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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plifters of the World Unite (By Slavoj Žižek)

만국의 들치기꾼들이여 단결하라 (슬라보예 지젝)

 

* 출처: <런던 북 리뷰> 2011819

http://www.lrb.co.uk/2011/08/19/slavoj-zizek/shoplifters-of-the-world-unite



 

Repetition, according to Hegel, plays a crucial role in history: when something happens just once, it may be dismissed as an accident, something that might have been avoided if the situation had been handled differently; but when the same event repeats itself, it is a sign that a deeper historical process is unfolding. When Napoleon lost at Leipzig in 1813, it looked like bad luck; when he lost again at Waterloo, it was clear that his time was over. The same holds for the continuing financial crisis. In September 2008, it was presented by some as an anomaly that could be corrected through better regulations etc; now that signs of a repeated financial meltdown are gathering it is clear that we are dealing with a structural phenomenon.

 

헤겔에 따르면, 반복은 역사에서 하나의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어떤 것이 단지 한번 일어날 때, 그것은 하나의 우연인 것으로, 상황이 달리 대처되었다면 피할 수도 있었던 어떤 것으로 기각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사건이 반복될 때, 그것은 심층적인 역사적 과정이 전개되고 있다는 신호이다. 나풀레옹이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패했을 때, 그것은 악운처럼 보였다; 그가 워털루에서 다시 패했을 때, 그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동일한 것이 계속되고 있는 금융위기에도 해당된다. 20089, 그것은 일부 사람들에 의해 더 나은 규제들 등등을 통해 정정될 수도 있었을 하나의 변칙으로 제시되었다; 반복되는 금융 폭락의 신호들이 도처에서 울리고 있는 지금은 우리가 하나의 구조적 현상을 대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We are told again and again that we are living through a debt crisis, and that we all have to share the burden and tighten our belts. All, that is, except the (very) rich. The idea of taxing them more is taboo: if we did, the argument runs, the rich would have no incentive to invest, fewer jobs would be created and we would all suffer. The only way to save ourselves from hard times is for the poor to get poorer and the rich to get richer. What should the poor do? What can they do?

 

우리는 채무 위기를 겪고 있다는, 그리고 우리 모두가 부담을 분담해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얘기를 거듭 들어왔다. (바로) 부자들을 제외한 모두 말이다. 부자 증세안은 금기다. 반론은 늘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부자증세를 하면 부자들이 투자 인센티브를 갖지 못하게 되어 일자리들이 더 줄어들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우리 모두가 더 고생하게 될 것이다. 어려운 시절을 헤쳐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빈자가 더 빈곤해지는 것이고 부자가 더 부유해지는 것이다. 빈자가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빈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Although the riots in the UK were triggered by the suspicious shooting of Mark Duggan, everyone agrees that they express a deeper unease but of what kind? As with the car burnings in the Paris banlieues in 2005, the UK rioters had no message to deliver. (There is a clear contrast with the massive student demonstrations in November 2010, which also turned to violence. The students were making clear that they rejected the proposed reforms to higher education.) This is why it is difficult to conceive of the UK rioters in Marxist terms, as an instance of the emergence of the revolutionary subject; they fit much better the Hegelian notion of the ‘rabble’, those outside organised social space, who can express their discontent only through ‘irrational’ outbursts of destructive violence what Hegel called ‘abstract negativity’.

 

영국에서의 폭동이 마크 더간의 수상쩍은 사살에 의해 촉발되었다고는 하지만 모든 이는 그것이 심층적인 불안을 표현한다는 데 동의한다 - 그러나 어떤 종류의 불안인가? 2005년 파리 외곽에서의 자동차 방화들이 그런 것처럼 영국 폭도들은 전달한 아무런 메시지도 갖고 있지 않았다. (역시 폭력으로 번졌던 201011월의 대규모 학생 시위들과 뚜렷이 대조된다. 학생들은 그들이 고등교육 개혁안을 거부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었다.) 이것이 영국 폭도들을 마르크스주의적 용어들을 사용해 혁명적 주체의 출현 사례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그들은 헤겔의 떼거리개념에 훨씬 더 잘 맞아 떨어진다. 파괴적 폭력의 몰합리적분출 - 헤겔이 추상적 부정성이라고 불렀던 것 - 을 통해서만 불만을 표현할 수 있는, 조직화된 사회적 공간 외부에 있는 이들.

