깰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무기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호남이 호남만의 힘으로, 영남 대중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거대한 변혁의 시작이 되는 것이지요. 한 정치인에게는 정치적인 자살 행위일지라도, 집단 전체의 관점에서는...특히 호남의 관점에서는...그 정치인의 희생은 거대한 변혁을 이끄는 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문재인이 왜 민주당 대선 주자나 유시민을 제치고 범 야권의 가장 유력한 대권 후보로 각인이 되었을까요? 문재인이 영남 사람이라서? 사태를 너무 안이하게 보시는 겁니다. 그럼 그 많은 영남 정치인들 중에 왜 하필 문재인일까요? 대중이 문재인을 통해 보는 것은 노무현이고, 노무현을 통해서, 자신을 박제함으로서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버린 - 그것이 단지 그렇게 보여지는 이미지일 뿐이라도 - 정치적인 상징의 결정체를 목도하기 때문입니다. 호남에서는 그런 자기 박제를 감행하면서 지역 구도를 깨려고 하는 정치인이 왜 나와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관장사를 한다고 폄하하는 분께 묻고 싶습니다. 지금 관 속에 누워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요? 


* 한 두줄 댓글 놀이는 제 적성과는 맞지 않아서 이번 글은 댓글을 닫고 게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