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 모듈성(massive modularity) 테제를 지지하는 진화 심리학자들은 영역-특수적(domain-specific) 기제를 강조한다. 질투에 전문화된 기제, 언어 학습에 전문화된 기제, 근친상간 회피에 전문화된 기제, 친족 인지에 전문화된 기제, 음식 선호에 전문화된 기제 등 수도 없이 많은 기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반면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나 전통적 인지 심리학자들은 영역-일반적(domain-general) 기제를 강조한다.

 

 

 

영역-일반적 기제가 존재한다는 증거를 들이대면서 대량 모듈성 테제가 반증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진짜로 대량 모듈성 테제를 일관되게 부정하는지가 의심스럽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래 글을 참조하라.

 

진화 심리학 첫걸음마 --- 003. 대량 모듈성 테제가 논점인가?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3fZ/251

 

어쨌든 대량 모듈성 테제는 영역-일반적 기제의 존재와 모순되지 않는다.

 

 

 

시각과 뱀 인지의 사례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다. 우리는 눈으로 짝짓기 대상도 보고, 경쟁자도 보고, 친족도 보고, 음식도 보고, 맹수도 보고, 하늘의 별도 보고, 지형도 본다. 시각 기제는 온갖 영역의 정보를 처리한다. 이런 면에서 시각 기제는 영역-일반적 기제다.

 

인간은 시각 기제의 저수준 처리 과정에서 뱀 형상을 인지한다고 한다. 잔디밭에서 뱀처럼 똬리를 튼 호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가 그것이 뱀이 아니라 호스라는 것을 깨닫고 안심하는 경우가 있다. 이 때 깜짝 놀란 이유는 저수준 처리 과정에서 뱀 형상을 인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수준 처리를 통한 뱀 형상 인지는 매우 빠른 반면 부정확하다. 그래서 뱀과 비슷하게 생긴 호스를 뱀으로 잘못 해석하기도 한다. 고수준 처리는 느린 반면 정확하다. 이 사례에서는 고수준 처리를 통해 그것이 뱀이 아니라 호스임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시각 기제는 영역-일반적이다. 반면 저수준 뱀 형상 인지 기제는 영역-특수적이다. 이것은 뱀 형상을 인지에 전문화되어 있다. 어떤 진화 심리학자가 대량 모듈성 테제에 대해 역설하면서 저수준 뱀 형상 인지 기제를 영역-특수적 모듈의 한 예라고 이야기한다고 하자. 이런 주장에 맞서 영역-일반적인 시각 기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대량 모듈성 테제가 틀렸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아니다. 영역-일반적인 시각 기제의 존재는 저수준에서 작동하는 영역-특수적인 뱀 형상 인지 기제의 존재와 모순되지 않는다. 독사와 관련된 선택압 때문에 자연 선택에 의해 뱀 형상 인지 기제가 진화했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다른 증거가 필요하다.

 

 

 

다른 영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영역-일반적인 학습 기제의 존재는 선천적인 질투 기제, 근친상간 회피 기제, 친족 사랑 조절 기제, 강간에 전문화된 기제의 존재와 모순되지 않는다. 또한 영역-일반적인 추론 기제의 존재는 사회적 계약과 관련된 선천적인 추론 기제의 존재와 모순되지 않는다. 선천적인 질투 기제나 사회적 계약과 관련된 선천적 추론 기제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다른 증거가 필요하다.

 

영역-일반적 시각 기제, 영역-일반적 후각 기제, 영역-일반적 청각 기제, 영역-일반적 학습 기제, 영역-일반적 추론 기제, 영역-일반적 기억 기제, 영역-일반적 쾌-불쾌 기제 등의 존재를 입증한다고 대량 모듈성 테제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선천적 기제들의 존재가 입증된다면 오히려 대량 모듈성 테제에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입증된 선천적 모듈들의 수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선천적 질투 기제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영역-일반적 학습 기제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선천적 질투 기제는 없으며 질투 행동이 그 학습 기제의 산물임을 따로 입증해야 한다.

 

 

 

또한 인간 뇌의 많은 부분이 영역-일반적 학습 기제에 의해 사용된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해도 대량 모듈성 테제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설사 뇌의 90% 이상이 그런 학습 기제에 의해 사용된다고 해도 대량 모듈성 테제는 무너지지 않는다. 대량 모듈성 테제는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 선천적 모듈들의 수가 수백, 수천 개 이상이라는 이야기지 그런 모듈들이 전체 뇌 세포들 중 몇 %를 사용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역-일반성 개념과 영역-특수성 개념은 상대적이다. 저수준에서 작동하는 뱀 형상 인지 기제보다는 시각 기제가 영역-일반적이다. 하지만 시각 기제는 어떤 면에서는 영역-특수적이다. 왜냐하면 청각도, 근육 운동도, 논리 추론도, 기억도, 성 충동도 아닌 시각에 대한 정보만 처리하기 때문이다.

 

온갖 영역에서 힘을 발휘하는 학습 기제가 있다는 것이 확실히 입증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 피아노 학습에도 쓰이고, 타자 학습에도 쓰이고, 운전 학습에도 쓰이고, 미적분 학습에도 쓰이고, 야구 학습에도 쓰이는 매우 일반적인 학습 기제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하자. 이 학습 기제는 어떤 면에서 보면 영역-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온갖 영역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영역-특수적이다. 왜냐하면 기억도, 추론도, 시각도, 음식 선호도 아닌 학습에 전문화된 기제이기 때문이다.

 

 

 

이덕하

2011-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