 

There is an old story about a worker suspected of stealing: every evening, as he leaves the factory, the wheelbarrow he pushes in front of him is carefully inspected. The guards find nothing; it is always empty. Finally, the penny drops: what the worker is stealing are the wheelbarrows themselves. The guards were missing the obvious truth, just as the commentators on the riots have done. We are told that the disintegration of the Communist regimes in the early 1990s signalled the end of ideology: the time of large-scale ideological projects culminating in totalitarian catastrophe was over; we had entered a new era of rational, pragmatic politics. If the commonplace that we live in a post-ideological era is true in any sense, it can be seen in this recent outburst of violence. This was zero-degree protest, a violent action demanding nothing. In their desperate attempt to find meaning in the riots, the sociologists and editorial-writers obfuscated the enigma the riots presented.

 

도둑질을 한다는 의심을 받은 노동자에 관한 오래된 얘기가 있다: 매일 저녁, 그가 공장을 나설 때마다, 그가 밀고 다니는 손수레는 철저하게 수색당했다. 경비원들은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것은 언제나 비어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사태는 다음과 같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노동자가 훔치고 있던 것은 바로 손수레였다. 경비원들은 명백한 진실을 놓치고 있었다. 폭동에 대해 논평했던 이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1990년대 초 공산주의의 체제의 해체가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신호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전체주의적 파국에서 정점에 이른 거대 규모의 이데올로기적 기획들의 시대는 끝났다; 우리는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정치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우리가 포스트이데올로기적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상식이 어느 의미에서이든지 간에 진실이라면, 이 최근의 폭력 분출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분출은 영도의 저항,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폭력 행위였다. 그 폭동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필사적 시도를 하면서, 사회학자들과 논설자들은 그 폭동이 제기했던 수수께끼를 흐리게 했다.


The protesters, though underprivileged and de facto socially excluded, weren’t living on the edge of starvation. People in much worse material straits, let alone conditions of physical and ideological oppression, have been able to organise themselves into political forces with clear agendas. The fact that the rioters have no programme is therefore itself a fact to be interpreted: it tells us a great deal about our ideological-political predicament and about the kind of society we inhabit, a society which celebrates choice but in which the only available alternative to enforced democratic consensus is a blind acting out. Opposition to the system can no longer articulate itself in the form of a realistic alternative, or even as a utopian project, but can only take the shape of a meaningless outburst. What is the point of our celebrated freedom of choice when the only choice is between playing by the rules and (self-)destructive violence?

 

저항자들은 비록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실상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있기는 했지만 굶주리는 지경에 있지는 않았다. 신체적 및 이데올로기적으로 더 억압당했던 것은 물론이고 물질적으로도 그들보다 훨씬 더 궁핍했던 이들이 분명한 의사일정을 지닌 정치세력으로 그들 자신을 조직화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폭도들이 아무런 프로그램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러므로 그 자체로 하나의 해석되어야 할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곤경에 관해, 그리고 우리가 거주하는 종류의 사회, 즉 선택을 찬양하지만 강제되는 민주적 합의의 가용한 유일한 대안이 맹목적인 행동인 사회에 관해 아주 많은 것을 얘기해 준다. 체제에 대한 반대는 더 이상 하나의 현실주의적 대안의 형식으로, 또는 하나의 유토피아적 기획으로조차도 표현될 수 없으며 오직 무의미한 분출의 모습만을 취할 수 있다. 유일한 선택이 규칙대로 플레이하는 것과 (자기-) 파괴적인 폭력 사이에서의 선택일 때, 우리의 그토록 찬양받는 선택의 자유의 요점은 무엇인가?

 

Alain Badiou has argued that we live in a social space which is increasingly experienced as ‘worldless’: in such a space, the only form protest can take is meaningless violence. Perhaps this is one of the main dangers of capitalism: although by virtue of being global it encompasses the whole world, it sustains a ‘worldless’ ideological constellation in which people are deprived of their ways of locating meaning. The fundamental lesson of globalisation is that capitalism can accommodate itself to all civilisations, from Christian to Hindu or Buddhist, from West to East: there is no global ‘capitalist worldview’, no ‘capitalist civilisation’ proper. The global dimension of capitalism represents truth without meaning.

