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경우 유전자와 환경,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생물학적인 것과 문화, 본능과 학습, 본성(nature)과 양육(nurture) 중 환경, 후천적인 것, 문화, 학습, 양육의 영향이 유전자, 선천적인 것, 생물학적인 것, 본능, 본성의 영향보다 더 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특수한 맥락을 제외하면 이런 비교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척도가 서로 다른 온도와 길이를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예컨대 섭씨 30도와 40cm 중 어느 쪽이 큰지를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비교를 하려면 하나의 척도를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특수한 맥락을 제외하면 유전자와 환경을 비교할 수 있는 척도, 생물학적인 것과 문화를 비교할 수 있는 척도, 본능과 학습을 비교할 수 있는 척도, 본성과 양육을 비교할 수 있는 척도를 찾기가 매우 힘들어 보인다. 적어도 나는 그런 척도를 본 적이 없다.

 

 

 

선천성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행동 유전학의 유전율(heritability) 개념은 개인차(individual difference) 중 어느 정도가 유전자의 차이 때문이고 어느 정도가 환경의 차이 때문인지를 따진다. 이것은 행동 유전학적 의미의 선천성이다. 진화 심리학에서는 선천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본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은 진화 심리학적 의미의 선천성이다.

 

위에서 특수한 맥락을 제외하면을 삽입한 이유는 유전율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유전율 개념은 동일한 척도로 유전자의 기여 비율과 환경의 기여 비율을 비교한다. 하지만 유전율 개념에는 한계가 있다. 유전율은 유전자의 영향과 환경의 영향을 일반적으로 비교하지 않는다. 개인차라는 특수한 맥락에서만 비교할 뿐이다.

 

또한 유전율은 연구 대상인 개체군에 의존한다. 키의 유전율을 따진다고 해 보자. 만약 어떤 개체군의 빈부격차가 극심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지독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부자들은 영양 상태가 아주 좋다면 빈부격차가 심하지 않은 경우보다 키의 유전율이 낮게 나올 것이다. 만약 어떤 개체군이 여러 인종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키의 유전율이 높게 나올 것이다.

 

 

 

엔트로피(entropy) 개념은 물리학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정보 이론(information theory)에서 쓰이는 엔트로피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어떤 정보의 비트(bit) 수를 엔트로피라고 한다. 컴퓨터에 있는 .wav 음악 파일이나 .bmp 그림 파일에는 파일 크기 즉 비트 수가 있다. 그것을 압축 프로그램으로 압축하면 비트 수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이상적인 압축 프로그램으로 압축했을 때의 비트 수가 엔트로피라고 생각하면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물론 엔트로피 개념을 엄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보 이론 교과서를 보아야 한다.

 

골치 아픈 수학을 다루는 정보 이론 교과서가 부담스러운 사람에게는 John R. Pierce가 쓴 대중서 『Introduction to Information Theory: Symbols, Signals, and Noise』를 추천하고 싶다.

 

백과사전에도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Entropy_(information_theory)

 

인간 본성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정보의 양은 몇 비트인가? 즉 인간 본성의 엔트로피는 얼마인가? 그리고 그 정보 중 어느 정도가 유전자로부터 오고 어느 정도가 환경으로부터 올까? 나는 누군가 이 문제를 다룬 것을 본 적이 없다. 어쨌든 비트 수라는 하나의 척도로 유전자가 인간 본성에 기여하는 비율과 환경이 인간 본성에 기여하는 비율을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도 위에서 언급한 특수한 맥락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엔트로피 개념을 활용하여 유전자와 환경,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생물학적인 것과 문화, 본능과 학습, 본성(nature)과 양육(nurture)의 기여 비율을 비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런 대담한 시도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유전율 말고 같은 척도로 그런 것을 비교한 것을 본 적이 없다. 기여 비율을 비교하려면 비교를 위한 척도를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유전자보다 환경의 영향이 더 크다, 선척적인 것보다 후천적인 것의 영향이 더 크다, 생물학적인 것보다 문화의 영향이 더 크다, 본능보다 학습의 영향이 더 크다, 본성보다 양육의 영향이 더 크다와 같은 명제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나는 척도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이런 명제를 주장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덕하

2011-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