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성문법을 채택한 국가라 할지라도 그 질서는 대부분 상식이라 부르는, 어찌보면 불문법과 같은 것들에 의존하여 작동한다. 설사 그것들이 명문화하여 법전에 기록되지 않았을지라도, 상식을 위반하는 것은 쉽사리 용납되지 않는다. 법을 어기면 형법에 의해 교도소로 가지만, 상식을 어기는 것은 때로 정신병원행을 감수해야 하는, 어찌보면 처벌의 대상이기도 하다.

1987년 6월, 군부 독재가 무너지고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의 시대로 들어섰다. 그 때, 한국 사회는 단순히 대통령 직선제등을 내용으로 하는 헌법 개정만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국민들의 항쟁으로 얻어낸 성과는 그런 눈에 보이는 성문법이 아니라 몇 개의 상식과 같은 불문법에 있었다. 그것들은 당대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반론의 여지없이 합의한 것이며, 뒤집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리라 약속한 것들이었다.

당시의 합의된 불문법들을 대강 간추려 요약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 민주주의의 기본 규칙들은 권력으로부터 철저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 군사 문화의 잔재들은 더 이상 권장되지 않으며, 즉시 청산되어야 한다.
* 선출 권력은 오로지 국민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며, 임명 권력은 철저히 선출 권력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 경찰, 검찰, 안기부, 국세청, 감사원, 군부등 공권력을 행사하는 기관들은, 그 어떤 정치적 사안에도 자의적인 판단을 해서는 안되며, 권력 또한 자신들의 당파적 요구를 공권력에게 명령해서도 안된다.
* 노사 문제에 권력이 개입해서는 안되며, 평화적인 집회와 시위를 최루탄과 폭력으로 진압해서도 안된다.
* 국민의 양심, 사상, 신체, 표현의 자유는 권력의 의지보다 상위에 존재한다.
* 권력은 절대로 국민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된다.
* 국민 세금을 권력의 당파적 이해에 따라 사용해서는 안된다.

미처 적지는 못했지만 이 외에도 많을 것이다. 어쟀든, 지금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걱정한다. 그 걱정은 바로 위에 열거한, 상식으로 여겨졌던 87년의 불문법들이 무효가 될 위기를 맞았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 사건에 검찰의 자의적인 정치적 판단이 행사되었을 거라는 정황이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있고, 평화적인 집회와 시위는 진압하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으며, 표현의 자유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으며, 사적인 서신 내용은 언론에 공표되고 있고, 대법관은 재판에 개입해도 무사하며, 경찰청장은 노사문제가 대화로 해결되어 경찰 투입을 안해도 되기를 바란다는 정치적 발언을 서슴치 않고, 정부의 시민단체 지원금은 단체성향에 따라 차별적으로 지급되고 있다.

그것들에 더해 마침내, 국민들의 사적인 영역인 극장안에서, 정부의 홍보물이 일방적으로 상영되는 작태가 연출되기에 이르렀다.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솔직히 고백하건데 지금 이 글때문에 꼬투리잡혀 어느날 갑자기 경찰의 부름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제 권력은 더 이상 국민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체 무엇이 저들에게 이토록 과감한 용기를 내도록 부추겼을까?

대한 늬우스. 이번주에 딸래미와 트랜스포머2를 보러가기로 했는데, 정말 가도 될까 고민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런 나를 핀잔한다. 그까이꺼 한바탕 코메디라고 넘기면 되지 뭘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냐고 웃는다. 정말 그래도 될까? 정말 극장안에서 눈 질끈 감고 귀 막고 그 시간만 대충 넘기고서 즐겁게 영화만 보면 끝나는 허투른 문제일까? 그러면 다 해결되는가? 진정 우리가 피 땀 흘려 만들어낸 그 아름답고 위대한 합의들이 이렇게 허망하게 야금 야금 무너지는 모습을 대범하게 못본척 해도 되는 것일까?

대한 늬우스는 결코 코메디가 아니다. 코메디의 생명은 풍자에 있다고 했다. 대체 저것 어디에 풍자가 있고 해학이 존재하는가? 국민의 사적인 영역을 아무렇지도 않게 침범하는 권력의 의지를 이 사회가 느끼지 못하고 쉽게 용서한다면, 그래서 불편함을 느끼는 내가 도리어 이상한 사람이라면, 이 사회는 1987년 여름의 그 뜨겁던 날, 왜 그렇게 권력에 대들면서 피와 눈물을 흘렸을까? 이제 그 피와 눈물들은 대체 어디서 보상받을 것인가?