 

알랭 바디우는 우리가 점점 더 세계 없음으로 경험되는 사회적 공간 속에서 살고 있다고 논한 적이 있다: 그러한 공간 속에서, 저항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은 무의미한 폭력이다. 아마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의 주요 위험들 중 하나이리라: 비록 글로벌해진 덕에 전체 세계를 포괄하기는 해도, 자본주의는 사람들로부터 의미 있는 삶을 살 방도들을 박탈한 세계 없는이데올로기적 성좌를 밑받침한다. 세계화[전지구화]의 근본적 교훈은 자본주의가 기독교에서 힌두교나 불교에 이르기까지, 서에서 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명들에 순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반적인 자본주의적 세계관같은 것은, 고유의 자본주의적 문명같은 것은 없다.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차원은 의미 없는 진리를 표상한다.

 

The first conclusion to be drawn from the riots, therefore, is that both conservative and liberal reactions to the unrest are inadequate. The conservative reaction was predictable: there is no justification for such vandalism; one should use all necessary means to restore order; to prevent further explosions of this kind we need not more tolerance and social help but more discipline, hard work and a sense of responsibility. What’s wrong with this account is not only that it ignores the desperate social situation pushing young people towards violent outbursts but, perhaps more important, that it ignores the way these outbursts echo the hidden premises of conservative ideology itself. When, in the 1990s, the Conservatives launched their ‘back to basics’ campaign, its obscene complement was revealed by Norman Tebbit: ‘Man is not just a social but also a territorial animal; it must be part of our agenda to satisfy those basic instincts of tribalism and territoriality.’ This is what ‘back to basics’ was really about: the unleashing of the barbarian who lurked beneath our apparently civilised, bourgeois society, through the satisfying of the barbarian’s ‘basic instincts’. In the 1960s, Herbert Marcuse introduced the concept of ‘repressive desublimation’ to explain the ‘sexual revolution’: human drives could be desublimated, allowed free rein, and still be subject to capitalist control viz, the porn industry. On British streets during the unrest, what we saw was not men reduced to ‘beasts’, but the stripped-down form of the ‘beast’ produced by capitalist ideology.

 

폭동에서 끌어낼 수 있는 첫 번째 결론은 그러므로 그 소요에 대한 보수주의적 반응과 자유주의적 반응 양자 모두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적 반응은 예측될 수 있었다: 그러한 파괴 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정당화도 있을 수 없다;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들을 사용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폭발이 계속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은 관용과 사회적 도움이 아니라 더 엄한 규율, 근면한 노동 그리고 책임감을 필요로 한다. 이 설명의 그릇됨은 그것이 청년들을 폭력적 분출을 향해 밀어내는 절망적인 사회적 상황을 무시한다는 것만이 아니다.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 분출이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의 숨겨져 있는 전제 자체를 반향하는 방식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보수주의자들이 기본으로 돌아가자캠페인을 개시했을 때, 노먼 테빗은 그것의 외설적인 보충물을 드러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일 뿐만 아니라 영토적 동물이기도 하다; 부족주의와 영토성이라는 그 기본적 본능들을 충족시키는 것은 우리의 의사일정의 일부이어야 한다.’ 이것이 기본으로 돌아가자가 정말로 관심 가졌던 것이다: 우리의 외양상 문명화된, 부르주아 사회 밑에 잠복해 있던 야만인을, 야만인의 기본적 본능들을 충족시키는 것을 통해, 풀어놓기. 1960년대에, 허버트 마르쿠제는 성 혁명을 설명하기 위해 억압적 탈승화개념을 도입했다: 인간 충동들은 탈승화되어 전적인 자유를 허용받으면서도 여전히 자본주의적 통제에 예속될 수 있다 - , 포르노 산업. 영국의 거리에서 그 소요 동안 우리가 보았던 것은 짐승들로 환원된 인간들이 아니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생산된 짐승, 의장(艤裝)이 떼어 내진 형상이었다.


Meanwhile leftist liberals, no less predictably, stuck to their mantra about social programmes and integration initiatives, the neglect of which has deprived second and third-generation immigrants of their economic and social prospects: violent outbursts are the only means they have to articulate their dissatisfaction. Instead of indulging ourselves in revenge fantasies, we should make the effort to understand the deeper causes of the outbursts. Can we even imagine what it means to be a young man in a poor, racially mixed area, a priori suspected and harassed by the police, not only unemployed but often unemployable, with no hope of a future? The implication is that the conditions these people find themselves in make it inevitable that they will take to the streets. The problem with this account, though, is that it lists only the objective conditions for the riots. To riot is to make a subjective statement, implicitly to declare how one relates to one’s objective conditions.

 

다른 한편 좌파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 못지않게 예측될 수 있었던 대로, 사회복지 프로그램들 및 사회통합 추진에 관한 그들의 진언(眞言)을 반복했다. 그것들의 무시가 2-3세대 이민자들로부터 경제적 및 사회적 전망들을 박탈했다는 것이다: 폭력적 분출이 그들이 불만을 표현해야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복수 판타지에 탐닉하는 대신, 우리는 그 분출의 심층 원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빈곤한, 여러 인종들이 섞여 있는 지역에서 경찰에 의해 무조건 의심 받고 회롱 당하는, 실업자이자 종종 취업이 아예 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지니고 있지 못한 청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타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함축은 이 청년들이 처해있는 조건들이 그들이 거리로 나서는 것을 불가피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설명에는 폭동의 객관적 조건들만을 열거한다는 문제가 있다. 폭동을 일으킨다는 것은 하나의 주관적 진술을 행하는 것, 암묵적으로 객관적 조건들과 관계하는 방식을 선언하는 것이다.

 

We live in cynical times, and it’s easy to imagine a protester who, caught looting and burning a store and pressed for his reasons, would answer in the language used by social workers and sociologists, citing diminished social mobility, rising insecurity, the disintegration of paternal authority, the lack of maternal love in his early childhood. He knows what he is doing, then, but is doing it nonetheless.

 

우리는 냉소적 시대에 살고 있고, 따라서 상점을 털고 불지르다 잡혀 왜 그랬느냐는 다그침을 받으면 감소된 계층상승 가능성, 증대되고 있는 불안전, 부모의 권위의 해체, 유년기의 모성애 결핍을 열거하면서 사회복지 요원들과 사회학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답할 저항자를 상상하는 것은 쉽다. 그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고 있다.

 

It is meaningless to ponder which of these two reactions, conservative or liberal, is the worse: as Stalin would have put it, they are both worse, and that includes the warning given by both sides that the real danger of these outbursts resides in the predictable racist reaction of the ‘silent majority’. One of the forms this reaction took was the ‘tribal’ activity of the local (Turkish, Caribbean, Sikh) communities which quickly organised their own vigilante units to protect their property. Are the shopkeepers a small bourgeoisie defending their property against a genuine, if violent, protest against the system; or are they representatives of the working class, fighting the forces of social disintegration? Here too one should reject the demand to take sides. The truth is that the conflict was between two poles of the underprivileged: those who have succeeded in functioning within the system versus those who are too frustrated to go on trying. The rioters’ violence was almost exclusively directed against their own. The cars burned and the shops looted were not in rich neighbourhoods, but in the rioters’ own. The conflict is not between different parts of society; it is, at its most radical, the conflict between society and society, between those with everything, and those with nothing, to lose; between those with no stake in their community and those whose stakes are the highest.

 

보수주의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인 이 두 반응들 중 어느 것이 더 나쁜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스탈린이 하곤 했던 말대로, 그것들 둘 다 더 나쁜, 이 분출의 진짜 위험은 침묵하는 다수의 예측 가능한 인종주의적 반응이라는, 양편 모두가 제기한 경고까지 포함해서 그렇다. 이 반응이 취했던 형식들 중 하나는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신속히 자경단을 조직했던 지역 (터키인들, 카리브인들, 시크인들) 공동체들의 부족적활동이었다. 그 소매상인들은 폭력적이지만 진정한 반체제 저항에 맞서 자신들의 재산을 방어하고 있는 소부르주아들인가; 아니면 그들은 사회적 해체의 힘에 맞서 싸우고 있는 노동계급 대표자들인가? 여기서도 우리는 편을 들라는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 진실은 그 갈등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의 두 극들 사이의 갈등이었다는 것이다: 체제 내에서 기능하는데 성공한 이들 대() 너무나 좌절한 나머지 더 이상 시도할 수 없는 이들. 폭도들의 폭력은 거의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이웃들]에게 가해졌다. 불태워진 자동차들과 털린 상점들은 부자 동네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폭도들의 동네에 있는 것들이었다. 그 갈등은 사회의 서로 다른 부분들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회와 사회 사이의, 모든 것을 가진 이들과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이들 사이의, 자신들의 공동체에 아무런 이해관심도 갖고 있지 않은 이들과 최고의 이해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 사이의 갈등이다.

 

Gygmunt Bauman characterised the riots as acts of ‘defective and disqualified consumers’: more than anything else, they were a manifestation of a consumerist desire violently enacted when unable to realise itself in the ‘proper’ way by shopping. As such, they also contain a moment of genuine protest, in the form of an ironic response to consumerist ideology: ‘You call on us to consume while simultaneously depriving us of the means to do it properly so here we are doing it the only way we can!’ The riots are a demonstration of the material force of ideology so much, perhaps, for the ‘post-ideological society’. From a revolutionary point of view, the problem with the riots is not the violence as such, but the fact that the violence is not truly self-assertive. It is impotent rage and despair masked as a display of force; it is envy masked as triumphant carnival.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 폭동을 불량하고 무자격한 소비자들의 행위로 특징지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것은 적절한방식으로 - 쇼핑에 의해 - 실현될 수 없을 때 폭력적으로 실행된 소비주의적 욕망의 표출이었다. 그와 같은 것으로서, 그것은 또한, 소비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아이러니한 응답의 형태로, 진정한 저항의 한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 ‘당신들은 우리로부터 적절한 방식으로 소비를 할 수단을 박탈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소비를 권유한다 -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소비를 행하고 있다!’ 그 폭동은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힘의 한 시현이다 - 이것이 [소위] ‘포스트-이데올로기적 사회의 실상이리라.

 

The riots should be situated in relation to another type of violence that the liberal majority today perceives as a threat to our way of life: terrorist attacks and suicide bombings. In both instances, violence and counter-violence are caught up in a vicious circle, each generating the forces it tries to combat. In both cases, we are dealing with blind passages à l’acte, in which violence is an implicit admission of impotence. The difference is that, in contrast to the riots in the UK or in Paris, terrorist attacks are carried out in service of the absolute Meaning provided by religion.

 

그 폭동은 오늘날 자유주의적 다수가 우리의 생활방식에 대한 위협으로 지각하고 있는 또 한 유형의 폭력과의 관계 속에서 자리 매김 되어야 한다: 테러 공격과 자살 폭탄. 두 사례들 모두에서 폭력과 대항폭력은 악순환에 빠져 있다. 각각은 그것이 맞서 싸우고자 하는 무력을 발생시킨다. 두 경우들 모두에서, 우리는 맹목적인 충동적 행동(passages à l’acte,)을 대하고 있는데, 거기서 폭력은 무능력의 암묵적 인정이다. 차이는 영국이나 파리에서의 폭동과는 대조적으로 테러 공격은 종교에 의해 제공되는 절대적 의미에 봉사해서 실행된다는 것이다.


But weren’t the Arab uprisings a collective act of resistance that avoided the false alternative of self-destructive violence and religious fundamentalism? Unfortunately, the Egyptian summer of 2011 will be remembered as marking the end of revolution, a time when its emancipatory potential was suffocated. Its gravediggers are the army and the Islamists. The contours of the pact between the army (which is Mubarak’s army) and the Islamists (who were marginalised in the early months of the upheaval but are now gaining ground) are increasingly clear: the Islamists will tolerate the army’s material privileges and in exchange will secure ideological hegemony. The losers will be the pro-Western liberals, too weak in spite of the CIA funding they are getting to ‘promote democracy’, as well as the true agents of the spring events, the emerging secular left that has been trying to set up a network of civil society organisations, from trade unions to feminists. The rapidly worsening economic situation will sooner or later bring the poor, who were largely absent from the spring protests, onto the streets. There is likely to be a new explosion, and the difficult question for Egypt’s political subjects is who will succeed in directing the rage of the poor? Who will translate it into a political programme: the new secular left or the Islamists?

 

그런데 아랍에서의 봉기들은 자기-파괴적 폭력이냐 종교적 근본주의냐라는 허위적 양자택일을 피했던 하나의 집단적 저항행위가 아니었던가? 유감스럽게도, 2011년의 이집트 여름은 혁명의 종언을 표지했던 시기로, 그것의 해방적 잠재력이 질식당했던 시기로 기억될 것이다. 그것의 뒷처리자들은 군부와 이슬람주의자들이었다. 군부 (즉 무바라크의 군부)와 이슬람주의자들 (격변의 초기 몇 달 동안은 주변에 머물러 있다가 이제 세력을 얻고 있는 이들) 사이의 협약의 윤곽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군대의 물질적 특권들을 용인할 것이고 그 대가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확보할 것이다. 패자들은 CIA 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촉진하기에는 너무 약했던 친서방 자유주의자들과 봄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의 진짜 주역들, 즉 노동조합들에서 페미니스트들에 이르기까지 시민사회 단체들의 네트웍을 구축하려 시도해왔던, [이제 막] 등장한 세속[주의]적 좌파이다. 급속하게 악화되고 있는 경제상황은 조만간 봄 동안의 시위에는 대체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빈자들을 거리로 나서게 할 것이다. 십중팔구, 새로운 폭발이 있을 것이므로 이집트의 정치주체들이 당면한 어려운 물음은 누가 빈자들의 격분을 지도하는데 성공할 것인가이다. 누가 그것을 하나의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번역할 것인가: 신흥 세속[주의적] 좌파인가 이슬람주의자들인가?

 

The predominant reaction of Western public opinion to the pact between Islamists and the army will no doubt be a triumphant display of cynical wisdom: we will be told that, as the case of (non-Arab) Iran made clear, popular upheavals in Arab countries always end in militant Islamism. Mubarak will appear as having been a much lesser evil better to stick with the devil you know than to play around with emancipation. Against such cynicism, one should remain unconditionally faithful to the radical-emancipatory core of the Egypt uprising.

 

이슬람주의자들과 군부 사이의 협약에 대한 서방 여론의 지배적 반응은 의심할 바 없이 냉소적 지혜의 과시이다: (-아랍) 이란의 경우가 분명하게 했던 대로, 우리는 아랍 나라들에서의 민중봉기들은 언제나 전투적 이슬람주의로 귀착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게 될 것이다. 무바라크는 훨씬 덜한 악이었던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 해방을 향해 나가려 하기 보다는 친숙한 악마를 떠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한 냉소주의에 맞서, 우리는 이집트 봉기의 급진적-해방적 핵심에 무조건적으로 충실한 채 남아 있어야 한다.

 

But one should also avoid the temptation of the narcissism of the lost cause: it’s too easy to admire the sublime beauty of uprisings doomed to fail. Today’s left faces the problem of ‘determinate negation’: what new order should replace the old one after the uprising, when the sublime enthusiasm of the first moment is over? In this context, the manifesto of the Spanish indignados, issued after their demonstrations in May, is revealing. The first thing that meets the eye is the pointedly apolitical tone: ‘Some of us consider ourselves progressive, others conservative. Some of us are believers, some not. Some of us have clearly defined ideologies, others are apolitical, but we are all concerned and angry about the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outlook that we see around us: corruption among politicians, businessmen, bankers, leaving us helpless, without a voice.’ They make their protest on behalf of the ‘inalienable truths that we should abide by in our society: the right to housing, employment, culture, health, education, political participation, free personal development and consumer rights for a healthy and happy life.’ Rejecting violence, they call for an ‘ethical revolution. Instead of placing money above human beings, we shall put it back to our service. We are people, not products. I am not a product of what I buy, why I buy and who I buy from.’ Who will be the agents of this revolution? The indignados dismiss the entire political class, right and left, as corrupt and controlled by a lust for power, yet the manifesto nevertheless consists of a series of demands addressed at whom? Not the people themselves: the indignados do not (yet) claim that no one else will do it for them, that they themselves have to be the change they want to see. And this is the fatal weakness of recent protests: they express an authentic rage which is not able to transform itself into a positive programme of sociopolitical change. They express a spirit of revolt without revolution.

 

그러나 우리는 또한 상실한 대의의 나르시시즘의 유혹을 떨쳐내야 한다: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봉기들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오늘날의 좌파는 규정적 부정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봉기 후에 어떤 새로운 질서가 낡은 질서를 대체해야 하는가? 첫 번째 순간 [낡은 질서를 파괴하는 시기 - 역주] 의 숭고한 열광은 언제 끝나는가? 이 맥락에서, 스페인 인디그나도스가 5월에 시위를 벌인 후 발표한 선언은 의미심장하다. 첫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명시적으로 비정치적인 톤이다: ‘우리 중 일부는 자신들을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일부는 자신들을 보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중 일부는 신자들이고 다른 일부는 아니다. 우리 중 일부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들을 분명하게 규정해 왔고 다른 일부는 비정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우리 주위에서 눈에 들어오는 정치적, 경제적 및 사회적 전망에 관심을 지니고 있고 그 전망에 격분해 있다: 우리를 무력하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정치가들, 사업가들, 은행가들의 부패.’ 그들은 우리가 우리의 사회에서 준수해야 하는 양도할 수 없는 진리들 - 거주, 취업, 문화, 건강, 교육, 정치적 참여, 자유로운 개성 발달의 권리들과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위한 소비자 권리들을 위해 저항한다. 폭력을 거부하면서, 그들은 윤리적 혁명을 요구한다. ‘돈을 인간들 위에 두는 대신, 우리는 돈을 인간들에게 봉사하는 자리로 되돌려 놓을 것이다. 우리는 생산품들이 아니라 인간들이다. 나는 내가 구매하는 것의, 내가 구매하는 이유의, 그리고 내가 구매하는 이의 생산품이 아니다.’ 누가 이 혁명의 주역들이 될 것인가? 인디그나도스는 좌우를 불문하고 전체 정치적 계급을 부패해 있고 권력욕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기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언은 일련의 요구들로 구성되어 있다 - 누구에게 하는 요구인가? 인간들 자신에게는 아니다: 인디그나도스는 (아직) 그 밖의 어느 누구도 그들을 위해 혁명을 해주지 않을 것이니 그들 자신이 그들이 보기를 바라는 변화[의 주역]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최근의 저항들의 치명적 약점이다: 그것들은 명확하고 적극적인 사회정치적 변화 프로그램으로 번역될 수 없는 진정한 격분을 표현한다. 그것들은 혁명 없이 반란의 정신을 표현한다.

 

The situation in Greece looks more promising, probably owing to the recent tradition of progressive self-organisation (which disappeared in Spain after the fall of the Franco regime). But even in Greece, the protest movement displays the limits of self-organisation: protesters sustain a space of egalitarian freedom with no central authority to regulate it, a public space where all are allotted the same amount of time to speak and so on. When the protesters started to debate what to do next, how to move beyond mere protest, the majority consensus was that what was needed was not a new party or a direct attempt to take state power, but a movement whose aim is to exert pressure on political parties. This is clearly not enough to impose a reorganisation of social life. To do that, one needs a strong body able to reach quick decisions and to implement them with all necessary harshness.

 

그리스의 상황은 더 전망 있어 보이는데, 최근의 (스페인에서는 프랑코 체제의 몰락 후 사라졌던) 진보적 자기-조직화의 전통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그리스에서조차도 저항운동은 자기-조직화의 한계를 드러낸다: 저항자들은 평등주의적 자유의 공간 - 모든 이들이 동일한 발언 시간 등등을 할당받는 하나의 공적 공간 - 을 그것을 조절할 아무런 중심적 권위도 없이 밑받침하고 있다. 저항자들이 다음에 무엇을 할지를, 어떻게 한갓된 저항 너머로 움직여 나갈지를 토론하기 시작했을 때, 다수의 합의는 필요로 되는 것은 새로운 당이나 국가권력을 장악하려는 직접적 시도가 아니라 [기존의] 정파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사회생활의 재조직화를 부과하는데 충분하지 않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재빨리 결정들에 도달하고 필요한 모든 혹독한 조치들로 그것들을 이행할 수 있는 강인한 신체를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